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간지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천운영은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가 10년간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다가 목사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아, 이거 소설 되겠구나 싶었다"(<중앙일보> 2011년 3월 29일자)고 한다.

그리고 <생강>(창비 펴냄)의 '작가의 말'에서 천운영은 "2011년 현재에 과거의 유령을 불러오는 이유가 뭐냐고, 그래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그 이야기가 (…) '지금'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습작 시절 선생님처럼 집요하게 묻"는 어떤 사람에게 쩔쩔매며 대답하다가 "결국, 써야 하니까, 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는 도망"쳐버렸다는 얘기를 한다.

이런 말들은 <생강>의 이야기가 그에게 영감이나 계시처럼 어느 날 문득 찾아왔으며, 의미를 따져 묻기 이전에 그냥 '쓰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한 이야기였다고 하는 작가의 솔직한 고백일지 모른다. 하지만 <생강>을 다 읽고 난 지금, 그 말들은 내게 이 소설의 한계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천운영은 그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솔직했던 것은 아닐지?

"물고문 전기 고문 관절꺾기의 명수", '장의사 집 둘째아들'로 불렸던 고문 기술자의 실화(實話)는 확실히 천운영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야깃거리다. 문신 시술사가 살에 '첫 땀'을 꽂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과 짜릿한 쾌감('바늘'), 갓 잡은 소의 피 묻은 골을 손질하고 '골탕'을 퍼먹는 노파의 모습('숨'), 매 맞는 옆집 여자를 엿보며 희열을 느끼다가 그녀가 죽어버리자 멍게를 통째로 씹어대는 여자의 광기('멍게 뒷맛') 등을 섬뜩하게 그려냈던 작가 가 바로 천운영이니까 말이다.


▲ <생강>(천운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한편, 천운영 소설은 충격적인 장면의 치밀한 묘사와 소름끼치는 이미지들의 선명함에 비하면,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점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10년이나 도피 생활을 했던 고문기술자의 거짓말 같은 실제 이야기는 장편으로서의 서사적 요소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장편을 쓰고 싶고 써야만 하는 상황에서(장편 소설로 인정받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 문단의 상황이다), 천운영에게 그의 이야기는 정말로 놓치기 아까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소재를 동물적으로 포착하여 소설로 만들어낸 것에 무슨 잘못이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이토록 논쟁적이고 불편한 고문 기술자의 실화가 <생강>에서는 단지 흥미진진한 소재거리로 활용됐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는 데 있다. 천운영 소설다운 강렬함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고문 장면은 숨 막히는 문신 시술 장면이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축 시장의 광경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효과를 낸다.

<생강>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다른 폭력들, 이를테면 '붉은 유리집' 계집애가 고문 기술자 안에게 허리띠를 휘두르거나 갱생원 수용자들이 그를 집단 폭행하는 장면 등은 고문이라는 특정한 폭력의 정치적, 시대적 맥락을 지우면서 이를 인간 내면의 폭력성으로 환원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폭력 그 자체의 강렬함에 매혹된 듯한 천운영의 집요한 문장들은 고문을 포함한 이 모든 폭력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삭제하거나 봉쇄하는 경향이 있다.

강렬하게 도드라지는 이런 장면들을 제외하면, <생강>은 자기 집 다락방에 몸을 숨긴 고문 기술자와 그 딸(선이)의 이야기라는 서사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힘겹게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이 과정이 '힘겹게' 느껴지는 것은 안과 선이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해진 스토리 진행을 따라가느라 종종 내적인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락방에 갇혀서조차 끈질기게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선을 위해서 악을 처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되뇌던 안은 공소 시효가 연장된 뒤 어느 날 갑자기, 폭력에 익숙해져버린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 이런 변화는 소설의 끝을 불과 10여 쪽 앞두고서야, 너무 늦었다는 듯 서둘러 진행된다(소설이 끝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하니까?). 다락방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 같던 그가 '외출'에서 돌아와 "1년을 더 버티다가 드디어 다락방 생활을 마"치게 되는 과정은 스토리 시간을 훌쩍 건너 뛴 뒤 지난날을 돌아보는 선이의 입을 통해 간단히 몇 마디로 정리될 뿐이다.

선이는 또 어떤가. 아버지가 고문 기술자란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은 그녀가 '고운 손'을 가진 남학생(민이)에게 이끌려 학생회에 참여하는 일, 시위 현장에서 자기 아버지가 고문 기술자임을 충동적으로 민에게 고백하는 일, 그에게 상처를 받아 학교를 그만 둔 뒤 돌연히 '가위'를 품고 싶다며 미용 기술을 배우는 일, 자기 집 앞을 서성이던 고문 피해자를 집으로 데려와 아버지가 있는 다락방 아래서 '홧김에' 관계를 맺고 그러다 또 그의 영향으로 고문 피해자 사진들을 스크랩하는 일 등, 그녀의 행동이나 심리적 변화들은 어느 하나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선이는 아버지로 인해 인생의 좌절을 겪고 그를 증오하다가, 사상적으로 각성하여 아버지의 잘못을 일깨우려 노력하고, 결국 어머니의 미용실(다락방이 있는)을 물려받아 그의 도피 생활을 끝까지 지켜보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기능적 인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화자이자 주인공 중 한 명인 선이가 이러한데, 그녀를 위해 동원된 다른 인물들(남학생 민이와 고문 피해자 청년 등)은 어느 정도일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 중에서도 최악은, 결말부에 불쑥 나타나 20년 전 자신을 믿어줬던 안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또 다른 고문 피해자 청년일 것이다. 어떻게 봐도 그는, 고문 기술자 안에게도 "악마가 아닌, 괴물이 아닌" 면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려나온 한심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이런 식으로 이들은 또 한 번 희생자가 되는 건 아닌지?).

이런 난감한 측면들은 아무래도, 자기가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부족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천운영이 이미 들었던 질문, 곧 그 시절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지금 그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그냥 "써야 하니까!"라고 외치며 '다락방'으로 올라가버리는 식으로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도망친 결과 <생강>은 과거에 대해서도 그리고 현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 만약 이 소설이 '옛날엔 그런 시절도 있었지'라거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 참 좋아졌지'라는 느낌을 자아내는 데 머무른다면, 차라리 그 고문기술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천운영이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실은 자기만의 은밀한 다락방이었다면, 또는 쌉쌀하고도 달큰한 생강의 맛이었다면, 그냥 다락방이나 생강에 대해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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