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정작 전공으로 삼고 있는 문학을 통해서 스스로 질문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문학 자체에 대한 의심을 포함하는 이 질문들을 생각하며 보내곤 했던 오랜 시간들 대신 어떤 방식으로든 짧은 시간 안에 작품들을 구별하고 가름이 끝난 뒤의 평가를 자못 당당하게 전달하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이 소금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소금만 맛을 보면 된다고 생각한 어떤 어리석은 사람처럼 말이다.

최근, 장편 소설 <피플 붓다>를 펴낸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장편 소설 <항항포포>를 선보인 작가 한승원은 문학에 대한, 나아가 문학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다. 소설 창작에 40여 년을 훌쩍 넘긴 시간을 바치는 동안 문학에 대한 근본적 의심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자 우리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항항포포>(남승원 지음, 현대문학 펴냄). ⓒ현대문학
물론 그의 이런 의심과 질문은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당장에 뒤돌려 세울 만큼 아프게 날이 서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소설은 "크고 작은 회흑색의 몽실몽실한 돌들"처럼 "씻기고 씻겨서 반들반들하게 닳고 닳아"(66~67쪽)진 뭉툭함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 담겨 있는 문제들은 예리한 절박함 대신, 한 번 박히면 좋든 싫든 그와 더불어 평생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화두가 된다. 그것은 이 소설의 외관이 가지고 있는 기행문적 서사가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풍물에 주목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마치 심우(尋牛)와도 같은 '길' 찾기의 과정과 다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작품은 이와 같은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가령, 소설 속 인물인 두 남녀가 우연히 여행길에서 만나 동행을 하게 되는 장면에서 여자는 먼저,

"선생님, 혼자 여행하시는 모양인데, 심심하지 않게…… 갈 길을 잃어버린 저를 데리고 다니세요." (15쪽)

라고 말을 건넨다. 이 여자는 어린 나이에 조직 폭력배인 남편의 강압으로 시작되어 지금껏 강제로 유지되고 있는 결혼 생활을 못 견디고 도망쳐 나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정체가 점점 드러나면서 약간의 미스터리와 긴박감을 부여하는 그녀의 정보를 이 자리에서 모두 언급한다고 해서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실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얽혀들며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경험하는 방황과 길 찾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단해 보이는 이 작품의 서사는 실상 많은 길들을 겹쳐 품고 있으면서도 또한 각각의 독립된 의미를 추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행 내내 몇 날 며칠을 같은 방, 때로는 같은 침대를 쓰면서 서로를 탐색하고 또 서로에게 위안을 받으면서도 끝내 나란히 누운 채 각자의 길 찾기에 골몰한 채 잠드는 두 남녀들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가인 남자 역시 지금은 죽고 없는 과거의 연인에 대한 추억과 회한, 자책 등을 안고 그 연인과 여행했던 길을 그대로 밟아 가는 중이다. 당시의 여행은 임용 고시를 몇 차례 낙방한 과거의 그 연인이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 창작을 빌미로 제안해서 같이 떠나게 되었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들과 현재의 또 다른 그들이 여행하는 곳은 모두 추사 김정희나 윤선도, 그리고 정약용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부터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머물거나 지나간 길임에는 물론이다. 심지어 복수심에 불타면서 도망간 아내를 쫓는 조직 폭력배인 남편 역시 '아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인물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한승원의 <항항포포>는 길 찾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 그 자체가 된다.

이때 질문은 질문 그대로인 채 답을 거부함으로써 온전히 답의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정답을 향한 직선적 과정이 주는 억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끝없는 사색을 가능하게 만들게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화두로 이끌고 가는 진정한 질문-답이 된다.

따라서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는 마치 선문답을 닮아 있으며, 그들이 머무는 길은 그대로 기원에 대한 탐색의 방편이자 도구가 된다. 가령, 어떤 절에 가도,

"아름다운 산 중턱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절터가 생기 왕성한 곳이라서 미황사라고 이름을 지은 모양입니다. '미황美黃'은 풀이하면 '아름다운 생명이 솟구쳐 오른다'는 뜻입니다." (133쪽)

라면서 그 기원과 어원을 탐색한다거나, 어느 길에 서도,

"강진에 오면 반드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올라가는 오솔길을 걸어가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보면 잃어버린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156쪽)

라면서 구체와 추상 또한 겹쳐놓는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다소 작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의 지나치게 문어적인 말투 또는 인물들이 벌이는 행위의 연극적 성격 등에 대해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보다 '달'을 보고자 하는 안목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심우의 마지막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생 끝에 찾은 소도 잃은 뒤 세상에 나가 중생을 제도(入廛垂手)하는 것은 고사하고 '소'도 찾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소설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서, 우리나라 섬들의 아름다움을 안내하는 이야기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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