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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올해의 한국소설을 발견했다.
여수에서 여행했을 때 들렸던 서점 <거기 책방 다섯>에서 구입했던 책 중 하나,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
딱 한 권의 책만 구비해 놓는 작은 서점이라 진열대에 소개된 책을 집었다. 예소연 작가의 사인이 있는 초본이었다...!
총 10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소설 모음집이다. 첫번째 수록집은 얼마전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서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된 <철봉하자 우리>이고 이에 이어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수록집은 차례로 주인공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이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시기의 이야기를 쓴 성장 삼부작이라 할 수 있겠다. (차례로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이 세편을 읽고 이 소설집이 나에게 올해의 한국소설책이 되리라 확신했다. 일단 나는 주인공이 커가면서 써내려가는 성장서사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도 있다. 와... 뭐라고 해야하지? 읽으면서 조금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하나. 아주 오랜만에 짜릿한 한국문학 독서 체험을 했다.
고모의 장례식 이후에 주인공이 알았던 고모의 삶, 그리고 주인공의 애인이 들려주는 주인공이 알지 못했던 죽기 전의 비교적 최근의 고모의 이야기인 표지작 <사랑과 결함>. 그리고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의 집과 짐을 정리하기 위한 손녀딸의 이야기와 그 외할머니의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분재>.
<팜>과 <그 개와 혁명>은 각 소설의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마치 하나의 동일 가족인 것만 같은 여지를 주는 비슷한 테마를 가지고 이어지는 소설이다. 운동권이었던 부모의 밑에서 태어난 딸과, 당신이 바꾸고 싶었던 세상의 부조리에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사상은 없었던 딸의 아빠의 이야기.
<철봉하자 우리>, <도블>, 그리고 <내가 머문 자리>는 성인이 된 후 사회에 나와서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아닌 어떤 계기와 우연으로 쌓인 우정 (그리고 점점 달라지는 각자의 삶에 멀어지기도, 뒤섞이기도, 엉키기도 하는) 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근, 이라고 하기엔 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의 책을 아우르는 비슷한 톤앤매너가 나는 조금은 실증이 나버리고 말았는데 이럴 때 예소연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죽음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 인간 관계의 끊어짐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그 결별이 각자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깔끔하지 않고 구질구질하며 다층적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나는 심플함을 추구하는, 마치 그게 가능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나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진정한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이 좋다. 이 책의 주인공들을 사랑하고 응원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등장인물 모두가 구질구질하고 내로남불이지만, 설사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더라도 자신과 타인의 상황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나의 감정과 이미 일어나버린 관계의 변화를 분리할 수 있는 정도의 성숙함을 조금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숙함을 갖고는 있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고 그 화를 꼭 풀어야 하며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가해와 피해가 뒤섞여서 어떤 사안에 따라서 그들은 공범이 되기도, 피해자가 되기도, 주동자가 되기도 하고, 그 교차성을 본능적으로 알고있는 오늘날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다음날 아침, 여행의 마지막 아침날에 남해의 민박집 사장님께서 어제 딴 커다란 복숭아를 접시에 담아 주고 가셨다. 아삭아삭한 복숭아를 깨물며 체크아웃 시간까지 LP판을 틀어놓고 거실 바닥에 누워 읽은 이 책은 지긋지긋하게도 더운 올여름에 딱이었고 그 순간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