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풍요의 바다 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윤상인 외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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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부호의 아들, 뭇 사람들이 놀랄만큼의 용모. 주인공 기요아키는 이런 조건을 가진 18, 19세 무렵의 청년입니다. 요즘 같으면 청소년이고 아기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주변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중심인물이라 읽어나가다가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놀랍니다. 물론 백 년 정도 전의 귀족 가문이니 어른 대접의 기준이 달랐지만요.

주인공 기요아키가 감정대로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물불 안 가리는 청춘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성인 남성과 같은 진지함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친구 혼다는 이성적이며 무척이나 깊이 있는 사고력을 펼치는 것이 나이가 믿기지 않는 수준을 보입니다. 또한 기요아키의 연인 사토코도 갓 스물이지만 신비한 아름다움의 소유자로 풋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성숙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이들의 나이는 잊고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목 '봄눈'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봄눈은 한 겨울에 내리는 눈과는 달리 한 템포 늦게 찾아오는 눈이며 한 해가 시작되는 시기에 내려서 곧 녹을 눈입니다. 이 봄눈은 기요아키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뭔가 꿈같이 좋은 것이 여기에 있는데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시간이 어긋나 있으며 흔적을 길게 남길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아니 거꾸로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꿈같이 좋은 것이 어긋난 시간에 흔적을 길게 남길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최상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요. 기요아키는 확고하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토코와 현실 시간이 어긋난 이후 비로소 감정을 마음껏 불태우며 생사를 걸고 돌진합니다. 그것이 우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허락한 시간과 여건에 가질 수 있는 것에는 아름다움을 못 느끼고요. 끝에는 당연히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한 잦은 묘사나 추함에 대한 혐오, 우아함에의 집착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독서 중에 작가를 자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우아함의 화신인양 퍼포먼스를 통해 인생을 작품화하려고 했었던 작가.(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집니다.)

 

읽으며 주의를 끌었던 것 중 하나는 귀족계급이며 부유한 집안이라 서양의 온갖 문화적, 물질적 사치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습게도 졸부들이 그러듯이 어디 제(made in -)인지 일일이 밝혀 말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시카고에서 수입한 스팀 난방 시설을 갖춘 양관, 이태리 대리석으로 된 당구대가 놓인 당구실, 거기에 걸린 영국에서 온 화가가 그린 조부의 커다란 초상화, 스코틀랜드산 무릎 덮개 등등. 당시의 일본 최상층이 서구 문물을 흡수하며 누린 모습은 졸부가 과시성 소비를 하는 것과 비슷했을까요. 이들은 전혀 졸부가 아니지만 서양의 문화 앞에서는 그런 심리적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치하고 속물적이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좋은 것은 그냥 좋은 것이다’, ‘내 것이 되면 내 것이지라는 거리낌없는 태도가 있습니다. 애초에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어떤 거부감이나 위축감 같은 것이 없어요. 침략을 받아 강제로 이식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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