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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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은 '아베 일족', '무희', '기러기', '다카세부네'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단편집 경우에 편집자들이 작품 순서를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지 문득 궁금한데, 저는 시간상 먼저 나온 작품부터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무희'(1890)

국비로 독일 유학을 간 주인공이 그곳에서 만난 어린 여성과 살다가 본국에서 온 지인의 권고에 의지해서 그 여성을 버리고 귀국하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흔해빠지고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여성이 극단 소속으로 무대에서 춤을 추는 직업을 가졌긴 하지만 무희로서의 직업적인 특성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 어린 여성 자체의 개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홀어머니와 사는 가난하고 순진하고 어린 여자입니다. 저는 읽으면서, 읽고 난 후에도 이 인물을 떠올리면 독일 여성이 아니라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무희'라는 제목은 이 여성을 고정 이미지에 가두고자 하는 의도만이 느껴집니다. 

화자는 주어진 길 안에서 기계적으로 안정을 도모하며 살아온 자신의 성격을 몇 번이나 탓합니다. 무희와의 관계가 소문나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생계유지에 허겁지겁할 때는 친구의 도움에 난파선이 섬을 만난듯 의지했으면서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자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의지력 없는 자신을 옆에서 부추겨 여자를 버리고 떠나게 만든 친구를 원망합니다. 남 탓을 하기까지 하니 화자의 비겁과 의지박약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아요.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합니다. 연보를 보면 모리 오가이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독일에서 뒤따라온 여자가 있었고 집안에서 돌려 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소설이 화자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마무리된 것은 작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부끄러움을 글로 남겨놓겠다는 뜻이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기러기'(1911)

화자가 대학 때 하숙을 함께하던 '오카다'라는 인물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화자가 곁에서 본 것과 오카다 본인에게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다 보면 오카다나 화자가 알 리 없는 상대 여성의 일상과 심리가 어떻게 서술이 가능한지 의아한데, 이야기의 끝에 가서 화자 자신도 사건의 시간이 지난 후에 상대 여성을 알게 되어 그때 일을 들었고 그래서 전부터 알던 것과 뒤늦게 알게 된 것을 조합하였다고 밝힙니다. 앞 문장에서 사건의 시간이라고 했으나 흔히 이런 이야기의 흐름에서 예상할만한 뚜렷한 사건이랄 게 없습니다. 오카다는 의대 재학생이고 그가 규칙적으로 산책하는 코스에 있는 길갓집에 외로이 사는 상대 여성은 고리대금업자의 아름다운 첩입니다. 

위에 모리 오가이의 첫 소설에 비하면 이 작품은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짜나가는 솜씨가 훌륭하고 인물들의 속내를 헤아려 보게 하는 여백의 힘이 있으면서 인간사의 덧없음도 아울러 담고 있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건이라 할만한 것은 길갓집 새장에 있는 새를 노린 뱀을 둘러싼 소동 정도가 있는데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그 생생하고 무서운 묘사로 긴장이 되었어요. 소설을 읽으며 놀랄 지경이 된 장면을 만난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110페이지 정도 분량의 이 소설은 연재소설이었다고 하는데 작가가 창간한 문예잡지 '스바루'를 통해 연재했을까요. 육군 고위직에 있으면서 문예지를 운영하고 이런 작품까지 썼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아베 일족'(1913)

1641년 영주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병으로 죽습니다. 주군이 죽으면 가신들이 따라 죽는 순사의 전통에 따라 열여덟 명이 허락을 받아 할복을 합니다. 소설의 앞부분에 이 가신들이 어떤 인연으로 영주를 모시게 되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가 열거됩니다. 이들이 영주가 위독하자 순사를 허락 받는 과정과 영주가 죽은 후 순사를 어디서 했고 누가 뒷처리를 했는지가 줄줄이 이어서 나옵니다. 

맛보기로 한 명만 그대로 옮겨 볼게요. 

<데라모토 하치자에몬나오쓰구의 선조는 오와리 지방의 데라모토에 살았던 데라모토 다로라는 사람이다. 다로의 아들이었던 나이젠노쇼는 이마카와 가문에 봉사했다. 나이젠노쇼의 아들이 사헤에이고 사헤에의 아들이 우에몬 노스케이다. 또 우에몬노스케의 아들이 요자에몬인데 그는 조선 정벌 때 가토 요시아키 부대에 속해 공을 세웠다. 요자에몬의 아들이 하치자에몬인데 그는 오사카 전투 때 고토 모토쓰구 밑에서 일한 적이 있다. 호소카와 가문의 부름을 받고 녹봉 1000석에, 철포 부대 50정의 조장을 맡고 있었다. 4월 29일 안요사에서 할복했다. 53세였다. 후지모토 이자에몬이 뒷마무리를 담당했다.> 

이름도 길고 복잡한데 누가 누구 아들이고 무슨 공을 세워 녹봉은 얼마고 등등의 계통이 나오면 좀 어쩌라고 싶은 마음이 되긴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열여덟 명의 열거 이후에 순사를 허락받지 못한 아베 야이치에몬이라는 인물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그리고 어찌저찌하여 아베 일족 전체가 본가에서 농성을 하게 되고 토벌이 됩니다. 


이 작품은 거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네요. 오가이의 역사 소설은 사료를 충실히 조사해서 그 안에 있는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역사관에 의해 쓰여졌답니다. 변경하는 것은 싫었다고 본인이 수필에서 밝혔답니다.

이 작품이 소설이라는 것은 실제 일어난 일을 드러내는 과정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 장면에서 인물의 심리가 조금 얹어진다는 것,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조금의 상상이 발휘되어 제공된다는 것, 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독자에게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창작 부분을 뚜렷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지 싶습니다. 작가의 말을 근거로 보면 일단 일어난 일들, 사건들과 인물들은 모두 사료에 있는 역사적 사실인 모양입니다.


소설 독자로서 이 작품은 내용보다 문장과 서술 방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인이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난중일기를 김훈의 소설에서 조금 맛보았을 때 가졌던 느낌이 떠올랐는데 김훈의 소설은 문체가 두드러지게 앞장선 면이 있습니다만 이 소설은 문체상의 '기교' 같은 것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냥 기름기 없는 정확한 문장에다가 갑자기 싹둑자르듯 서술되는 사건의 전개가 단도직입입니다. 앞서의 '무희', '기러기' 와는 다른 산뜻하면서도 섬뜩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카세부네'(1916)

제목 '다카세부네'는 교토에서 오사카로 죄인을 호송해 가는 배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호송하는 관리가 하루는 특이한 죄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 죄인으로 인해 자기 삶을 돌아본다는 내용의 14페이지 짜리 짧은 소설입니다.



@ 모리 오가이의 '기러기'와 '아베 일족'은 무척 인상적이었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와 견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견주기에는 작품 수가 적고 단편 위주니까요. 모리 오가이가 1862년 생으로 소세키보다 5년 일찍 출생했다고 하는데 훨씬 더 예전 사람 느낌이 듭니다. 장남이라서 대접 받았지만 부담도 크게 지고 성장하였고 의대도 최연소 졸업생이라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육군에 지원한 것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공직이 좋다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라 하고요. 여튼 나쓰메 소세키에 비해서 성장 환경이나 진로 선택을 봤을 때 전통의 압박과 영향을 더 많이 받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모리 오가이를 높게 평가 언급한 것을 봤는데 미시마 유키오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작품들이 더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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