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 강국? 우선 휴가부터 늘리자"

모든 것이 경쟁에 쓸 무기가 되는 한국에서 자원봉사도 예외는 아니다. 대입을 위해 봉사 활동 점수를 쌓았던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면 스펙(specification)을 위해 해외 자원봉사에 눈을 돌린다. 취업 후엔? 밥 먹듯 야근하는 생활과 길어야 1년에 1주일인 짧은 휴가를 보내며 독하게 마음먹지 않는 한 자원봉사에 쉽게 도전하기 힘들다.

이런 팍팍한 삶 속에서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서일까. 서점에 가보면 가장 인기 있는 코너 중 하나가 바로 여행서 코너다. 해외여행 경비가 저렴해지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들과 다른 여행에 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는 인기리에 팔려나간다.

스펙도 아닌, 상품도 아닌 자원봉사와 여행 문화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걸까. 물론, 요즘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며 가방을 메고 떠나는 '여행족'도 나타나고, 공정 여행이나 '착한 여행'에 나서는 이들도 늘고 있지만, 아직 소수다. 그래서 팸 그라우트의 <특별한 자원봉사 여행 100>(최지아 옮김, 동시대 펴냄)이 다소 낯설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라다크에서 농사를 돕고, 지중해에서 바다표범을 구하고…

새로운 일을 찾고 있거나,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책의 목차만 살펴봐도 가슴이 뛸 것이다.


▲ <특별한 자원봉사 여행 100>(팸 그라우트 지음, 최지아 옮김, 동시대 펴냄). ⓒ동시대
"인도 라다크에서 살구, 보리, 알팔파 수확을 거들다", "세상의 정상에 위치한 고아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새로운 트레일을 뚫고 황무지 캠프의 요리사가 되다", '로마 시대의 요새와 항구와 마을을 발굴하다", "지구 최후의 지중해몽크바다표범을 구하다"….

해외 자원봉사라고 하면 오지에 가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돕거나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책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빈민을 상대로 하는 활동은 물론 북미와 유럽에서 하는 프로그램도 소개되어 있다. 문화 유적을 복원하거나 생태계 보호처럼 주제도 다양하다. 한편, 버마(미얀마) 국경을 넘나들며 버마 사람을 돕는, 다소 위험한 활동도 소개한다.

저자는 대륙별로 지역을 구분해 A4 1장 분량의 설명으로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활동을 주관하는 단체의 주소, 전화번호, 홈페이지 주소도 나와 있어 관심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해볼 수도 있다. 단, 대부분 소개된 단체와 담당자가 영어를 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 2008년에 원서가 출판됐기 때문에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지역도 있을 것이다.

영어가 장벽? 쉬운 것부터 도전해보라

문제는 '활용 가능성'이다. 이 책의 원서는 미국 독자를 염두에 두고 만든 책이다. 자원봉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지고, 휴가 기간이 긴 미국에서는 좀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내용이 많지만, 한 주를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부담이 된다.

또 해외 자원봉사에 처음 나서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제안은 버겁다. 우선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어서 프로그램 설명은 한국어이지만, 연락부터 참여까지 모두 영어 또는 외국어로 진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출판사가 좀 더 세심한 배려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한국에서 연락할 수 있는 단체, 기관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다면 한국 독자에게 더 유용한 안내서가 됐을 테니까.

이런 점이 아쉬운 독자들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펴낸 <자원 활동은 자원봉사가 아니다>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 자원 활동 실무를 오랜 기간 맡아온 필자들이 펴낸 이 책은 국내에서 연락할 수 있는 정보와 함께 국제 자원 활동에 관한 고민과 주의 사항을 담고 있어서 자원 활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유용하다.

또 해외 자원봉사가 익숙하지 않거나 외국어에 자신이 없다면 세계 곳곳에서 약 2주간 열리며, 다양한 국적의 청년이 모여 숙식을 함께 하며 자원 활동을 벌이는 워크캠프(work camp)를 추천한다. 이름 그대로 많은 워크캠프는 언어 능력보다 '육체' 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국적의 또래들과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국어에도 익숙해진다.

한편, 당장 이 책은 당장 자원봉사에 참여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도움을 줄 듯하다. 미래에 국제 자원 활동을 꿈꾸고 있다면, 스스로 자원 활동을 조직할 생각이 있다면, 보다 현실적이고 지역적인 국제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에 나온 다양한 조직과 프로그램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원 활동은 공짜? "No"

"믿음을 가지세요. 사람들에 대해, 자신에 대해 믿으세요.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을 하세요.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자원, 돈, 지원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될 테니까요."

싱가포르에서 테크놀로지 기업 임원으로 일하면서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는 라이 탄은 '무엇에 어떻게 헌신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이밖에도 <특별한 자원봉사 여행 100>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자원봉사를 참가했던 수기와 인터뷰가 함께 실려 있다.

탄의 말도 맞다. 그러나 이 책에 있는 많은 수의 자원봉사 활동은 참가비가 있고, 꽤 비싸기까지 하다. 책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휴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활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런 내용은 '자원봉사=공짜'라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상당수 사람들이 며칠간의 해외여행에서 리조트와 외식에 아낌없이 돈을 쓰지 않나? 이런 비용을 염두에 두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자원봉사 참가비는 그리 비싸지 않다. 또 참가비는 자원봉사가 진행되는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는 기금으로도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 무조건 거부감을 가질 일은 아니다.

만약 주머니는 가볍지만, 꼭 해보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책에 나와 있는 '자원봉사 비용 마련하기'에 실린 내용처럼 직접 마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금 모금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후원자를 모으는 편지 쓰기, 지역 매체 연락하기 등의 방법이 그것이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함께 바자회를 열거나 캠페인을 벌여 비용도 마련하고, 자신이 관심이 가지는 이슈를 알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보다 긴 휴가와 여유

"자원봉사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 정작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원봉사는 영혼을 충만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인간애와 다시 연결시켜줍니다. 타인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해주는 최고의 존재입니다. 저는 늘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되돌려 받곤 합니다."

굳이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아도 자원봉사에 참여해본 이들은 안다. 자원봉사가 어떤 걸 가져다주는지.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원 활동은 분명 스펙보다 더 큰 자산을 쌓게 해준다. 경험한 이들이 다소 비싼 참가비를 내고도 다시 참가하고, '자원봉사'가 아닌 '자원 활동'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얼마 전 한국 청소년의 '더불어 살기' 능력이 세계 최하위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쟁을 교육하는 환경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0여 년 전부터 해외 자원봉사 열풍이 불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불어 닥친 취업난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비야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엔(UN) 사무총장 반기문처럼 되고 싶다는 청소년이 늘어나는 현상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정부는 해외 자원봉사마저도 숫자로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박대원은 "2013년에는 2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해외로 나갈 것"이라며 "세계 최대 규모"라고 홍보한다. 그러나 선심성으로, 태극기를 앞세워 나서는 자원봉사가 참가자와 한국 정부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자원봉사 경쟁'이 아니라 자원봉사에 눈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충분한 휴가와 여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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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수다를 떨다가 나온 얘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소설을 읽는 사람과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 수다는 계속된다. "소설을 읽는 사람도 크게 둘로 나뉜다. (추리 소설, 판타지, SF와 같은) 장르 소설을 읽는 사람과 장르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

이 분류에 따르면, 나는 "소설을 읽는 사람, 특히 장르 소설을 읽는 사람"에 속한다. 그렇다고, 남다른 마니아여서 장르 소설에 대단한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장르(?) 구분 없이 읽는 편이다. 그러던 내가 몇 년 전부터 꼭 챙겨서 읽는 장르 소설들이 있다. 바로 '저널리스트가 쓴 장르 소설'이거나 혹은 '저널리스트가 등장인물인 장르 소설'이다.

사실 이 둘은 많이 겹친다. 외국의 유명한 장르 소설 작가 중에는 저널리스트 출신이 정말로(!) 많고, 그들은 대개 자신을 모델로 했을 법한 저널리스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을 한 편 이상 (혹은 시리즈로) 쓰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외국의 동종 업계 종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제 '여기자 안니카 시리즈'를 달고 나온 리사 마르클룬드의 <폭파범>(한정아 옮김, 황금가지 펴냄)을 보자마자 집어든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단숨에 읽고서, 이른바 '스칸디나비아 누아르'에 호기심이 생긴 것도 또 그것의 작가 목록에서 리사 마르클룬드의 이름이 보였던 것도 한몫했고.

'애 딸린 아줌마' 기자는…


▲ <폭파범>(리사 마르클룬드 지음, 한정아 옮김, 화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폭파범>은 부제대로 여기자 안니카 벵트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올림픽 개최를 몇 개월 앞둔 연말에 스타디움 공사 현장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의 희생자가 스웨덴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인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이 사건을 담당하는 안니카는….

스포일러가 돼서도 안 될뿐더러, 이 책을 잡아든 첫 번째 이유도 '여기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었으니 여기서는 그 얘기를 해보자. <폭파범>의 주인공 안니카는 30대 초반에 아이 둘을 둔 맞벌이 여성으로, 스웨덴의 타블로이드 신문 <크벨스프레센>의 최연소 사건팀장으로 막 발령을 받은 상태다.

기본적으로 안니카의 취재를 따라서 전개되다 보니,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스웨덴에서 '애 딸린 아줌마' 기자의 삶이 어떤지 생생히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지 국가에서도 애 딸린 아줌마가 기자를 하기는 쉽지 않다. 직장 안팎에서 기자 안니카의 활약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공무원인 남편은 중요한 사건만 터지면 마치 가정은 없는 것처럼 일에만 몰두하는 안니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가스레인지나 조리대를 닦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설거지할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옷가지와 뜯어보지 않은 우편물을 침실 바닥에 던져놓곤 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 "엄마!"를 외치며 안니카의 사랑을 원한다. 다행히 주중에는 "스웨덴의 모든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할 수 있지만" "토요일에는 빵을 구우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 불행히도 안니카는 "빵을 굽거나 특별한 일을 벌일 때 전혀 즐겁지 않다."

그렇다고, 밖에서 안니카가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의 승진에 대한 반발이 이렇게나 거셀지 그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사건팀장 자리가 자기 거라고 생각했던" 쉰세 살의 선배부터 펄쩍 뛰었다. "전에는 잠자코 있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안니카의 복장을 트집 잡기도 했다. 그의 성품과 능력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소설 전체에 걸쳐서 다양한 에피소드로 변주되는 이런 모습에 몇 번이나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건 한국과 똑같잖아!" 특히 이 소설에서는 여성으로서 스웨덴에서 살아가기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데, 작가는 안니카의 삶을 통해서 그 팍팍함을 생생히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위기

이 소설에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언론 환경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다. 안니카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스웨덴 언론에서도 후배가 기라성 같은 선배를 제치고 팀장이 되는 경우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처럼 연차에 따라서 직책과 임무가 부여되는 경직된 모습은 아닌 게 확실하다.

소설 속에서 안니카는 총 3명의 팀원과 1명의 비서를 거느린다. (<크벨스프레센>은 규모만 보면 한국의 대형 언론보다는 <프레시안> 같은 매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 이 3명의 팀원 중에서 안니카의 후배는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젊은 그를 팀장에 올린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유력한 후견인으로 등장하는 편집국장 안데르스 쉬만의 속내를 들어보자.

"<크벨스프레센>의 표준 독자는 스웨덴 남성으로서, 20대부터 줄곧 <크벨스프레센>을 구독해온 54세의 블루칼라 노동자였다. (…) 신문들은 저마다 하늘이 무너져도 달려가서 자기네 신문을 집어들 충직한 독자들을 갖고 있었다. (…) <크벨스프레센>의 경우에는 그런 독자들이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처럼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 이제 (<크벨스프레센>은)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 그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간부들이 필요했다. 45세 이상의 남자 간부들한테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안데르스 쉬만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개혁을 단행할 방안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쉬만은 안니카를 바로 그런 변화를 이끌 적임자로 생각한다. 이런 <크벨스프레센>의 고민은 사실 한국 언론의 고민과 그대로 겹친다. <폭파범>이 발표된 시점이 1998년이니, 이미 10년 전부터 스웨덴에서는 '이탈하는 독자'를 잡기위한 언론의 치열한 몸부림이 시작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독자는 계속 떨어져 나가는데도 여전히 40대 이상의 남성 기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내용, 형식을 똑같이 재생산하는 한국 언론은 그런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는가? 한국의 안니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법한 여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유리 천장에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 글쎄….

스칸디나비아 누아르의 진짜 매력

사실 미국의 마이클 코넬리나 일본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한 혹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보이는 무협지(!) 뺨치는 전개를 기대한 독자라면 <폭파범>은 지루한 편이다. 의외의 결말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아서 "스웨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자 "스칸디나비아 5개국 전체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데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폭파범>이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진짜 이유는 앞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고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점이 아닐까? 한국 소설이 정작 '한국 사회'를 보여주지 못할 때, 스웨덴의 장르 소설은 끊임없이 '스웨덴 사회'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저널리스트 중에는 왜 한국 사회에 밀착한 장르 소설(혹은 소설)을 써내는 작가가 나오지 못할까? <폭파범>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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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정작 전공으로 삼고 있는 문학을 통해서 스스로 질문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문학 자체에 대한 의심을 포함하는 이 질문들을 생각하며 보내곤 했던 오랜 시간들 대신 어떤 방식으로든 짧은 시간 안에 작품들을 구별하고 가름이 끝난 뒤의 평가를 자못 당당하게 전달하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이 소금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소금만 맛을 보면 된다고 생각한 어떤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최근, 장편 소설 <피플 붓다>를 펴낸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장편 소설 <항항포포>를 선보인 작가 한승원은 문학에 대한, 나아가 문학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다. 소설 창작에 40여 년을 훌쩍 넘긴 시간을 바치는 동안 문학에 대한 근본적 의심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자 우리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항항포포>(남승원 지음, 현대문학 펴냄). ⓒ현대문학
물론 그의 이런 의심과 질문은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당장에 뒤돌려 세울 만큼 아프게 날이 서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소설은 "크고 작은 회흑색의 몽실몽실한 돌들"처럼 "씻기고 씻겨서 반들반들하게 닳고 닳아"(66~67쪽)진 뭉툭함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 담겨 있는 문제들은 예리한 절박함 대신, 한 번 박히면 좋든 싫든 그와 더불어 평생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화두가 된다. 그것은 이 소설의 외관이 가지고 있는 기행문적 서사가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풍물에 주목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마치 심우(尋牛)와도 같은 '길' 찾기의 과정과 다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작품은 이와 같은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가령, 소설 속 인물인 두 남녀가 우연히 여행길에서 만나 동행을 하게 되는 장면에서 여자는 먼저,

"선생님, 혼자 여행하시는 모양인데, 심심하지 않게…… 갈 길을 잃어버린 저를 데리고 다니세요." (15쪽)

라고 말을 건넨다. 이 여자는 어린 나이에 조직 폭력배인 남편의 강압으로 시작되어 지금껏 강제로 유지되고 있는 결혼 생활을 못 견디고 도망쳐 나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정체가 점점 드러나면서 약간의 미스터리와 긴박감을 부여하는 그녀의 정보를 이 자리에서 모두 언급한다고 해서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실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얽혀들며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경험하는 방황과 길 찾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단해 보이는 이 작품의 서사는 실상 많은 길들을 겹쳐 품고 있으면서도 또한 각각의 독립된 의미를 추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행 내내 몇 날 며칠을 같은 방, 때로는 같은 침대를 쓰면서 서로를 탐색하고 또 서로에게 위안을 받으면서도 끝내 나란히 누운 채 각자의 길 찾기에 골몰한 채 잠드는 두 남녀들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가인 남자 역시 지금은 죽고 없는 과거의 연인에 대한 추억과 회한, 자책 등을 안고 그 연인과 여행했던 길을 그대로 밟아 가는 중이다. 당시의 여행은 임용 고시를 몇 차례 낙방한 과거의 그 연인이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 창작을 빌미로 제안해서 같이 떠나게 되었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들과 현재의 또 다른 그들이 여행하는 곳은 모두 추사 김정희나 윤선도, 그리고 정약용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부터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머물거나 지나간 길임에는 물론이다. 심지어 복수심에 불타면서 도망간 아내를 쫓는 조직 폭력배인 남편 역시 '아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인물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한승원의 <항항포포>는 길 찾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 그 자체가 된다.

이때 질문은 질문 그대로인 채 답을 거부함으로써 온전히 답의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정답을 향한 직선적 과정이 주는 억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끝없는 사색을 가능하게 만들게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화두로 이끌고 가는 진정한 질문-답이 된다.

따라서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는 마치 선문답을 닮아 있으며, 그들이 머무는 길은 그대로 기원에 대한 탐색의 방편이자 도구가 된다. 가령, 어떤 절에 가도,

"아름다운 산 중턱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절터가 생기 왕성한 곳이라서 미황사라고 이름을 지은 모양입니다. '미황美黃'은 풀이하면 '아름다운 생명이 솟구쳐 오른다'는 뜻입니다." (133쪽)

라면서 그 기원과 어원을 탐색한다거나, 어느 길에 서도,

"강진에 오면 반드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걸어가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보면 잃어버린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156쪽)

라면서 구체와 추상 또한 겹쳐놓는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다소 작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의 지나치게 문어적인 말투 또는 인물들이 벌이는 행위의 연극적 성격 등에 대해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보다 '달'을 보고자 하는 안목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심우의 마지막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생 끝에 찾은 소도 잃은 뒤 세상에 나가 중생을 제도(入廛垂手)하는 것은 고사하고 '소'도 찾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소설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서, 우리나라 섬들의 아름다움을 안내하는 이야기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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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간지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천운영은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가 10년간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다가 목사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아, 이거 소설 되겠구나 싶었다"(<중앙일보> 2011년 3월 29일자)고 한다.

그리고 <생강>(창비 펴냄)의 '작가의 말'에서 천운영은 "2011년 현재에 과거의 유령을 불러오는 이유가 뭐냐고,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그 이야기가 (…) '지금'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습작 시절 선생님처럼 집요하게 묻"는 어떤 사람에게 쩔쩔매며 대답하다가 "결국, 써야 하니까, 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는 도망"쳐버렸다는 얘기를 한다.

이런 말들은 <생강>의 이야기가 그에게 영감이나 계시처럼 어느 날 문득 찾아왔으며, 의미를 따져 묻기 이전에 그냥 '쓰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한 이야기였다고 하는 작가의 솔직한 고백일지 모른다. 하지만 <생강>을 다 읽고 난 지금, 그 말들은 내게 이 소설의 한계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천운영은 그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솔직했던 것은 아닐지?

"물고문 전기 고문 관절꺾기의 명수", '장의사 집 둘째아들'로 불렸던 고문 기술자의 실화(實話)는 확실히 천운영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야깃거리다. 문신 시술사가 살에 '첫 땀'을 꽂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과 짜릿한 쾌감('바늘'), 갓 잡은 소의 피 묻은 골을 손질하고 '골탕'을 퍼먹는 노파의 모습('숨'), 매 맞는 옆집 여자를 엿보며 희열을 느끼다가 그녀가 죽어버리자 멍게를 통째로 씹어대는 여자의 광기('멍게 뒷맛') 등을 섬뜩하게 그려냈던 작가 가 바로 천운영이니까 말이다.


▲ <생강>(천운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한편, 천운영 소설은 충격적인 장면의 치밀한 묘사와 소름끼치는 이미지들의 선명함에 비하면,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점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10년이나 도피 생활을 했던 고문기술자의 거짓말 같은 실제 이야기는 장편으로서의 서사적 요소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장편을 쓰고 싶고 써야만 하는 상황에서(장편 소설로 인정받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 문단의 상황이다), 천운영에게 그의 이야기는 정말로 놓치기 아까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소재를 동물적으로 포착하여 소설로 만들어낸 것에 무슨 잘못이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이토록 논쟁적이고 불편한 고문 기술자의 실화가 <생강>에서는 단지 흥미진진한 소재거리로 활용됐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는 데 있다. 천운영 소설다운 강렬함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고문 장면은 숨 막히는 문신 시술 장면이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축 시장의 광경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효과를 낸다.

<생강>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다른 폭력들, 이를테면 '붉은 유리집' 계집애가 고문 기술자 안에게 허리띠를 휘두르거나 갱생원 수용자들이 그를 집단 폭행하는 장면 등은 고문이라는 특정한 폭력의 정치적, 시대적 맥락을 지우면서 이를 인간 내면의 폭력성으로 환원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폭력 그 자체의 강렬함에 매혹된 듯한 천운영의 집요한 문장들은 고문을 포함한 이 모든 폭력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삭제하거나 봉쇄하는 경향이 있다.

강렬하게 도드라지는 이런 장면들을 제외하면, <생강>은 자기 집 다락방에 몸을 숨긴 고문 기술자와 그 딸(선이)의 이야기라는 서사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힘겹게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이 과정이 '힘겹게' 느껴지는 것은 안과 선이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해진 스토리 진행을 따라가느라 종종 내적인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락방에 갇혀서조차 끈질기게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선을 위해서 악을 처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되뇌던 안은 공소 시효가 연장된 뒤 어느 날 갑자기, 폭력에 익숙해져버린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 이런 변화는 소설의 끝을 불과 10여 쪽 앞두고서야, 너무 늦었다는 듯 서둘러 진행된다(소설이 끝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하니까?). 다락방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 같던 그가 '외출'에서 돌아와 "1년을 더 버티다가 드디어 다락방 생활을 마"치게 되는 과정은 스토리 시간을 훌쩍 건너 뛴 뒤 지난날을 돌아보는 선이의 입을 통해 간단히 몇 마디로 정리될 뿐이다.

선이는 또 어떤가. 아버지가 고문 기술자란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그녀가 '고운 손'을 가진 남학생(민이)에게 이끌려 학생회에 참여하는 일, 시위 현장에서 자기 아버지가 고문 기술자임을 충동적으로 민에게 고백하는 일, 그에게 상처를 받아 학교를 그만 둔 뒤 돌연히 '가위'를 품고 싶다며 미용 기술을 배우는 일, 자기 집 앞을 서성이던 고문 피해자를 집으로 데려와 아버지가 있는 다락방 아래서 '홧김에' 관계를 맺고 그러다 또 그의 영향으로 고문 피해자 사진들을 스크랩하는 일 등, 그녀의 행동이나 심리적 변화들은 어느 하나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선이는 아버지로 인해 인생의 좌절을 겪고 그를 증오하다가, 사상적으로 각성하여 아버지의 잘못을 일깨우려 노력하고, 결국 어머니의 미용실(다락방이 있는)을 물려받아 그의 도피 생활을 끝까지 지켜보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기능적 인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화자이자 주인공 중 한 명인 선이가 이러한데, 그녀를 위해 동원된 다른 인물들(남학생 민이와 고문 피해자 청년 등)은 어느 정도일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 중에서도 최악은, 결말부에 불쑥 나타나 20년 전 자신을 믿어줬던 안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또 다른 고문 피해자 청년일 것이다. 어떻게 봐도 그는, 고문 기술자 안에게도 "악마가 아닌, 괴물이 아닌" 면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려나온 한심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이런 식으로 이들은 또 한 번 희생자가 되는 건 아닌지?).

이런 난감한 측면들은 아무래도, 자기가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부족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천운영이 이미 들었던 질문, 곧 그 시절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지금 그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그냥 "써야 하니까!"라고 외치며 '다락방'으로 올라가버리는 식으로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도망친 결과 <생강>은 과거에 대해서도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 만약 이 소설이 '옛날엔 그런 시절도 있었지'라거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 참 좋아졌지'라는 느낌을 자아내는 데 머무른다면, 차라리 그 고문기술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천운영이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실은 자기만의 은밀한 다락방이었다면, 또는 쌉쌀하고도 달큰한 생강의 맛이었다면, 그냥 다락방이나 생강에 대해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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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창균 논설위원께,

지난 30일 <조선일보>에 쓴 칼럼("原電에 어른거리는 광우병 그림자")은 잘 읽었습니다. 이 칼럼에는 <프레시안>에 실린 몇몇 기사의 제목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프레시안 books' 32호 머리기사("이명박과 김정일이 동시에 사랑한 '그것', 그 정체는…") 내용의 일부도 소개를 했지요.

"'이명박과 김정일, 두 남자가 동시에 사랑한 그것은…'이라는 글은 이 대통령의 원전 육성 정책과 김정일의 핵무기 개발을 동렬(同列)에 놓는다. 남·북한의 지도자가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핵 장난을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난한다."

그 글은 편지 형식을 빌려서 원자력 에너지를 놓고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신화를 책 몇 권을 중심에 놓고 정리한 서평입니다. 그 중에는 '원자력 발전소와 핵무기의 경계가 대중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또렷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는데, 제목은 그 대목을 눈에 띄게 뽑은 것이지요.

사실 칼럼을 읽고서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글을 인용하는 방식이 제목만 보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식이었기 때문입니다. '1등 신문을 자처하는 언론의 논설위원이 쓴 글치고는…' 하면서 덮었지요. 마침 그 칼럼에 기사 제목이 인용된 동료 기자가 반론을 쓴다고도 했고요.


▲ <원전을 멈춰라 : 체르노빌이 예언한 후쿠시마>(히로세 다카시 지음, 김원식 옮김, 이음 펴냄). ⓒ이음
히로세 다카시의 <원전을 멈춰라 : 체르노빌이 예언한 후쿠시마>(김원식 옮김, 이음 펴냄)를 읽으면서 다시 그 칼럼을 떠올렸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을 정리한 이 책이 특별히 '원자력 에너지와 저널리즘의 유착'을 다루면서, 언론의 책임을 특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로세 다카시의 <원전을 멈춰라>는 원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난 1987년에 일본에서 나와서 화제가 되었던 책입니다. 국내에서는 1990년에 소개가 된 적이 있는데, 이번 후쿠시마 사고에 맞춰서 출판사에서 발 빠르게 재출간을 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뒤적이면서 저는 '아!' 하고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20년 전에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으니까요. 올해 68세인 히로세 다카시는 일본에서 유명한 독립 저널리스트로 꼽히는데, 이 책의 다음 대목은 그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지진, 해일이 일어나면) 정전이 됩니다. 예비 전원도 망가지고 그 순간 긴급 장치가 움직이지 않게 될 가능성도 큽니다. (…) 후쿠시마 현에서 해일이 일어나 해수가 들어오면 11기가 함께 노심 용해(melt down)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말기적인 사태로 몰아넣는 엄청난 재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199쪽)

원자력의 진실 : 93% vs 33%

이 책에서 히로세 다카시는 아주 강한 어조로 원자력 에너지의 진실을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언론의 행태를 비판합니다. 그가 전하는 사실상 원자력 산업계, 원자력 전문가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일본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언론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토론을 위해서 먼저 여론조사 결과를 한 번 보겠습니다. 아랍에미리트에 원자력 발전소 수출을 성사시켰다고 온 나라가 들썩였던 2010년 1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흥미로운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원자력 발전소가 필요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93%나 됩니다.

이런 결과는 당시 여러 언론을 통해서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또 다른 항목이 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자신의 거주지 부근에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것'을 놓고 '찬성'을 택한 응답자는 불과 31%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기관이 2009년 수차례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앞마당에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데 찬성하는 이들의 비율은 1년간 22%에서 30% 정도를 오갔을 뿐입니다. 아마 지금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더 낮아지겠지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열광이 가장 높았던 시기의 여론 조사에서 나타난 '93:31', 이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평소 "대안이 없으니 원자력 발전소는 불가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도 정작 내 집 앞에 그것이 들어선다면 머리띠를 묶고 반대하지 않을까요?


▲ <올림픽의 몸값>(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이 조사 결과는 원자력 에너지의 또 다른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모두가 원자력 발전소를 거부하다 보니, 결국 그것이 들어서는 곳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지역입니다. 당장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후쿠시마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 소설을 한 권 떠올렸습니다. 국내에서도 꽤 인기가 높은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양윤옥 옮김, 은행나무 펴냄)입니다. 이 소설은 1958년 도쿄 올림픽의 가상 테러 사건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위치한 도호쿠(東北) 지방 출신입니다. 이 소설은 도호쿠 지방이 일본 경제 발전 과정에서 얼마나 소외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바로 그런 소외 지역에 안겨진 것이 바로 원자력 발전소였지요.

원자력 에너지는 정의롭습니까?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원자력 발전소 유치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진 강원도 삼척을 보십시오. 어디서도 원자력 발전소를 받으려고 하지 않으니, 지금 한국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지역 중 한 곳이 또 다른 희생양이 되기 직전입니다.

잘 알다시피,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기의 대부분은 서울·인천·수도권, 부산, 대전, 대구, 광주, 울산, 포항 같은 공업 단지를 낀 대도시에서 소비합니다. 수도권에서만 전체 전력의 38%를 소비합니다. 그런데 정작 원자력 발전소는 전기 요금이 1만 원만 나와도 화들짝 놀랄 농민·어민들이 사는 곳에 들어섭니다.

이렇게 전기의 생산지와 소비지가 멀다 보니 고압 송전탑도 필수입니다. 현재 전국에 송전탑만 3만8411개가 있습니다. 송전탑으로 인한 유형, 무형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것도 전기를 가장 덜 소비하는 전국의 농민들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의롭습니까?

당장 이런 반론이 들립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떠안은 대신에 보상금을 타가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2008년 한 해만 1516억1600만 원이 발전소 주변 지역 사업에 쓰였습니다. 심지어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설 경주는 3000억 원 이상의 '당근'으로 회유를 했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위험한 원자력 발전소를 돈을 쥐어주고 떠넘기는 방식은 정의로운가요? 아니 정의로운지를 떠나서 이렇게 돈을 쥐어주는 방식이 계속 가능할까요? 이명박 대통령의 호언대로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 10기~12기 정도를 더 짓는다면, 도대체 얼마나 큰 '당근'이 필요할까요?


ⓒ프레시안(손문상)

서울에 원자력 발전소를!

히로세 다카시는 1981년에 <도쿄에 원자력 발전소를!>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영화 <도쿄 핵발전소(Tokyo : Level One)>(야마가와 젠 감독)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지난 2005년 국내의 한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어요.

영화 속의 도쿄 도지사는 "도쿄 도청 한복판에 원자력 발전소를 유치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지방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대부분을 소비하면서도, 그것의 문제에 둔감한 도쿄 시민에게 일종의 충격을 주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창균 논설위원처럼 "당분간 원전 없이 살아갈 방법은 없어 보인"다고 인식한다면 또 "우리 원전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 전문가의 호언장담을 믿는다면 당장 서울로 원자력 발전소를 유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를 '괴담' 취급하는 김창균 논설위원부터 "서울 혹은 수도권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유치하자"고 제안하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 용기(?) 있는 지식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 사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황우석 씨를 비롯한 서울대학교 교수 몇몇이 2004년 1월에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을 서울대학교에 유치하자"고 나섰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해프닝이 있었지요.

한 포털사이트의 신상 정보를 보니, 김창균 논설위원은 '한국참언론인상'을 수상했더군요. "서울에 원자력 발전소를 유치하자"고 나설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야말로 원자력 에너지의 여러 문제를 시민들과 공유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보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참언론인'의 태도 아닐까요?

원자력 없는 미래

저는 앞의 기사의 결말에서 독일 얘기를 잠시 했습니다. 독일은 이미 2000년에 '원자력 발전소 포기'("현재 운영 중인 원자력 발전소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만 원자력에 의존하자!")를 선언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전력의 약 30%를 원자력 발전소에 의존하는, 설비 용량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원자력 대국인 독일이 10년 전에 '원자력 포기'를 선언한 것은 획기적인 대안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그 선언을 통해서 원자력이 아닌 미래를 더 적극적으로 준비하자고 결의를 다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독일은 차근차근 '원자력 없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그런 준비는 더욱더 힘을 받을 전망입니다. 자, 이제 우리도 '원자력 없는 미래'가 과연 가능한지 한 번 얘기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으로 (그 정체에 대한 논란은 미뤄두고) '녹색'을 국정 운영의 머리에 놓은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물꼬를 트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그 업적만으로도 이 대통령은 오랫동안 기억되리라 확신합니다.

"1등 신문" <조선일보>도 "괴담" 운운하며 진보/보수 편 가르기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 '문명사적 전환'의 순간에 동참하는 게 어떨까요? '참언론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기자의 글이 길었습니다. 김창균 논설위원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2010년 4월 1일

강양구 드림.


이 글은 <조선일보> 김창균 논설위원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빌린 <원전을 멈춰라>의 서평입니다. '프레시안 books'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원자력 에너지를 성찰할 수 있는 여러 책들을 편지 형식을 빌려서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은 내용, 형식 면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첫 번째 편지 : 일본이 핵에 무너진 날…"우리는 모두 일본인이다!"

☞두 번째 편지 : 이명박과 김정일이 동시에 사랑한 '그것', 그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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