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공상을 한다. 시간을 마음대로 되돌릴 수 있다면? 지능지수(IQ)가 200쯤 된다면? 내게만 하루가 48시간이라면?

어릴 때는 이런 공상을 나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들 이런 공상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답도 이미 마련돼 있다. 학생에겐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해!', 직장인에겐 '엉뚱한 생각 말고, 일해!'.

하지만 이런 정답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 역시 누구나 안다. 인간은 늘 실수하기 마련이고, 후회는 나이와 비례해서 쌓인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은, 하고 싶은 일만 하기에도 부족하다. 그런데 하물며 해야 하는 일까지 챙기려면, 결국 방법은 공상뿐이다. 상상 속에서 별의 별 짓을 다 해보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상상할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여기, 기발한 공상이 있다. 팔순에 가까운 노인의 공상이다. 경력도 비범하다. 소비자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네 차례나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다시 대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 결국 방법은 공상이다. 벌여놓은 일이 많으면, 회한도 짙은 법. 그래서 공상 역시 진하다.

청년 변호사 시절, 거대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와 맞장을 떴고, 그래서 GM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던 랠프 네이더의 이야기다. 네이더가 혼자 삭이고 삭인 묵직한 공상을 책으로 펴냈다.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강경미 옮김, 꾸리에 펴냄)라는 제목이다.


▲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랠프 네이더 지음, 강경미 옮김, 꾸리에 펴냄). ⓒ꾸리에
미국에선 순자산이 280억 원 이상인 사람을 '슈퍼리치(Superrich)'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슈퍼리치'들은 그보다 몇 단계 위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테드 터너 등이 주인공이다. 경제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다. 전 세계 부자들의 서열을 매길 때면, 늘 맨 앞에 나오는 이름들이니까.

팔순 노인 네이더의 공상은, 시간을 뒤로 되감는 것으로 시작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휩쓸었던 지난 2005년 9월이다. 멕시코의 재벌 카를로스 슬림,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3위의 부자인 워런 버핏은 텔레비전에 중계된 뉴올리언스의 참극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물 위에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끔찍한 모습이 그저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는 더 큰 충격을 받는다. 평소엔 재난을 예방하고, 실제로 재난이 닥쳤을 때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계속 뒷짐만 지고 있었던 게다.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가난한 나라도 사망자들을 신속히 매장하는데, 미국 한복판 도시 하수에 며칠째 시신이 떠다니고 시체가 썩도록 방치하다니…"

워런 버핏은 텔레비전을 끄고 재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당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과 비슷한 '슈퍼리치'들을 불러 모은다. (혹시 헷갈릴 수 있는 독자들을 위해 다시 확인. 2005년 9월, 워런 버핏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 나온 내용은, 오로지 네이더의 공상일 뿐이다.)

착한 부자들의 유쾌한 반란?

2006년 1월, 버핏은 하와이 마우이 섬의 한 호텔을 통째로 빌린다. 그리고 미디어 재벌인 테드 터너, 빌 게이츠의 아버지인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 '역사상 최고의 펀드 매니저'로 꼽히는 조지 소로스 등 17명의 '슈퍼리치'들을 초대한다.

버핏은 그곳에 모인 '슈퍼리치'들에게 빈곤과 부패, 지구 온난화 등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고 호소한다. '슈퍼리치'들은 여기에 동의하고, 미국을 송두리째 바꾸기 위한 '대전환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불평등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금권 정치를 타파하고, 경제의 하부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 책의 도입부에선 사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는다. 워런 버핏이나, 테드 터너, 조지 소로스가 그토록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들은 애초 '슈퍼리치'가 될 수 없었을 게다. 더구나 책 속 주인공들이 성토하듯, 미국이 그토록 불합리하고 부패한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여린 마음을 지닌 이들은, 합리적이고 투명한 사회에서도 '슈퍼리치'는 되기 힘들다. 하물며 금권 정치가 판치는 사회에서라면, 꿈도 못 꾼다.

하지만, 이 책은 어차피 팔순 노인의 공상. 일단 그러려니 하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중반쯤에서 탄력이 붙는다. 미국 보험 업계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는, 책의 중반부에 이르면, 책장이 휙휙 넘어간다. GM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던 네이더의 근성과 통찰력은 녹슬지 않았다.

이 책은 해피엔딩이다. 착한 부자들은 뜻을 이룬다.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모든 시민을 위한 국민건강보험 법안을 도입하며,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세제 개혁안을 통과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갖고 있는 부(富)가 유감없이 힘을 발휘한다. 예컨대 이들의 입장을 공정하게 알리기 위해 방송국을 인수하는 식이다. "우리는 부자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부자를 계속 배출할 수 있는 견고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라는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책 속 주인공 중 한 명, 빌 게이츠의 아버지)의 꿈은 이뤄진다.

워런 버핏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이 책은 온전히 공상이지만, 사이사이에 팩트(사실)가 곁들여져 있다. 그래서 실감이 난다. 주인공인 워런 버핏은 현실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감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부시 정부의 감세 정책 때문에 내 사무실의 전화 받는 직원과 청소부들의 과세율이 나보다 높아졌다. 이 역시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 나 같은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가난한 자들에게는 감세를, 이것이 부자인 내가 미국 정부에 보내는 긴급한 요청이다."

워런 버핏이 '실제로' 한 말이다. 그는 또 빌 게이츠와 함께 '기부 서약(Giving Pledge)' 캠페인을 주도했다. 죽기 전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서약이다. 40명에 가까운 '수퍼리치'들이 이런 서약에 동참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워런 버핏은 좌파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믿음이 그의 투자 성공 비결이었다. 좌파들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위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저평가 우량주에 투자했다. 한마디로, 그의 생각은 '부자가 될 기회'를 독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씨암탉을 잡아먹으면 혼자서 잠깐 배부른 것으로 끝나지만, 적당히 모이를 줘서 살려두면 여러 사람이 오래 배를 불릴 수 있다. 워런 버핏의 실천은, 비유하자면 씨암탉이 계속 달걀을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워런 버핏의 이런 면모를 떠올려보면, 네이더의 공상이 아주 터무니없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가 국방 예산을 깎고 '군산 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했던 일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피도 눈물도 없던 자본가가 말년에 착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엉뚱한 생각 말고, 투표 해!"

그러나 이 책은 결국 공상이다. 또 남의 나라 이야기다. 한국 최고 부자인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는 워런 버핏이 아니다. 몹시 내성적인 그가 오랜만에 기자들 앞에 섰을 때 한 이야기는, '대기업이 협력 업체와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주장은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부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책에 나온 '슈퍼리치'들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공상은 그저 공상으로 즐기는 게 옳다. 계속 공상 속에만 머무르려 한다면, 결국 이 글 도입부의 '정답'을 다시 꺼낼 수 밖에 없다. '엉뚱한 생각 말고, 투표 해!'.

그렇다. 적어도 이 땅에는 아직 착한 '슈퍼리치'가 없다. 씨암탉이라도 잡아먹겠다는, 게걸스런 재벌들이 판칠 따름이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상을 조금 더 살맛나게 만들어 줄 '슈퍼리치'가 없다면, 보통 사람들이 할 일은 분명하다. '비판의 안경'을 끼고 신문을 꼼꼼히 읽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투표소로 향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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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통상부 출입기자로 이름을 걸어 놓은 지 5년 반이 넘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3년 2개월이 넘었으니, '출입' 기간의 반 이상을 이 정부에서 보낸 셈이다.

굳이 '이름을 걸어 놓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우선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다. 대형 언론사의 기자들처럼 한 부처를 전담해 속속들이 파고드는 '부처 밀착형' 취재가 불가능하다. 일본 지진, 원자력 발전소 사고처럼 초대형 국제 뉴스가 터지면 짐을 싸서 회사로 들어와 일하는 게 편하다. '상주 출입기자 자격을 유지하려면 최소 며칠은 나와야 한다'는 조건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런 현실적인 이유 말고 이름을 걸어만 놓는 이유, 정확히 말해 걸어만 놓아도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외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외교라는 건 결국 북한과 관련된 대외 활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6자 회담은 2008년 12월인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6자 수석대표 회담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 북핵 문제와 관련된 외교 활동이 없지는 않지만 한국 정부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진전이 없다. 그러다 보니 굳이 거기 가서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부랴부랴 달려가야 했던 일을 꼽자면 최근 일어난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 유명환 장관 딸 특채 파동, 크고 작은 영사 사건 같은 것들이다. 물론 매우 중요하고.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캐야 할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한다면 비용 대비 효과의 측면에서 볼 때 일이 터지면 달려가는 게 낫다는 걸 5년 반 동안 '요령'으로 익혔다. 외교부 출입기자들은 정치부 소속인데 이 정부 들어서는 사회부 기자가 된 것 같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도 드디어 외교를 하게 됐다'는 말이 나왔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한국의 외교는 왜 다시 이렇게 쪼그라들었을까. 한 마디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외교의 비전이나 철학이 이명박 정부에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 붕괴론에 입각한 '기다리기' 전략, 일방적인 대미 추종이 이 정부 '외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 24시>(이승철 지음, 부키 펴냄). ⓒ부키
<한국 외교 24시>(이승철 지음, 부키 펴냄)를 보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주무르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상우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대부'이자 막후 실세이고, 그의 애제자인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드러난 실세다. 그 주위에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 남주홍 국제안보대사,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등이 포진하고 있다.

"전쟁과 무력 사용만은 안 된다는 생각은 신화고 강박 관념이다. 그것이 오히려 북핵 문제를 흐리게 하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막을 수 있다. 정밀 폭격에 따른 주가 하락이 위험한지, 북한의 핵 보유로 한국 경제의 도산이 더 위험한지 생각해야 한다."

"북한을 결코 핵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달리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정상 회담이 유용한 수단이 되지 않는다. 북한이 생존 위협을 느낄 만큼 국제 사회가 전방위 압박을 가하든지…."

<한국 외교 24시>에 소개된 2005년 5월 김태효 비서관(당시 성균관대학교 교수)의 말은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 정책이 견지하는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는 이들을 'MB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라고 부르는데, 대미 추종적 외교관을 기본으로 깔고 있으면서 대화보다는 힘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을 주름잡았던 네오콘 그룹과 닮아 있다고 분석했다.

MB 네오콘과 부시 네오콘이 이념적 성향은 물론이고 등장 과정마저 닮았다는 분석은 흥미롭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2000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지지했다. 그러나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네오콘들은 어느새 백악관과 국무부에 있는 외교·안보 주요 포스트를 장악해 이라크 침공과 같은 일방주의 외교를 밀어붙였다. 그 과정은 MB 네오콘의 대부인 이상우 위원장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밀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명박 후보가 됐고, 그들은 시나브로 이명박 정부의 핵심 요직을 꿰찼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유출 가능하다. 차기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와 이상우 그룹은 원래부터 가까운 관계라는 것. 그렇다면 만약 박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외교·안보·대북 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임이 자명하다. 박 전 후보 캠프에 있는 외교·안보 브레인들의 면면을 보면 한국의 네오콘들은 이미 말을 바꿔 탈 준비를 끝낸 셈이다.

저자 이승철은 현재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1991년 외무부 출입 기자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줄곧 외교 현장을 누비면서 한국 외교의 '빛과 그늘'을 지켜봤다. 그 사이 워싱턴 특파원과 국제부장을 지냈다. MB 네오콘과 부시 네오콘의 성향과 등장 과정이 닮았다는 재미있는 사실은 그와 같은 이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짚어 내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외교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이 책의 일부에 불과하다. 저자는 김영삼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한국 외교의 구조적 문제점과 고질병을 정리했다. 구호만 요란할 뿐 자주와 실리 어느 한쪽도 챙기지 몫하고 때로는 대통령을 위한 용비어천가용으로, 때로는 여론 달래기용으로 성과를 포장해 온 것은 비단 이명박 정부뿐만이 아니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국내 정치만 바라보는 '국내용 외교', 국제 행사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벤트 외교', 실리보다 의전이나 겉치레를 중시하는 '형식 외교' 등의 행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정부에나 다 있었다. MB 네오콘 같은 실세 그룹 역시 어느 대통령 때에나 다 있었다. <한국 외교 24시>는 그처럼 비교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그야 말로 '구석구석' 알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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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은 도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다."

최근 들은 얘기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의 친동생이 부당한 돈을 받았다. 당신은 친동생을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친동생이 당신의 적과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친동생을 배반할 것이다. '불법, 비리는 눈감아줄 수 있다. 단, 나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비정한가? 어쩔 수 없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한국식 패거리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명제다.

남성들은 오늘도 '정치적 이득'을 함께 추구하고자 룸살롱에서 각종 '대사'를 해치우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최근 한 공직자가 "스마트폰에 '카카오 톡'(메신저)을 깔았는데, 연락이 끊긴 룸살롱 마담들에게 연락이 쇄도해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기자는 왜 그 공직자의 스마트폰에 룸살롱 마담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마담이 있는 자리에서 누굴 만나고, 무슨 얘기를 했을까.

영화 <부당거래>에 등장하는, 과거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요정 형태를 띤 고급 룸살롱의 풍경이 그려졌다. 조직폭력배 취재로 유명한 한 기자는 이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말이 된다"고 했다는데, 기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풍경은 일반인에게 낯설지 않다. 아침 화장실에서 신문 한 부만 훑어도 그런 일들이 일상다반사라는 것은 누구나 알게 되리라.


▲ <룸살롱 공화국>(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강준만의 <룸살롱 공화국>(인물과사상사 펴냄)은 이런 사건들을 '신문 콜라주'를 하듯 이어 붙인다. 열쇳말은 제목대로 '룸살롱'이다. 그 역사는 우리의 굵직한 현대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은 일본 관료들한테 아주 잘 보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되지 않았거든요.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 은행계, 기업계에서 큰 역할을 했던 한상룡같은 매판 자본가는 자신의 집을 개방해서 총독부 관료들을 접대하는 것을 일종의 의례처럼 하고…." (박노자)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1950년 12월 29일 부산 피난 시절 <조선일보>에 실린, '고급 요정 폐쇄령'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를 뒤져낸다. 당시 김두한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전쟁 통에 "양주병을 앞에 놓고 엔조이에 한창들"인 늘봄 댄스홀의 문을 열고 권총 16발을 공중에 발사했다고 한다. 이런 암흑기는 지났지만 요정은 남았다.

이 책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원을 받아 문을 연 500~600명 수용 규모의 삼청각이 그 출발이다. 그 삼청각 오픈 파티에 참석한 중정 요원 50명의 위엄을 묘사한 신문 기사를 지나, 1979년 10·26 궁정동의 '만찬', 1988년의 '룸살롱 올림픽' 천태만상, 룸살롱에서 술 마시다 같이 마시던 판사 앞에서 칼 휘두른 조폭의 사연, '문민정부 황태자' 김현철과 DJ(김대중)의 아들 김홍업이 이권 청탁 장소로 애용한 룸살롱 '지안', 386 정치인의 5·18 광주 룸살롱 파동, 그리고 최근의 스폰서 검사 사건과 '장자연 성 착취 사건'으로 드러난 연예인 접대 실태까지 룸살롱으로 엮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현대사 풍경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 놓는다.

이 같은 룸살롱 65년의 기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룸살롱이 '성 매매'를 필연적으로 수반했다는 점 그리고 고위층만 출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004년 10월 판사들이 룸살롱에서 성 접대를 받아 세간에 알려졌던 일이나, 2009년 청와대 행정관의 성 접대 사건, "나도 기자들에게 모텔 키 많이 나눠줘 봤다"는 강희락 전 경찰청장의 발언, "100명의 검사를 접대했다"는 기업인의 제보로 시작된 '스폰서 검사' 사건을 보면 그렇다. 기업인, 검사, 판사, 정치인이 은밀한 '칸막이'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하고, 어떤 '향응'을 제공받았을까. 진실은 상상에 맡기자.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성 접대 사실을 부인했다.)

어떤 사건도 진실이 밝혀진 적은 없다. 그들의 힘 자체가 워낙 세기 때문일 것이고, '친구(동료)의 도덕성'은 눈감아 주는 사회의 분위기와 '힘 센 놈'을 서로 챙겨주는 끈끈한 관계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고검 검사 김규헌은 2009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02년 연예인 성 상납 사건 수사 때 엄청난 외압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수사 착수 1개월 만에 충주지청장으로 '좌천'된다. 그에게 쏟아진 로비(혹은 협박)는 '종합적'이고 '전방위적'이었다. 법무부 밖 고위직 관료, 나중에 장관이 된 고위직 공무원, 사업하는 후배들이 김 검사에게 '압력'을 넣었다. 연예기획사와 이들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개별 조직의 이해가 상충되더라도, 이른바 기득권층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사회, 그곳이 '코리아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강준만이 '룸살롱 공화국'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추적한 이 보고서는 룸살롱이 의사 결정 기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까지도 넌지시 포함하고 있다. 룸살롱 안의 칸막이에서 이뤄진 결정들이 한국 사회에 엄연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인데, 물론 이런 주장이 입증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겨레> 1999년 1월 20일자 칼럼에는 "심지어 룸살롱에서 판사와 검사, 변호사, 외근 사무장이 만나 형량과 재판 기일을 결정하는 일까지 벌어진다"고 익명의 변호사 사무장의 말이 인용돼 있다. 판사들이 들고 일어서 결국 '사과 기사'를 싣는 촌극으로 이어졌지만, 강준만은 "아무려면 룸살롱이 법정이었겠는가.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하면서 교훈으로 삼자는 뜻에서 나온 선의의 과장법으로 보는 게 옳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넘길 순 없잖은가 말이다"라며 심증을 보탠다.

강준만의 '한국 사회 문화사 시리즈' 중 하나인 이 책은 룸살롱 패거리 문화의 특성을 '칸막이 문화'로 설명한다. 그는 "룸살롱의 물리적 본질은 '칸막이'가 아닌가. 칸막이는 패거리 만들기의 필수 요소이며, 패거리주의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핵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지역 갈등에서 유흥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간과한 것도 있다. 룸살롱은 왜 태어났으며, 왜 그렇게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 룸살롱 문화를 대하는, 소위 '짬밥 높은' 언론사 인사들의 인식이 재미있다.

<서울신문>은 2000년 6월 27일자 기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원래 폐쇄된 회원들의 모임인 '살롱(salon)'이 우리나라에서 방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room)와 어울려 전혀 다른 개념인 룸살롱으로 진화한 것은 돌연변이 현상이다. (…) 우리 사회에 소비 목적만의 룸살롱만 존재하는 것은 일부 고소득층의 불건전한 과소비가 부추긴 병폐라고 하겠다."

룸살롱이 '과소비'의 문제란다. 한편, <문화일보>의 논설위원 김성호는 2006년 1월 23일자에 '술자리 양극화'를 비판하면서 "고급 술집은 희소화돼야지 보편화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급 술집은 희소화 돼야 한다"는 논리,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룸살롱 자체의 문화를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인데, 룸살롱의 행태에도 일정 부분의 '마지노선'이 존재한다는 저열한 인식 수준이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 기자가 기획재정부 장관 윤증현에게 돌발적으로 한 질문은 이랬다. "한국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저조한 것은 룸살롱 등 잘못된 직장 회식 문화 때문이 아니냐?" 이 질문에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외신 기자 간담회를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가 생길 때가 많다"고 답했다.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외신기자들의 행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로 한국의 '2차 문화'를 되돌아본다면, 외신 기자가 꽤나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책에는 '접대'가 출세나 성공이라는 단어와 어울려야 한다는 세태를 꼬집으며, 룸살롱을 하나의 '문화사'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러나 '룸살롱이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은 생략돼 있다. 룸살롱 공화국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장'을 흐린다고 생각한 저자가 부러 이 화두를 뺐는지 모를 일이지만, 룸살롱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룸살롱을 대하는 기득권층의 사고방식이 놀라울만한 균질성을 보여주는 이유, 그것은 신문 기사의 콜라주 위에 세워진 '공화국'의 역사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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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171쪽)

소설은 질문의 양식이다. 위대한 소설은 겉만 번지르르한 해답을 들려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것은 언제나 정답이 아닌 질문 그 자체다.

이것은 범상하고 조잡한 또 하나의 일반론이지만, 나는 커다랗고 공허한 어떤 것(인생 전반·인류의 미래·세계의 평화와 문학의 본질 등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내 앞에 놓인 한 권의 책, <파이 이야기>(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펴냄)로 부커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역대 부커 상 수상작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작가가 9년 만에 발표한 신작의 서평을 시작하고자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 <베아트리스와 버질>(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펴냄). ⓒ작가정신
솔직히 말하면 <베아트리스와 버질>(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펴냄)은 서평을 쓰기보단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모여 험담을 늘어놓는 편이 훨씬 어울리는 책이다. 그가 던지는 자기 연민으로 가득찬 질문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고, 작업에 실패한 작가가 쏟아내는 가식적인 자기고백에 다름 아니다. 내가 그의 친구라면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겠지만, 십중팔구는 다른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떠들게 될, 그렇지만 낯모르는 이들에게는 결코 늘어놓지 않을 그런 고백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만약 당신이 내게 친구로서 <파이 이야기> 작가의 신작에 대한 감상을 묻는다면 나는 다만 몇 개의 단어를 가지고 간결하게 대답할 거라고. 당신은 길고도 지루할 설명을 요구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훨씬 더 즐겁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얀 마텔의 친구가 아니고 당신 또한 나의 친구가 아니므로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작할 수밖에 없다.

*

헨리는 두 편의 소설을 발표한 작가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두 번째 소설을 통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그는, 엄청난 성공과 명성에 개의치 않고 다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독자들의 사랑을 고맙게 받으며 묵묵히 작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꼬박 5년에 걸쳐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는데, 바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픽션과 논픽션이다. 헨리는 이 두 편의 글을 묶어 '플립북'이라는 형태로 출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치 등을 맞댄 샴쌍둥이처럼, 픽션과 논픽션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태야말로 자신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력이 홀로코스트에는 허용되거나 용인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사건은 거의 전적으로 하나의 관점, 즉 역사적 사실주의로만 표현됐다. 이야기, 항상 똑같은 이야기가 언제나 똑같은 날짜에 일어났다. 무대도 똑같고 등장인물도 변하지 않았다. (…) 홀로코스트는 특유의 인력을 발휘하여 독자를 원래의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로 되돌려놓았다.

(…) 따라서 헨리는 '왜 상상력이 허용되지 않고, 창조적인 비유가 억눌리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사실적인 묘사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홀로코스트를 항상 사실에만 입각해 표현하는 데 어떤 반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14쪽. 이하 모든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

헨리는 "수천만 명을 죽음에 몰아넣고 적잖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전쟁의 실상을 전달하는 표현 방식들은 전쟁 스릴러, 전쟁 코미디, 전쟁 로맨스, 전쟁 공상과학, 전쟁 프로파간다 등 다양한 형태로 대중에게 보이고 들려지며 읽히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13쪽)이는 것처럼, 홀로코스트 또한 예술적 관점을 통해 새롭게 조망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편집자들과 역사학자, 서적상들과 함께 가진 점심식사에서 헨리는 말한다.

"역사가 이야기 식으로 변하지 않으면, 역사학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잊히고 말 겁니다. 예술은 역사의 여행 가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은 역사의 구명부표이고, 예술은 씨앗입니다. 예술은 기억이고, 예술은 백신입니다." (22쪽)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할 뿐이다. 역사학자가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 "당신은 무엇에 관해 쓴 겁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헨리는 입을 다문다. 그의 책은 거절당한 것이다.

헨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나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던 걸까. 공원은 이렇게 화창하고 평화로운데 왜 나는 저들의 흥을 깨려는 걸까. 나는 유대인도 아닌데 왜 남의 일에 오지랖도 넓게 참견하고 나선 것일까…. 정처 없이 공원을 헤매던 예술가는 마침내 대답을 발견한다.

헨리는 역사학자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플립북은 그의 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어지고 떨어진 현상에 대해 쓴 것이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모든 책은 결국에는 그런 현상, 즉 실어증을 다룬 것이 아니었던가? 헨리는 통계 자료 하나를 기억해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2퍼센트 미만만이 고통스러운 시련에 대해 글을 남기거나 증언을 남겼다는 자료였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은 말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며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뇌졸중 환자처럼 사실에 근거해 정확성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도 홀로코스트에 의해 말문이 닫혀버린 무수한 사람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플립북은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해 쓴 것이었다. (28쪽)

회심의 역작을 거절당한 자신의 상황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과 별 다를 바 없다는 놀라운 깨달음! 그 순간 헨리는 작가이기를 포기한다.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쓰다 스스로 목소리를 잃어버린 셈이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새로운 곳으로,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상실하는 곳으로 알려진 대도시"로 이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헨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클라리넷과 스페인어를 배우고, 꽤 유명한 아마추어 극단에 가입한다. 공정 무역으로 수입한 코코아를 판매하는 카페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물론 헨리는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위한 고육지책,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것은 그의 적성에도 꼭 맞아서, 헨리는 새로운 삶에 순조롭게 적응해나간다. 동물 보호소에서 어린 강아지와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씩 입양해 각각 에라스무스와 멘델스존이란 이름도 붙여주었다.

하지만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헨리는 좀처럼 자신이 작가였다는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다. 세계각지에서 보낸 독자들의 편지 때문이었다. 헨리는 모든 편지에 하나하나 답장을 했는데 "그의 소설이 그에게는 과거에 불과했지만 그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는 새로운 것"(38쪽)이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그런 호의와 열정에 침묵한다면 인간답지 못한 짓"이 될 것이었다.

작가임을 잊기 위해 부러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시에 인간적인 도리를 잊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헨리는, 어느 날 자신의 앞으로 배달된 커다란 봉투를 받는다. 플로베르의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 복사본과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희곡이 인쇄된 종이뭉치 한 다발이 담겨 있는 봉투.

플로베르의 작품에는 동물들이 잔학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이 형광펜으로 강조되어 있었고, 희곡은 베케트 풍의 부조리극이었다. 동봉된 편지는 간명했다.

선생님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67쪽)

편지를 보낸 이의 이름도 헨리라는 사실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 헨리는 마침 주소가 근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직접 답장을 들고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우편함에 살짝 편지를 놓아두고 올 요량으로 개와 함께 길을 나선 헨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오카피였다. 아프리카 정글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박제상의 진열창 아래 서있는 오카피.

헨리의 설명에 따르면 "오카피는 이상한 동물이다. 다리에는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있고 적갈색을 띠는 몸통은 영양만 하다. 머리와 길쭉한 어깨는 기린과 비슷하며, 실제로도 기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73쪽. 그리고 나는 이것이 오카피 뿐 아니라 이 소설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초현실주의적인 회화와도 같은 풍경. 그는 자신의 독자가 박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망설임 없이 박제상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늙고 괴팍한 박제사를 만난다. 사교성이나 유머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남들의 감정에도 철저히 무관심한 또 하나의 헨리를.

"좋은 인디언은 오직 죽은 인디언밖에 없다"고 말했던 누군가처럼, 살아있는 동물들에게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던 박제사는 박제 작업에 대한 헨리의 질문에는 마치 연극 배우처럼 대답을 쏟아낸다. 그런 노인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 헨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박제사의 말을 헨리는 여유로운 자세로 받아들인다.

헨리는 박제사가 그에게 사업 제안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헨리는 전에도 여기저기에 약간의 돈을 투자했지만, 대부분 벤처기업에 투자해 실패의 쓴맛을 본 터였다. 이번에는 박제 사업에 투자하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에 헨리는 괜스레 흥미가 돋았다. 이런 동물들에 관계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92쪽)

노인은 해체 과정에 있는 동물들과 아직 작업을 끝내지 못한 사슴 머리가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는 작업장으로 헨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등장하는 희곡을 쓴 장본인이라고 말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사람이 아닌 당나귀와 고함원숭이였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박제된 상태로 그의 작업장에 놓여 있었다.

박제사는 헨리에게 원숭이 버질을 묘사해줄 것을 부탁한다. 순간 헨리는 그가 원한 도움이 격려나 위로가 아닌 글쓰기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종류의 부탁. 하지만 등장인물을 눈앞에 둔 그 '불꽃같은 순간', 헨리는 그것을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노인을 돕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간 헨리는 아내에게 말한다.

"오늘 정말 기막힌 사람을 만났어. 박제를 하는 노인인데, 당신은 그런 가게가 아직 있다는 걸 믿지 못할 거야. 박제된 온갖 동물이 가게 안에 가득하더라고. 게다가 우연찮게 노인의 이름도 헨리더라고. 정말 괴짜였어. 희곡을 쓰는데 내가 도와주기를 바랐어." (111쪽)

그렇게, 박제사와 소설가의 기묘한 공동 작업이 시작된다.

*

헨리의 작가로서의 자기 인식, 예술관, 작업에 대한 애정과 실패로 인한 좌절("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겨지고 떨어진"), 대도시로의 이주, 생계를 위해 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작가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클라리넷과 스페인어 연습, 꽤 유명한 아마추어 극단 생활과 공정 무역으로 수입한 코코아를 판매하는 카페에서의 웨이터 노릇,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한 동물들의 부양 등등), 그럼에도 세계 각지에서 쏟아지는 독자들의 사랑에 인간된 도리를 다하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다소 방만하고 느슨하게 그려지던 초반부와 달리 박제사 헨리와의 만남 이후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소설은 당나귀와 원숭이 그리고 두 명의 헨리에게 집중하며 본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이 저질러진 후에 어떤 것이 구해질 수 있을까? (125쪽)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171쪽)

우리가 겪은 일에 어떤 이름이 붙여질까? (175쪽)

그것은 바로 박제사 헨리가 박제라는 작업을 통해, 그리고 평생에 걸쳐 쓰고 또 쓰고 있는 한 편의 희곡을 통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닮은 박제사의 희곡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헨리도, 반복된 만남 속에서 노인이 홀로코스트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본인은 강하게 부정하지만. 상징적인(=지루하고 무의미한) 희곡을 통한, 에두른 방식이긴 하지만. 헨리가 3년 전 출간을 거절당한 책에서 시도하려고 했던 것을 위해 박제사 헨리는 일생을 걸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제사는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동물의 멸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불운한 동물들에게,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인간의 목소리를 주고 있었다. 박제사는 유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동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알레고리였다. (222쪽)

문제는 독자라면 대부분 눈치 채고 있었을 그러한 사실을 헨리가 알기까지 너무 많은 페이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헨리에게도 사정은 있다. 작가라는 자의식을 버리기 위해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임신한 아내의 뒷바라지와 기르던 개가 광견병에 걸려 고양이를 공격하는 바람에(이유 없는 폭력) 안락사를 시켜야만 했던 일(안락사는 조그만 박스 같은 '가스실'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복잡다단한 개인사까지. 같은 '생활인'으로서 우리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주인공 헨리가 정작 소설의 질문에는 어떠한 대답도 찾으려 시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직 박제사의 희곡 속에만 존재하는 질문일 뿐이다("나는 그걸 기억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한 마디 보태기는 한다). 그는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예감 사이에서 박제사와의 만남을 반복하지만, 그는 도무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재능 있는 학생을 만난 좌절한 글쓰기 강사처럼. 박제사가 자신에게 어떤 영감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도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은 채, 노인과의 수동적인 만남을 반복하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뿐이었다. 그것이 총 266쪽으로 이루어진 책의 220쪽에 이르기까지 그가 했던 일이다.

일단 헨리가 머리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소설은 급격한 반전을 맞이한다. 희곡과 홀로코스트의 연관성을 확신한 헨리는 비로소 작가다운 직감을 발휘한다. 희곡 속에서 베아트리스를 괴롭히는 소년의 정체를 통해 박제사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박제사 헨리는 다름 아닌 나치스 부역자였다! 그리고 소설의 핵심적인 질문이 뒤늦게, 너무 늦게 던져진다.

길 건너편 식료품점 주인의 말이 옳았다. 박제사는 미친 노인네였다. 세라도 한눈에 박제사를 알아보았다. 징그러운 늙은이였다. 카페의 웨이터도 제대로 보았다. 그런데 왜 헨리는 그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헨리는 그 노인, 한때 악취를 풍기는 나치스 부역자였지만 이제는 죄 없이 죽어간 동물들의 옹호자로 변신한 노인과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그 노인은 죽은 동물을 취해 보기 좋게 꾸며놓았다. 무모한 살상이 깔끔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질 수 있을까? 박제사는 그렇게 해냈다. (243쪽)

먼저 첫 번째 질문. 왜 헨리는 그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그것은 결국 소설가 헨리가 본질적으로는 박제사 헨리와 다를 바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중반, 박제사와의 두 번째 만남 후 집으로 돌아와 만남의 경과를 보고하는 헨리와 아내의 대화를 보자.

"정말 괴짜 노인이야. 오소리만큼 무뚝뚝하지. 그 노인네가 쓴 희곡을 이해하지도 못하겠어. 원숭이와 당나귀, 두 동물이 등장인물인데 아주 큰 셔츠에 살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상당히 환상적인 기운을 띠지만 홀로코스트를 떠올려주는 부분들이 있어."

"홀로코스트라고요? 당신이야 모든 것에서 홀로코스트를 연상하잖아요."

(…) 헨리는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세라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적어도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글을 쓰려는 헨리의 열의에는 오래전에 등을 돌렸다. 그러나 세라의 말은 틀렸다. 헨리가 모든 것에서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헨리는 홀로코스트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고 애썼다.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자와 많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어릿광대까지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았다. (149쪽)

하지만 나는 헨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엔 헨리의 핵심적인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는 왜 그렇게 홀로코스트에 경도된 것일까? "그의 플립북은 그의 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어지고 떨어진 현상에 대해 쓴 것이었다. (…) 헨리도 홀로코스트에 의해 말문이 닫혀버린 무수한 사람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플립북은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해 쓴 것이었다"라던 헨리의 말도 설명은 되지 않는다.

헨리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독자의 사랑에 감사하는 성공적인 작가였다. 그가 자신의 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어지고 떨어졌다고 느낀 것은 공들여 쓴 작품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다른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거절당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가망 없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거절당하기 위해,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를 이해하기 위해 그런 작업을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자신을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동일시하고 있단 말인가?

글쎄.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과도한 자기 연민에 빠진 망상 환자일 뿐이라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몰두한 추악한 나치스 부역자처럼, 그 역시 스스로에 대한 망상에 빠져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했던/않았던 거라고. 그는 홀로코스트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에서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을 제거함과 동시에, 글줄이 막힌(writer's block) 한 작가의 역겨운 자기연민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아무려나. 이제 헨리에게는 남은 페이지가 얼마 없고, 소설은 끝을 향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한다. 박제사가 나치스 부역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헨리는 역겨움에 치를 떨며 박제상을 나선다. 뒤따라 나온 늙은 헨리는 그의 가슴을 칼로 찌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헨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박제상으로 돌아간 헨리는 불을 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박제들과 함께 검은 연기로 타오르며 길었던 삶을 마감한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동물들을 대량으로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를 뜻한다)

다행히 우리의 작가, 젊은 헨리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누구나 "의심과 두려움, 불안과 절망, 그리고 즐거움을 잃어버린 삶"(248쪽)을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헨리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한다. "말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며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뇌졸중 환자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씩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치스 부역자에게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헨리는 이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다! 마침내 홀로코스트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헨리는 책을 완성하고, 그것에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제목을 붙이며 소설은 끝난다.

글쎄. 다양한 감상이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거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동시에 '소설'이라는 양식 전반에 대한 얀 마텔의 홀로코스트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무모한 살상이 깔끔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얀 마텔이 해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해냈다.

*

이 소설은 총체적으로 실패한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교훈은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5년 만의 신작을 딱 잘라 거절하는 출판계의 모습에서 나는 일말의 희망을 본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얀 마텔의 이 소설은 미국 판권만 20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 서평은 너무 가혹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필부로서, 모든 것에서 홀로코스트를 보는 헨리의 과잉된 자의식과 망상이 내내 거슬렸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겠다. 마치 "내가 홀로코스트 희생자랑 같은 입장이라서 좀 아는데…"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물론 그것은 얀 마텔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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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 50년을 매진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것도 개인의 안락함과 일신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험난한 오지에서 특정 대상을 돌보기 위해 길지 않은 인생의 대부분을 바친다는 것은.

'침팬지의 대모'로 유명한 제인 구달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제목부터 <제인 구달, 침팬지와 함께한 50년>(김옥진 옮김, 궁리 펴냄). 1960년 여름, 탄자니아 곰베 강 침팬지 보호 구역에 발을 들였던 20대 아가씨가 70대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녀가 살아왔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일종의 자서전에 가까운 책이다.


▲ <제인 구달, 침팬지와 함께한 50년>(제인 구달 지음, 김옥진 옮김, 궁리 펴냄). ⓒ궁리
제인 구달이란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2002년 겨울, 난 그녀를 본 적이 있다. 구달이 참석하는 하우스파티에 운 좋게도 지인을 통해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파티가 있었던 저녁, 난 낮부터 설렜던 걸로 기억한다. 구달을 직접, 그것도 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니, 마치 전설 속의 인물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다.

막상 파티에 가서는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그녀에게 말 한 마디 붙여보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모습만큼은 아직도 뚜렷이 각인되어 남았다. 거실 한 가운데 그녀를 위해 마련된 안락의자에 앉은 구달은, 일흔에 가까운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번도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차림새도 수수하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흰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에게서는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그 건 수십 년간 자신의 선택을 믿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최선을 다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인 구달은 1960년부터 50여 년 간, 자연 상태의 침팬지 연구를 해 온 인물이다. 침팬지를 인간 사회로 끌어내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한 마리의 '하얀 침팬지'가 되어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낸 인물이다. 이제는 상식이 되다시피 한 침팬지에 대한 지식들-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가족들끼리는 돌봐주고 보듬어주지만, 적으로 등 돌린 무리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을 행하기도 하는 등-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책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시작', '침팬지', '우리가 배운 것', '새로운 비전' 그리고 '희망'이라는 소제목을 단 다섯 개의 장이다. 각각의 장에서 구달은 동물을 좋아하던 어린 그가 어떻게 자라 침팬지 보호 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곳에서 침팬지를 접하면서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지를 조근조근 설명한다. 마치 추운 겨울, 벽난로 앞에 둘러앉은 어린아이들에게 할머니가 지난 세월을 이야기해주듯이 말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내용 자체가 그다지 새롭거나 혁신적인 것은 아니다. 구달이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생물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음을 드러내주는 꿈틀거리는 분홍색 벌레'와 '갓 낳은 달걀' 에피소드는 전작인 <희망의 이유>(박순영 옮김, 궁리 펴냄)에서도 등장하며, 침팬지들의 생활사 역시 전작들에서 설명했던 것을 다시금 정리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의 책들이 우리가 몰랐던 침팬지의 습성에 대해 보고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힘주어 소리치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시선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전작에 비해 안정되고 유려한 느낌을 준다. 이는 이 책의 발간 성격 자체가 한 개인의 일생을 돌아보는 회고록같은 느낌이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고, 5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낸 내공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월과 신념의 힘이 더한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아도 오래 울리는 여운을 가지게 된 듯하다.

책장을 넘기다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성, 우리의 불굴의 정신을 믿고 함께 나아갑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마음을 기릅시다. 폭력과 편협함을 이해와 연민, 그리고 사랑으로 바꾸도록 노력합시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지성과 고차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이 삶과 죽음을 인식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며, 사랑과 연민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겉모습은 달라도 주어진 삶은 모두 동등하게 존중받을 가치를 가져야 하고, 힘써 선을 구현하고 악을 물리치도록 노력하며, 인간에게 가장 풍부하게 주어진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널리 적용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을 통해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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