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먼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7
에벌린 워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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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가 민음사판 책의 뒷표지에 왕창 다 적혀 있습니다. 중요 사건이 다 적혀 있어서 신경 쓰는 분들께선 뒷표지를 보지 마시고 바로 본문을 읽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아래에 인물들의 갈등 배경을 조금, 뒷부분에는 이 소설의 특이했던 점을 조금 적으려고 합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직접 나열하진 않으려고요.


브랜다와 토니 라스트 부부는 상류층 사람들 치고는 경제적인 여유 없이 쪼들리며 삽니다. 이들의 소유이자 거주지인 헤턴 저택은 지역의 명소로 군 안내서에도 소개가 들어가 있는 고딕양식의 대저택인데 이 저택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요구되는 보수를 하기 위해 수입을 거의 쏟아 붓고 있어요. 저택을 유지하자면 집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 15명, 그외 정원사 비롯 고용인이 6명 내외가 있어야 하고요, 상시 수리비도 많이 들거든요. 아침이면 하인이 가져다 주는 식사나 신문을 침대에 누워서 받아드는 일상이지만 어쩌다 브랜다가 런던에 갈 때는 기차표 할인하는 요일을 선택해 갈 정도이니 말하자면 우리집은 가난해, 우리집 정원사도 가난하고 가정부도 가난하고 보모도 가난하고 운전기사도 가난하거든, 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닌 상황입니다. 


여기서 자라고 이 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남편 토니는 저택이 상징하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저택이 요구하는 삶이 자연스러우며, 지역 목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목사는 수 년 전 식민지에 나가 있을 때 쓰던 강연문을 상황이 전혀 안 맞음에도 재탕삼탕 씁니다) 세상 변화에 무관심한 것도 당연하고, 외통수의 습관적 일상을 유지하면서 만족스러워 합니다. 저택을 관리한다기 보다 저택에 관리되는 인생 같습니다. 집 구석구석의 금이 간 부분들은 늘상 눈에 들어오지만 아내의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어떤지에는 무딘 사람입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사교계와 멀어진 채 취향껏 대화도, 소비생활도 할 수 없는 브랜다의 정신에 균열이 조금씩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익히 보아 짐작하다시피 브랜다가 그리워하는 런던 사교계의 생활이라는 것도 얄팍한 것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열리는 파티에서 얄팍한 연애와 뜬소문으로 유지되는 거품같은 것인데 브랜다는 그런 게 필요한 가벼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택의 융통성 없는 무거움 때문에 더욱 그런 거품같은 생활이 그리웠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리하여 브랜다는 한량에다 마마보이 모씨의 조악함을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그를 통해 런던 생활로 나가게 되고 남편과는 파국을 향해 갑니다. 


소설은 100페이지 정도를 남겨둔 삼분의 이를 지난 지점부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토니가 다른 환경에 가 있거든요. 워낙 분위기가 달라져서 브랜다 쪽 사정과 교차해 가면서 내용을 잇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 부분도 저는 나름 재미있었어요. 

자, 다 읽었거든요. 여기서 특이한 점을 알게 됩니다. 소설이 끝난 뒤에 작가인 에벌린 워가 쓴 글이 '서문'이란 뜬금없는 표현을 달고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결말'이 10페이지 붙어 있었습니다. 미국의 한 잡지사에서 연재를 원하면서 제가 위에서 분위기가 확 바뀐다고 했던 뒷 부분을 빼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거기에 실을 다른 결말을 썼고 그 다른 결말 부분인 10페이지 분량도 수록하였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삼분의 이 지점부터도 나름 재미있게 봤다고 했으나 출판사의 요구도 이해가 되었어요. 삼분의 이 지점인 5장부터는 좋게 말하면 상당히 이색적이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전반부의 작품 흐름이나 기대감을 파괴하는 감도 있습니다. 출판사가 원한 제목은 '런던의 아파트'였다고 하니 더욱 그들이 원하는 내용의 방향을 잘 알 수 있었어요. 에벌린 워가 다시 쓴 '또 다른 결말' 10페이지는 급마무리의 느낌도 있고 냉소적인 결말이긴 하지만 출판사가 원하는 제목에 충실하게 정리됩니다. 

원작의 후반부 100페이지는 그 10페이지에 비해 멜랑콜리가 있으며 안타까움 가득한 기이한 마무리입니다.

저는 두 결말 부분을 연달아 읽으면서 소설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라는 신의 손을 새삼 느꼈습니다. 작가가 직접 한 권의 책 안에 인물의 전혀 다른 인생 행로 두 가지로 결말을 짓는 것을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페이지도 잘 넘어가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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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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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책 크기도 좋고(민음사는 가로가 짧아서 저는 좀 불편하거든요) 표지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검은 색 디자인은 처음 봤을 때 세련된 거 같기도 하고 새로운 거 같기도 한 듯, 이러며 좋게 봤어요. 그런데 각 작품마다 다르게 들어가는 윗 부분 삼분의 일이 가끔 취향에 넘 안 맞는 사진들이 있는데 이번 소설의 표지도 안 맞는 쪽이었어요. 책 내용과 연관된 무슨 의미가 딱히 있는 것 같지도 않고...누구 작품사진인가 싶어서 찾아봐도 적혀 있진 않네요.


자신의 나이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늙은 여성이 현재와 같은, 외부와 차단된 채 수십 년 삶을 살게 만든 이유가 되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그 사랑의 시작 부분인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모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생물학적인 의미의 죽음이 대표적이지만 죽음과 버금가는 이별 상황도 끼워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이라고 짧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지 남녀의 사랑이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의미상 맞는 것이겠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아마도 구십이나 백 살일 것이라고 본인 나이를 추측하고 있으며 사랑하는 이의 이름도 잊었기 때문에 그이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프란츠'라는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많은 기억들을 날마다 지어낸다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과 희망 사항과 꿈 같은 것이 마구 뒤섞여버린 상태라고 말합니다. 백 살에 이르기 직전 수십 년을 타인과 접촉없이 생각 속에서만 살았다면 가능한 일일 것 같아요. 화자는 연인이 떠난 후로 인생에 더 이상의 에피소드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만남도 연락도 끊고 은행과 시장만 오가며 고립되어 살아왔어요. 본인은 '나의 인생을 끝나지 않는, 중단 없는 사랑 이야기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연인 '프란츠'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화자가 일하던 동독 박물관에 파견을 오게 되어 둘이 만나게 됩니다. 둘 다 기혼인데 화자만 가족들과 어느새 분리되고 오직 프란츠를 바라면서 만나는 시간을 이어갑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이런 처지에 놓인 다른 이야기의 인물들처럼 화자는 질투, 의심, 소유욕의 고통으로 미치는 상황이 됩니다. 

비슷한 많은 이야기들과 변별되는 점은 회고의 주체가 어느 시점 이후로 사회와의 교류를 단절해 버린 백 세에 이른 노년 여성이라는 것과 동서독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장벽 붕괴 후에 각각의 지역을 배경으로 한 남녀의 만남을 통해 그 시대의 변화와 혼란을 반영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시대의 영향을 받는 커플들이 화자의 지인들 비롯해서 몇 커플이 더 소개됩니다. 

사랑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만한 상황과 그에 대한 비유를 한 문장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정신병적인 상태를 상황으로든 말로든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친구에게서 사랑이 믿음의 문제, 일종의 종교적 광기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우리 안에 남은 마지막 자연성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세울 것은 자신의 소망과 믿음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사랑은 믿음의 문제고 결단의 문제라는 것이고 소설 속의 화자는 자신의 남은 삶을 그렇게 정리합니다.

참, 화자는 자연사박물관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라는 거대한 공룡의 뼈대를 관리하는 고생물학 전공자인데 멸종한 공룡에 대한 관심이 그 구조물 아래에서 만난 (군집생활을 하는)개미연구가인 한 남자에게로 옮겨갔다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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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살해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9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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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의 제목인 '경찰 살해자'는 중심 사건이 아닙니다. 주가 되는 사건 즉, 시작 부분에 소개되고 대부분 분량을 차지하면서 수사되고 마지막에 해결되는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다른 사건에서 온 제목입니다. 그래서 소설의 반이 지나도록 왜 이 작품의 제목이 '경찰 살해자'인가 의아하게 됩니다. 엘릭시르의 이 시리즈는 살짝 작은 판형으로 나왔는데 500페이지 분량의 소설 중에 290페이지 정도에 이르러서야 제목과 관련된 사건이 등장하거든요. 주사건을 마르틴 베크가 끈기 있게 수사하지만 두 사건에 다 관여했던 절친이자 소중한 동료인 콜베리의 '육감'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분량의 면에선 주가 아니지만 '경찰 살해자' 사건은 이번 작품의 주제면에서는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제목이 되었겠고요.


콜베리가 사직서를 씁니다. 경찰 고위층에 대한 불신, 관료적이고 전시행적적인 행태, 경찰 동료들의 전반적 수준저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조직에 소속감을 잃어가다 결단을 냅니다. 마르틴 베크 비롯 시리즈의 중심 인물들이 다 나이들어 가면서 승진을 할 위치에 이르니 악화일로인 경찰 조직에서 고위직을 원치 않는 선택일 것입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며 마이 셰발, 페르 발뢰 두 작가는 범죄수사 이야기로 스웨덴 사회의 부정적인 면과 위선을 드러내고 싶었을 겁니다. 자신들 사상이(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작품에 녹아 들고, 역할하기를 바라는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경찰이 나날이 시민과 적대적이 되며 믿을 수 없는 집단이 되어 가는데 경찰에 소속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경찰 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 가는 것에 한계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냥 제 짐작입니다. 이번 소설은 경찰들을 데리고 경찰 조직 문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정점인 듯합니다.  

50년 전의 스웨덴인데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찰 조직이라든가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젊은 세대라든가를 묘사한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가 배경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복지국가인 그들 나라에 대한 부러움을 표하지만 소설 속에서 당사자들은 암담한 사회라고 욕하고요. 

 

늘 느끼지만 김명남 씨의 번역이 좋습니다. 인물들의 특성이 잘 살아나는 것도 번역의 공이 있을 거 같습니다. 

'그녀'라는 지칭을 쓰지 않습니다. 시리즈의 이전 책도 그랬는지 확인하진 않았는데 이번에 읽으며 눈에 확연히 띄네요. 삼인칭으로 여성을 지칭할 경우에 이름을 쓰거나 '그 여자'라고 부르거나 '그'라고 씁니다. '그'는 서술상황에 다른 남성과 혼동의 우려가 없을 때 쓰는 것 같았습니다.

이 소설에 이전 사건의 범인들이 형기를 마치고 재등장하고 있었는데 앞선 시리즈 중에 특히 좋았던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인물이 나와서 재독하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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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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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청부살인업자입니다. 

의뢰받은 일 때문에 작가로 위장하게 되는데 작가 흉내도 내고 목표물을 기다리는 빈 시간도 메꿀 겸해서 자신의 지난 날을 재료로 수기 종류의 글쓰기를 하게 됩니다. 

소설은 암살자로서의 일과 수기를 쓰는 일이 병행되다가 뒤로 가면서 이 둘이 서로 간섭해 들어갑니다. 주인공 빌리의 글쓰기는 위장의 방편이었고 포크너 흉내로 시작되었는데 의뢰받은 일을 끝내고 잠수하는 시간에 이르며 점점 대체불가의 무엇이 되어 빌리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어릴 때를 돌아보고 청소년기와 해병대 입대 후 이라크 파병 경험을 더듬어 나가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현재의 자신을 갱신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어떤 이야기인지는 인터넷 서점 등에서 잘 소개하고 있어요. 저는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띄엄띄엄 느낀 점을 조금만 써보려고요. 스포일러는 피해가면서요.


1. 전체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디데이인 10장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6페이지 분량입니다. 두 전문가 '빌리'와 '스티븐 킹'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어요. 청부살인업자로서의 15년 경력의 프로패셔널함이 잘 드러납니다. 철저하고 꼼꼼한 준비로 새벽부터 진행된 디데이의 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이동하고 숨기고 기다리고 저격하고 찾고 숨고...모든 것을 대비하여 짜여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데 - 문장들이 연결되는데 스티븐 킹은 이 부분을 쓸 때 자신의 손에서도 땀이 차며 하루 일과 중 글쓰기로 정해둔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르고 타자를 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혼자 잠수 중인 1권의 마지막인 11, 12장이 좋았습니다. 암살자는 역시 혼자라야...제맛입니다.


2.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작법 책을 냈잖아요. 저도 오래 전에 읽었는데 이런 책 가운데서도 술술 읽히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빌리 서머스'는 어찌보면 소설로,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서 '초짜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 '초짜가 글쓰기의 실전에서 마주치는 문제' 등을 얘기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의 내용 전체가 글쓰기를 통한 만족감이나 각성의 측면으로 빗대어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세부적으로도 이라크 일을 쓰다가 망원 조준기 종류에 따른 성능 같은 걸 더 설명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면서, 다시말해 예상되는 독자의 범위랄지 세부 내용의 분배랄지를 고민하기도 하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평온한 상태에서 소환된 강렬한 감정이 담긴 글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글'이라며 심란한 마음일 때는 노트북을 덮습니다. 또 찰스 디킨슨이나 에밀 졸라의 법칙이라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최소 두 번은 쓰여야 한다.' 같은 문장들을 머리속으로 웅얼거립니다. 


3.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좋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우정은 거의 종교 수준으로 철썩같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것을 표현하는 대목을 읽을 때 민망함을 느낍니다. 이 소설의 빌리 역시 암살자라기엔 너무 순정남입니다. 마지막 한 탕을 획책하며 하필이면 작가로 위장해서 글쓰기를 하는 바람에 생긴 각성의 효과도 있겠으나 원래 '좋은' 사람이었던 느낌이고 빌리와 한편 먹는 이들도 바탕이 선량해서 서로를 재까닥 알아보고 무한신뢰하네요. 사건 따라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걸핏하면 갈등에 빠지는 햄릿형이어서 심리 표현이 위주가 되는 것도 곤란하다 싶지만요, 이렇게 속이 투명하다니... 쬐금만 더 복잡한(회색의? 더러운?) 인간이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선량함이나 인간에 대한 태도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4. 초판 1쇄를 사면 오탈자와 이상한 문장을 흔히 만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정치인들이 발이 빼자 후퇴했다. 앨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를 보이지 낳은 채 엷은 미소를 짓는다. 자네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그 아저씨는 손님방을 쓰라고 해.' 등등)

'대존잘'은 무슨 뜻인지. 엄청 존나게 잘났다? 소설 속에서 노인이 젊은 사람들 말 흉내 상황이긴 하지만, 음...번역자가 너무 일시적 유행어는 안 썼으면 좋겠어요. 


5. 아쉬운 점을 3에서 썼으나 킹의 소설 중에 이 작품은 손꼽히는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는 눈물이 맺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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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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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본문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남편은 아내만 아내는 남편만 존재하는 듯이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남편이 천신만고 끝에 도쿄의 관공서에서 일하는 덕에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하루하루 생계가 가능합니다. 구멍난 구두도 새 코트의 필요성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부부였는데 작은집에 얹혀 살던 동생의 학비 문제가 대두되며 가진 경제력 이상의 수완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초연합니다. 주인공 소스케는 당사자 동생은 물론이고 독자가 보기에도 답답하리만치 차일피일 미루면서 현실 문제 해결에 소극적입니다. 소스케의 태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되는대로 될 것이야, 입니다. 자신이 나서서 일의 흐름을 트고 결정을 짓는 것을 하려 하지 않아요. 이런 일을 하려 하면 자신 뿐 아니라 바깥 세계 구성원들에게도 일련의 요구가 따르는데 그것을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소스케와 아내 오요네가 가진 소극성이 특이하게 보일 즈음 이웃에 사는 집 주인 사카이와의 교제가 전개되고 그러면서 이 부부의 도쿄 생활 이전 사연이 서술됩니다. 이 사연이란 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그냥 써버리자면 아내 오요네는 친구의 동거녀였는데 소스케와 서로 사랑하게(간통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다니던 학교와 집에 그 일이 다 알려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부부만 남은 것이죠. 그리고 부부는 일종의 죄의식 속에 움츠리고 서로 이외의 외부와는 단절되어 살아갑니다. 


이들에겐 희귀하달 수 있는 집 주인 사카이와의 교제는 소스케의 삶과 대비되는, 어쩌면 소스케도 그렇게 살 수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해진 삶의 형태를 보여 줍니다. 골목 끝 절벽 옆에 있는 해도 잘 안 드는 소스케의 셋집과 절벽 위에 여러 자녀들의 웃음 소리,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카이의 집. 그 집의 귀여운 딸아이들, 윤기나는 마룻바닥과 다다미, 가스난방기, 무엇보다 사카이라는 사람의 사교적이고 배려심 있는 원만한 인품은 소스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소설에서 소스케가 대놓고 이런 것을 절실해 하진 않지만 독자는 자연스럽게 견주어 생각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카이네와의 인연 때문에 세월의 힘으로 어느정도 바래어 두고 견디던 과거의 사건이 눈 앞에 펼쳐질 위기가 닥쳤을 때 소스케는 고스란히 되살아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인내만으로 버티는 것은 언제든 자아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의 실제 내용이 커지는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저는 이 문장이 나오는 부분에 몰입했습니다. 마음의 실제 내용은 어떻게 커질 수 있을까. 소스케는 종교와 좌선을 떠올립니다. 종교와 좌선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산사로 갑니다. 이 시도 후에 본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지으면서도 큰일의 절반쯤은 끝난 것처럼 느낍니다. 열흘 동안의 시도이지만 그런 몸부림 자체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래와 같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하였으니까요.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중략)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저는 위에 인용한 부분이 세상의 모든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도 읽혔습니다. 

제목 '문'은 이현우 서평가의 해설을 보니 연재하기 전에 아사히에 근무하는 제자에게 제목을 짓게 했다고 하네요. 소세키가 제목에 별 신경 안 썼고 남이 지어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하여 부부의 일상으로 끝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나쓰메 소세키의 필력에 수긍하였습니다. 세세한 사소한 일상에 귀기울이게 하는 힘, 그 밑으로 흐르는 사건을 이어서 전체를 떠받치며 마무리하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실시간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이렇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게 하고 동시에, 불시에 따귀를 때리는 듯한 문장이 튀어나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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