"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이런 것을 아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의정부와 6조? 유향소? 과거 제도? 5위?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 부처가 몇 개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조선의 6조를 알게 한다? 무슨 의미일까? 요즘 저는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 아이들과 국사, 역사 교과서를 같이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역사 교사들이 수업 고민을 나누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많은 역사 교사들이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하며 부딪치는 근본적인, 자기 존재 이유에 대해서 아프게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저 먼 과거를 오늘 가르치는 것이 도대체 아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어떤 쓸모가 있는가 물으면 답이 참 궁색해지니까.
아, 뭐 어렵게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역사의 가치를 힘주어 말할 것이다. 인류의 지난 삶을 통해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등등. 그리고 앞에서 의미와 쓸모를 병렬시키며 은근히 의미를 실용적인 면에서 바라보는 현실의 한심함을 비판하고 인문적인 깊이에서 역사를 배우는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가 와 닿을 수 있을까, 여기서 역사 교사들은 벽을 만난다. (언젠가는 깨닫겠지 하며 밀고 나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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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전 5권,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그런데 이 두꺼운 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다. 아이들의 책상과 교사의 교탁 위에 펼쳐진 교과서다. 인류의 삶을 이해한다, 오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준다 등등의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지, 헛소리인지를 증명해 보여주는 그것. 아, 너무 책임을 교과서에 떠넘기는 것 같아 고생했을 저자들에게 죄송스럽다.
개인적으로도 몇 해 동안 검정(정확한 제도 용어로는 2종) 교과서로 바뀐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 봤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우리 제도 안의 역사 교과서가 역사의 재미와 가치를 담아서 아이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 전의 국정(1종) 교과서일 때는 저렴한 원고료와 충분치 못한 제작 기간, 학생 수준을 이해 못하는 연구자들의 서술 등등이 많은 문제로 지적되었다.
검정으로 바뀐 다음에는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교육 과정을 비롯한 문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또한 무겁게 교과서를 내리누른다. 게다가 제한된 지면은 친절하고 흥미로운 서술 대신 건조하고 딱딱한 글이 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압력이었다.
서평에 다루어야 할 책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교과서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 좋은 역사책을 만날 기회가 더욱 풍부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해주었으면 한다. 물론 교과서와 대중 도서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역사를 친근하게, 재미있게 느끼해 줄 수 있는 그런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같지 않을까.
5권에 이르는, 쪽수를 모두 합하면 1500쪽에 이르는 역사문제연구소가 펴낸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전5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단지 친근하고 재미있는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18년 전에 나온 이 책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와 견준다면, 그 시간이 진일보의 시간이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번 책들에 제시된 시각 자료는 한결 컬러풀하고 시원시원하게 편집되어 보는 맛이 제법이다. 편집만으로도 이 책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손을 끌어당길 것 같다. 유물 사진, 옛 그림, 지도나 그래픽들이 눈에 잘 들어오면서도 잘 정리 전시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보는 맛만이 아니라 읽는 맛에서도 훨씬 부드럽고 매력적인 책이 되었다. 글쓴이가 여럿이다 보니 권이나 장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중의 눈높이를 많이 생각한 노력이 보이는 친절하면서 여유 있는 문체를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좋은 역사책을 접하게 해주고픈 역사 교사로서 반가운 책이다.
한편으로 3월 개학 후 새로운 교육 과정으로 만들어진 '한국사' 수업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또 고마운 마음이다. 아이들이 직접 읽기에는 사실 역사학계의 조금 전문적인 내용도 없지 않은데, 그런 내용들이 교과서에 담지 못한 역사들을 알려 주어 수업 준비에 도움이 되었다.
사실 교과서는 제한된 지면이나 이런 저런 이유로 보여주지 않는, 들려주지 못하는 역사들이 적지 않다. 아이들에게 좀 더 역사적 사고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던져 주고픈 내용들이 있는데, 그럴 때 그것을 적절히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교사로서 쉽지는 않다. 한국의 모든 시대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최근의 세부적인 시대 전공 연구를 따라가기는 어렵고, 다시 그것을 아이들 눈높이로 맞추어 다시 정리한다는 것 꽤 공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군현 문제. 요즘 교과서는 국정이나 새 검정 교과서나 슬쩍 넘어가고 만다. 이전 식민사관에 강조되었던 것에 비해 실제 역사적 가치가 높지 않다는 평가의 반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의 '식민지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특강 형식으로 구성된 꼭지 가운데 '한사군, 식민지인가 우리 역사인가'에서 이를 사실에 입각해 다루면서도 우리의 열등감을 넘어 객관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역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임나일본부설 논쟁',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한일 역사 전쟁', '식민지 근대화 논쟁' 등등에 대해서도 너무 흥분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논점을 제시해 주고, 기존의 논점의 한계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해준다.
이렇게 특강 꼭지 중에는 실제 학교 수업 시간에 토론 자료로 제시하고픈 것들이 적지 않다. 역사를 단지 외우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며 토론하는 과정에서 역사 공부의 새로운 의미, 가치를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본문을 읽어가다 오래된 상식과 다른 관점에서 사실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꽤 접하게 된다. 이른바 신라 '중대' 즉 신라 통일 이후의 전제 왕권 강화에 대한 이해가 그렇다. 통일 신라의 안정기, 전성기의 특징으로 바라보던 시각과는 다르다. 과연 그 때가 안정된 시기였을까, 오히려 갈등이 쌓여가던 시기가 아닌가. 왕권의 강화는 일반 백성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기도 한다.
발해에 대한 서술 역시 오래된 상식을 깨고 있다. 발해 건국 이전을 '다민족 융합의 사회로 재정립'하고 말갈족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발해의 민족 구성과 관련해서 "발해는 '고구려 계와 말갈족'이라는 이중성이 아니라,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말갈족의 국가'라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새삼 우리 시대의 한국사 이해가 나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도 느껴졌다. 기존의 '국사'가 '우리'를 강조하며 닫혀 있었다면 '한국사'는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세계사의 흐름과도 이해의 끈을 지으며 나갈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특강 꼭지들 가운데, 예를 들면 '하와이로 간 사진 신부'라든가, '조선에 사는 일본인' 이야기, '메이데이: 세계 노동자 연대와 근로자의 날'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근현대사만이 아니라 전근대사에서도 '중석기 시대 논쟁'이나 '토기의 발명과 지역성' 들이 세계적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게 해주고 있다.
다섯 권짜리 <한국의 역사>는 교사의 입장에서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세련되고 풍부한 '역사 교사용 지도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게 칭찬인가, 비판인가 스스로도 헛갈린다.
요즘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나 10여 년 전 '한국사' 개설서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어쩌면 좀 낯선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도 좀 더 참신하면서도 열린 시각의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로, 옛 사람의 삶의 숨결도 느낄 수 있으면서, 또 '한국사'의 구조적인 이해나 흐름의 파악도 놓치지 않는 책.
그런데 교사로서는 조금 걱정이 남기도 한다. 항상 아이들이 이 말 뜻을,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걱정하는 버릇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사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쌓여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래도 한국사 연구의 성과들이 알뜰하게 담긴 이 책이 사실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를 좋아하고 스스로 이 책을 집어들 이들에게는 지나친 기우일 테지만.
어쨌든 올해 수행 평가 독서 보고서 추천 목록에 이 책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아이들에게 조금 어렵더라도 그게 독서력을 기를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