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171쪽)

소설은 질문의 양식이다. 위대한 소설은 겉만 번지르르한 해답을 들려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것은 언제나 정답이 아닌 질문 그 자체다.

이것은 범상하고 조잡한 또 하나의 일반론이지만, 나는 커다랗고 공허한 어떤 것(인생 전반·인류의 미래·세계의 평화와 문학의 본질 등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내 앞에 놓인 한 권의 책, <파이 이야기>(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펴냄)로 부커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역대 부커 상 수상작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작가가 9년 만에 발표한 신작의 서평을 시작하고자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 <베아트리스와 버질>(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펴냄). ⓒ작가정신
솔직히 말하면 <베아트리스와 버질>(강주헌 옮김, 작가정신 펴냄)은 서평을 쓰기보단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모여 험담을 늘어놓는 편이 훨씬 어울리는 책이다. 그가 던지는 자기 연민으로 가득찬 질문들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고, 작업에 실패한 작가가 쏟아내는 가식적인 자기고백에 다름 아니다. 내가 그의 친구라면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겠지만, 십중팔구는 다른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떠들게 될, 그렇지만 낯모르는 이들에게는 결코 늘어놓지 않을 그런 고백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만약 당신이 내게 친구로서 <파이 이야기> 작가의 신작에 대한 감상을 묻는다면 나는 다만 몇 개의 단어를 가지고 간결하게 대답할 거라고. 당신은 길고도 지루할 설명을 요구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훨씬 더 즐겁고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얀 마텔의 친구가 아니고 당신 또한 나의 친구가 아니므로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작할 수밖에 없다.

*

헨리는 두 편의 소설을 발표한 작가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두 번째 소설을 통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그는, 엄청난 성공과 명성에 개의치 않고 다만 자신에게 쏟아지는 독자들의 사랑을 고맙게 받으며 묵묵히 작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꼬박 5년에 걸쳐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는데, 바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픽션과 논픽션이다. 헨리는 이 두 편의 글을 묶어 '플립북'이라는 형태로 출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치 등을 맞댄 샴쌍둥이처럼, 픽션과 논픽션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태야말로 자신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력이 홀로코스트에는 허용되거나 용인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사건은 거의 전적으로 하나의 관점, 즉 역사적 사실주의로만 표현됐다. 이야기, 항상 똑같은 이야기가 언제나 똑같은 날짜에 일어났다. 무대도 똑같고 등장인물도 변하지 않았다. (…) 홀로코스트는 특유의 인력을 발휘하여 독자를 원래의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로 되돌려놓았다.

(…) 따라서 헨리는 '왜 상상력이 허용되지 않고, 창조적인 비유가 억눌리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사실적인 묘사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지 않은가. 홀로코스트를 항상 사실에만 입각해 표현하는 데 어떤 반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14쪽. 이하 모든 강조는 인용자의 것이다)

헨리는 "수천만 명을 죽음에 몰아넣고 적잖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전쟁의 실상을 전달하는 표현 방식들은 전쟁 스릴러, 전쟁 코미디, 전쟁 로맨스, 전쟁 공상과학, 전쟁 프로파간다 등 다양한 형태로 대중에게 보이고 들려지며 읽히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13쪽)이는 것처럼, 홀로코스트 또한 예술적 관점을 통해 새롭게 조망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편집자들과 역사학자, 서적상들과 함께 가진 점심식사에서 헨리는 말한다.

"역사가 이야기 식으로 변하지 않으면, 역사학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잊히고 말 겁니다. 예술은 역사의 여행 가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은 역사의 구명부표이고, 예술은 씨앗입니다. 예술은 기억이고, 예술은 백신입니다." (22쪽)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할 뿐이다. 역사학자가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 "당신은 무엇에 관해 쓴 겁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헨리는 입을 다문다. 그의 책은 거절당한 것이다.

헨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나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던 걸까. 공원은 이렇게 화창하고 평화로운데 왜 나는 저들의 흥을 깨려는 걸까. 나는 유대인도 아닌데 왜 남의 일에 오지랖도 넓게 참견하고 나선 것일까…. 정처 없이 공원을 헤매던 예술가는 마침내 대답을 발견한다.

헨리는 역사학자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플립북은 그의 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어지고 떨어진 현상에 대해 쓴 것이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모든 책은 결국에는 그런 현상, 즉 실어증을 다룬 것이 아니었던가? 헨리는 통계 자료 하나를 기억해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2퍼센트 미만만이 고통스러운 시련에 대해 글을 남기거나 증언을 남겼다는 자료였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은 말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며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뇌졸중 환자처럼 사실에 근거해 정확성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도 홀로코스트에 의해 말문이 닫혀버린 무수한 사람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플립북은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해 쓴 것이었다. (28쪽)

회심의 역작을 거절당한 자신의 상황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과 별 다를 바 없다는 놀라운 깨달음! 그 순간 헨리는 작가이기를 포기한다.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쓰다 스스로 목소리를 잃어버린 셈이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새로운 곳으로,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상실하는 곳으로 알려진 대도시"로 이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헨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클라리넷과 스페인어를 배우고, 꽤 유명한 아마추어 극단에 가입한다. 공정 무역으로 수입한 코코아를 판매하는 카페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물론 헨리는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위한 고육지책,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것은 그의 적성에도 꼭 맞아서, 헨리는 새로운 삶에 순조롭게 적응해나간다. 동물 보호소에서 어린 강아지와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씩 입양해 각각 에라스무스와 멘델스존이란 이름도 붙여주었다.

하지만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헨리는 좀처럼 자신이 작가였다는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다. 세계각지에서 보낸 독자들의 편지 때문이었다. 헨리는 모든 편지에 하나하나 답장을 했는데 "그의 소설이 그에게는 과거에 불과했지만 그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는 새로운 것"(38쪽)이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그런 호의와 열정에 침묵한다면 인간답지 못한 짓"이 될 것이었다.

작가임을 잊기 위해 부러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시에 인간적인 도리를 잊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헨리는, 어느 날 자신의 앞으로 배달된 커다란 봉투를 받는다. 플로베르의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 복사본과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희곡이 인쇄된 종이뭉치 한 다발이 담겨 있는 봉투.

플로베르의 작품에는 동물들이 잔학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이 형광펜으로 강조되어 있었고, 희곡은 베케트 풍의 부조리극이었다. 동봉된 편지는 간명했다.

선생님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67쪽)

편지를 보낸 이의 이름도 헨리라는 사실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 헨리는 마침 주소가 근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직접 답장을 들고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우편함에 살짝 편지를 놓아두고 올 요량으로 개와 함께 길을 나선 헨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오카피였다. 아프리카 정글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박제상의 진열창 아래 서있는 오카피.

헨리의 설명에 따르면 "오카피는 이상한 동물이다. 다리에는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있고 적갈색을 띠는 몸통은 영양만 하다. 머리와 길쭉한 어깨는 기린과 비슷하며, 실제로도 기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73쪽. 그리고 나는 이것이 오카피 뿐 아니라 이 소설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초현실주의적인 회화와도 같은 풍경. 그는 자신의 독자가 박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망설임 없이 박제상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늙고 괴팍한 박제사를 만난다. 사교성이나 유머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남들의 감정에도 철저히 무관심한 또 하나의 헨리를.

"좋은 인디언은 오직 죽은 인디언밖에 없다"고 말했던 누군가처럼, 살아있는 동물들에게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던 박제사는 박제 작업에 대한 헨리의 질문에는 마치 연극 배우처럼 대답을 쏟아낸다. 그런 노인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 헨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박제사의 말을 헨리는 여유로운 자세로 받아들인다.

헨리는 박제사가 그에게 사업 제안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헨리는 전에도 여기저기에 약간의 돈을 투자했지만, 대부분 벤처기업에 투자해 실패의 쓴맛을 본 터였다. 이번에는 박제 사업에 투자하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에 헨리는 괜스레 흥미가 돋았다. 이런 동물들에 관계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92쪽)

노인은 해체 과정에 있는 동물들과 아직 작업을 끝내지 못한 사슴 머리가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는 작업장으로 헨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등장하는 희곡을 쓴 장본인이라고 말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사람이 아닌 당나귀와 고함원숭이였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박제된 상태로 그의 작업장에 놓여 있었다.

박제사는 헨리에게 원숭이 버질을 묘사해줄 것을 부탁한다. 순간 헨리는 그가 원한 도움이 격려나 위로가 아닌 글쓰기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종류의 부탁. 하지만 등장인물을 눈앞에 둔 그 '불꽃같은 순간', 헨리는 그것을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노인을 돕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간 헨리는 아내에게 말한다.

"오늘 정말 기막힌 사람을 만났어. 박제를 하는 노인인데, 당신은 그런 가게가 아직 있다는 걸 믿지 못할 거야. 박제된 온갖 동물이 가게 안에 가득하더라고. 게다가 우연찮게 노인의 이름도 헨리더라고. 정말 괴짜였어. 희곡을 쓰는데 내가 도와주기를 바랐어." (111쪽)

그렇게, 박제사와 소설가의 기묘한 공동 작업이 시작된다.

*

헨리의 작가로서의 자기 인식, 예술관, 작업에 대한 애정과 실패로 인한 좌절("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겨지고 떨어진"), 대도시로의 이주, 생계를 위해 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작가라는 자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클라리넷과 스페인어 연습, 꽤 유명한 아마추어 극단 생활과 공정 무역으로 수입한 코코아를 판매하는 카페에서의 웨이터 노릇,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한 동물들의 부양 등등), 그럼에도 세계 각지에서 쏟아지는 독자들의 사랑에 인간된 도리를 다하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다소 방만하고 느슨하게 그려지던 초반부와 달리 박제사 헨리와의 만남 이후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소설은 당나귀와 원숭이 그리고 두 명의 헨리에게 집중하며 본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이 저질러진 후에 어떤 것이 구해질 수 있을까? (125쪽)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171쪽)

우리가 겪은 일에 어떤 이름이 붙여질까? (175쪽)

그것은 바로 박제사 헨리가 박제라는 작업을 통해, 그리고 평생에 걸쳐 쓰고 또 쓰고 있는 한 편의 희곡을 통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닮은 박제사의 희곡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헨리도, 반복된 만남 속에서 노인이 홀로코스트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본인은 강하게 부정하지만. 상징적인(=지루하고 무의미한) 희곡을 통한, 에두른 방식이긴 하지만. 헨리가 3년 전 출간을 거절당한 책에서 시도하려고 했던 것을 위해 박제사 헨리는 일생을 걸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제사는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동물의 멸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불운한 동물들에게,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인간의 목소리를 주고 있었다. 박제사는 유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동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알레고리였다. (222쪽)

문제는 독자라면 대부분 눈치 채고 있었을 그러한 사실을 헨리가 알기까지 너무 많은 페이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헨리에게도 사정은 있다. 작가라는 자의식을 버리기 위해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임신한 아내의 뒷바라지와 기르던 개가 광견병에 걸려 고양이를 공격하는 바람에(이유 없는 폭력) 안락사를 시켜야만 했던 일(안락사는 조그만 박스 같은 '가스실'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복잡다단한 개인사까지. 같은 '생활인'으로서 우리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주인공 헨리가 정작 소설의 질문에는 어떠한 대답도 찾으려 시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직 박제사의 희곡 속에만 존재하는 질문일 뿐이다("나는 그걸 기억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한 마디 보태기는 한다). 그는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예감 사이에서 박제사와의 만남을 반복하지만, 그는 도무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재능 있는 학생을 만난 좌절한 글쓰기 강사처럼. 박제사가 자신에게 어떤 영감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도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은 채, 노인과의 수동적인 만남을 반복하며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뿐이었다. 그것이 총 266쪽으로 이루어진 책의 220쪽에 이르기까지 그가 했던 일이다.

일단 헨리가 머리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소설은 급격한 반전을 맞이한다. 희곡과 홀로코스트의 연관성을 확신한 헨리는 비로소 작가다운 직감을 발휘한다. 희곡 속에서 베아트리스를 괴롭히는 소년의 정체를 통해 박제사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박제사 헨리는 다름 아닌 나치스 부역자였다! 그리고 소설의 핵심적인 질문이 뒤늦게, 너무 늦게 던져진다.

길 건너편 식료품점 주인의 말이 옳았다. 박제사는 미친 노인네였다. 세라도 한눈에 박제사를 알아보았다. 징그러운 늙은이였다. 카페의 웨이터도 제대로 보았다. 그런데 왜 헨리는 그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헨리는 그 노인, 한때 악취를 풍기는 나치스 부역자였지만 이제는 죄 없이 죽어간 동물들의 옹호자로 변신한 노인과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그 노인은 죽은 동물을 취해 보기 좋게 꾸며놓았다. 무모한 살상이 깔끔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질 수 있을까? 박제사는 그렇게 해냈다. (243쪽)

먼저 첫 번째 질문. 왜 헨리는 그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그것은 결국 소설가 헨리가 본질적으로는 박제사 헨리와 다를 바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중반, 박제사와의 두 번째 만남 후 집으로 돌아와 만남의 경과를 보고하는 헨리와 아내의 대화를 보자.

"정말 괴짜 노인이야. 오소리만큼 무뚝뚝하지. 그 노인네가 쓴 희곡을 이해하지도 못하겠어. 원숭이와 당나귀, 두 동물이 등장인물인데 아주 큰 셔츠에 살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상당히 환상적인 기운을 띠지만 홀로코스트를 떠올려주는 부분들이 있어."

"홀로코스트라고요? 당신이야 모든 것에서 홀로코스트를 연상하잖아요."

(…) 헨리는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세라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적어도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글을 쓰려는 헨리의 열의에는 오래전에 등을 돌렸다. 그러나 세라의 말은 틀렸다. 헨리가 모든 것에서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헨리는 홀로코스트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고 애썼다.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자와 많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어릿광대까지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았다. (149쪽)

하지만 나는 헨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엔 헨리의 핵심적인 동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는 왜 그렇게 홀로코스트에 경도된 것일까? "그의 플립북은 그의 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어지고 떨어진 현상에 대해 쓴 것이었다. (…) 헨리도 홀로코스트에 의해 말문이 닫혀버린 무수한 사람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플립북은 목소리를 잃어버려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해 쓴 것이었다"라던 헨리의 말도 설명은 되지 않는다.

헨리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독자의 사랑에 감사하는 성공적인 작가였다. 그가 자신의 영혼과 혀가 갈가리 찢어지고 떨어졌다고 느낀 것은 공들여 쓴 작품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다른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거절당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가망 없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거절당하기 위해,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를 이해하기 위해 그런 작업을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자신을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동일시하고 있단 말인가?

글쎄.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과도한 자기 연민에 빠진 망상 환자일 뿐이라고. 자기 자신의 구원에 몰두한 추악한 나치스 부역자처럼, 그 역시 스스로에 대한 망상에 빠져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했던/않았던 거라고. 그는 홀로코스트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에서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을 제거함과 동시에, 글줄이 막힌(writer's block) 한 작가의 역겨운 자기연민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아무려나. 이제 헨리에게는 남은 페이지가 얼마 없고, 소설은 끝을 향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한다. 박제사가 나치스 부역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헨리는 역겨움에 치를 떨며 박제상을 나선다. 뒤따라 나온 늙은 헨리는 그의 가슴을 칼로 찌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헨리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박제상으로 돌아간 헨리는 불을 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박제들과 함께 검은 연기로 타오르며 길었던 삶을 마감한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동물들을 대량으로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를 뜻한다)

다행히 우리의 작가, 젊은 헨리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누구나 "의심과 두려움, 불안과 절망, 그리고 즐거움을 잃어버린 삶"(248쪽)을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헨리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한다. "말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며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뇌졸중 환자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씩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치스 부역자에게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헨리는 이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다! 마침내 홀로코스트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헨리는 책을 완성하고, 그것에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제목을 붙이며 소설은 끝난다.

글쎄. 다양한 감상이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거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동시에 '소설'이라는 양식 전반에 대한 얀 마텔의 홀로코스트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무모한 살상이 깔끔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얀 마텔이 해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해냈다.

*

이 소설은 총체적으로 실패한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교훈은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5년 만의 신작을 딱 잘라 거절하는 출판계의 모습에서 나는 일말의 희망을 본다. (물론 현실은 다르다. 얀 마텔의 이 소설은 미국 판권만 20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 서평은 너무 가혹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필부로서, 모든 것에서 홀로코스트를 보는 헨리의 과잉된 자의식과 망상이 내내 거슬렸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겠다. 마치 "내가 홀로코스트 희생자랑 같은 입장이라서 좀 아는데…"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물론 그것은 얀 마텔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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