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이 미어져라 김밥을 밀어넣고 눈물이 그렁그렁.

보는 사람도 덩달아 마음이 아파져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사람은 다, 혼자인가봐.

2004.9.22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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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우리 학교 식당 별로야.==;; 집 밥이 최고라는.==;

http://www.hani.co.kr/section-005100031/2004/09/005100031200409141604316.html

‘맛없는’ 구내식당에 건강 있다


△ 12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구내식당 입구에 오늘과 내일의 차람표가 붙어 있다. 일반인에게는 한끼 2500원에 제공된다. 이정아 기자

덜 먹어야 잘산다
(5) 외식은 구내식으로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 근처에는 다른 직장과 마찬가지로 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전통적인 다양한 한식에서부터, 양식, 중국식, 일식, 월남식, 터키식, 패스트푸드, 패밀리 레스토랑, 퓨전식 등 없는 것이 거의 없고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맛집으로 소개된 음식점만해도 어림잡아 수 십개에 이르는 것 같다. 불황이라고 하는 요즈음에도 점심시간에는 거의 빈집없이 꽉꽉 들어차고 일부에서는 줄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먹는 문화가 유별난 우리들에게 외식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일 1회 이상 외식을 하는 국민이 전체의 40%에 이르고, 주 1회 이상 하는 국민은 60%에 이른다. 또한 외식비가 전체 가구지출 식료품비의 50%를 넘는다.

우리 식생활에 필수가 되어 버린 외식은 국민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가장 큰 영향은 국민을 비만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 표에서 보듯이 외식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고칼로리식이라는 점이다. 과거 못 먹던 시절에 ‘외식하면 영양 보충’을 의미했기 때문에 양이 많았고, 모자라면 ‘인심이 박하다’ 할까봐 그릇이 커졌으며, 외식산업의 생존이 걸린 맛을 위해 고소하고 입에서 사르르 녹는 지방질의 비중을 많이 높인 것이 외식이 가정식에 비해 칼로리를 높인 주 이유이다. 지방과 영양가가 거의 없을 것 같은 계란라면에 밥 1공기만해도 거의 1000kcal에 지방함량이 28%에 이른다.


전문영양사가
영양·위생 고려한
‘저열량 균형식단’

요즈음의 외식이 벌이는 극한적인 맛 경쟁은 거의 중독성에 가깝다. 한번 입에 넣으면 배부르기 전에 그만 먹기가 담배피는 사람 안 피우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 맛 경쟁의 가장 큰 비밀은 화학조미료와 소금에 있다.

글루탐산나트륨(MSG)으로 대표되는 화학조미료가 가정에서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외식에서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한국의 화학조미료 생산량은 연간 10만톤이 넘으며, 국민 1인당 일일 소비량도 미국 0.47g, 일본 0.98g에 비해 한국은 3.9g에 달한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에 따르면 체중 25kg인 어린이는 하루 3g이 최대 허용량인데, 평균 1,65g의 화학조미료가 들어 있는 라면을 하루 두 번만 먹으면 벌써 이 기준을 초과하게 된다. 원만한 호텔의 연간 화학조미료 사용량이 1.5톤을 상회하는 바에야, 맛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일반 음식점은 더하면 더했지 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외식에서 맛 경쟁의 또 하나의 비밀은 음식을 태우고 뜨겁게 한다는 것이다. 후라이팬이나 불고기판보다는 숯불, 연탄불, 가스불 등의 화염에 직접 노출시켜서 굽는 직화구이가 훨씬 맛있고, 식탁에서 직접 끓여주고 덥혀서 뜨겁게 먹게 하는 것이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없는 맛의 비결이다. 직화구이는 발암물질로 알려진 에치에이에이(HAA)와 피에이에치(PAH)의 발생을 가중시키며, 뜨거운 음식은 구강, 인후, 식도, 위 등의 점막을 자극한다. 이 두 가지가 소금의 과다섭취와 함께, 한국인에게 위암이 암발생 1위인 이유로 추정된다.

외식 중독인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대안은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구내식에서는 영양사에 의해 영양적 측면과 위생적 측면이 고려된 식단이 작성되고 검수, 검식이란 과정을 거쳐 식사가 제공된다. 밥과 국, 반찬으로 어우러진 한식을 위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아. 영양면에서 균형식이며 가정식과 같이 저칼로리식이기 때문이다.


구내식의 가장 큰 단점은 대체로 맛이 없고 개인의 입맛 차이를 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가 레지던트 시절 바쁜 하루 생활에 병원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맛없는 구내식을 또 먹어야 할 때 “‘짬밥’ 먹으러 가자”고 했고, 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너무나 좋아했고 또 맛있게 느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현재의 체중(키 174cm, 몸무게 67kg)을 유지하고, 가정식에 만족하는 식습관을 가지게 된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구내식당이 아니었나 싶다.

구내식당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아침식사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서양과 일본에서는 간편한 아침을 제공하는 외식이 보편적인데 반해, 한국에서는 밤 늦게까지 일 하거나 노는 사람들을 위한 해장국은 있어도 바쁘게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 매우 드물다. 요즈음 아침식사를 위해 내가 흔히 이용하는 구내식당에 교통경찰 등 주위의 직장인들이 와서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흐믓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피할수 없는 외식, 이렇게 하면 균형식
식단은 한식으로 양은 적게 시간은 길게

외식도 잘 이용하면 균형식이 될 수 있다

첫째, 외식을 찾을 때 먼저 한식을 찾으라는 것이다. 다른 식사에 비해 저칼로리, 균형식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가정식이라는 간판을 붙인 식당이면 더욱 좋고 일식도 튀김을 제외한다면 한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되도록 다 먹지 말고 남기라는 것이다. 밥 한 톨이라도 남기면 죄악이라는 우리의 식문화에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남기는 사람이 많아야 음식점에서도 배식량을 줄일 수 있다. 여럿이 같이 먹는 음식일 때에는 눈총이 따갑다고 하더라도 1인분을 적게 시키는 것이 좋은 습관이 된다.

셋째, 균형을 생각하는 음식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햄버거를 먹을 때 샐러드를 같이 주문하여 무기질과 비타민을 보완하고 칼슘을 보충하기 위하여 우유를 마시면 균형잡힌 식사가 된다. 점심을 맛있다고 한 곳에만 가지말고 식단을 자주 바꾸어 식품의 종류가 다양한 식사를 하거나, 채소가 부족한 점심 식사를 한 경우에는 저녁 식사에서 채소를 충분히 보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지난 주에 언급했던 건더기는 다 먹고 국물을 남기는 습관도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게 한다.

넷째, 식사시간을 길게 가져 가라는 것이다. 뒤에서 손님들이 기다리는 음식점이라고 하더라도 한 끼 식사 최소한 20분은 넘겨야 하며 길면 길수록 좋다. 오래 씹어 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천천히 식사를 하면 먹는 양도 줄고 반찬도 골고루 먹게 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유태우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tyoo@mydoctor.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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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aus 2004-09-19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주인님도 저랑 같은 학교 다니신다고 언젠가 본 것 같은데요... 대전 K대 맞으세요?
졸업하고 회사 오니까, 팀 사람들이 옆 회사의 구내식당을 즐겨찾던데요. 거기가 학교 식당이랑 같은 업체(ECMD)에서 하는데, 그러니까 왠지 학교식당 특유의 냄새가 나는 듯 해서... 저는 혼자 먹으면 먹었지 그쪽으론 안가요 --;;
학교 졸업할 때 쯤에는 도저히 학교 밥 더 못먹겠다 싶어서 오토바이 사서 나가서 먹곤 했지요. ^^ 진학 안 하고 나온 이유 중에 학교 식당 밥 더 이상 못먹겠다는 게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고... 처음 학부 들어갔을 때는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6년 먹으니까 더는 먹기 싫더라구요 ^^

Choice 2004-09-20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근데 이제 ECMD 가 안하고 LG 아워홈이 들어왔어요. 결과는 단가상승. ㅎㅎ
 
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공동체 변화의 징후를 가장 예민하게 포착하는 여자들의 글을 읽었다. 합리적 근대 학문에 한 발을 담근 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을 다중심의 하나로 만드는 사람들. 생각하는 것들을 실천하는, 부러운 사람들.

우에노 치즈코 교수와 조한혜정 교수의 편지들은,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혼인과 비혼의 경계에서, 서로 어깨를 겯고 있다. 이유 없는 애국심을 강요하는 근대 국가로부터 자유로와 지기, 아이와 노인을 보살피지 않는 '경제사회'에 틈 내기, 서구 중심, 남성 중심 학문 커뮤니티에 반항하기에 이 둘은 의기투합한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그들보다 젊은, 여자들에 대한 이 둘의 이야기다. '하나코' 세대라 불렸던 소비 중심의 일본 젊은 여성들과 한때 광고계를 평정했던 한국 미시족에 대한 이 둘의 견해는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책임없이 물질적 부를 누리는 젊은 여자들이 '근대적으로' 근면한 삶을 살았던 두 사회학자에게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던 게 당연한 일. 게다가 똑똑하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결혼 시장에 미끈한 상품으로 나 앉아 있는 요즘 아가씨들을 보고 그들은 낮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 사회가 뭐라든 내 멋대로 사는, 성찰하는 젊은 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어서 그들이 상상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데서 그들은 경계의 희망을 찾는다.

시간이 흘러가고 예전과는 다른 포즈가 필요할 때, 가장 즐거운 일은 자신 안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걸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흘러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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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ne21.co.kr/kisa/sec-001100101/2004/09/040915165752028.html#

한국영화, 배우들이 좀더 다양한 커리어 쌓게 환경 조성되어야

배두나가 대단한 배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녀는 마임과 마술의 재능을 지니고 있는 배우다. 흥행에는 실패한 영화 <튜브>의 타이틀에서 그녀는 양손으로 매혹적인 발레를 연출해낸다.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녀로 하여금 수화로 말하게 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올 여름 나는 연극 <선데이 서울>에 출연한 배두나를 볼 기회가 있었다. 행주로 테이블을 닦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자주 서민 출신 여자 역을 연기하는 이유가 화장을 하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수천개의 일상적인 동작에 그녀만의 매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끊어지는 법 없이 부드럽게 연결된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그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그녀를 보라. 이런 가장 평범한 동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영화의 본질 자체, 무성영화(물론 채플린 같은)와 관련된 것이다. 배두나는 그래서 움직임의 연기자다. 그녀는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영화인들은 그래서 그녀를 인천으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에 뛰어 올라타게 하고(<고양이를 부탁해>), 배구를 하게 하고(<굳세어라 금순아>), 테러리스트로부터 탈출하게 하는 것(<튜브>)을 좋아한다. 상대역을 삼킬 듯 바라볼 때(<청춘>)의 그녀의 시선은 매력적이며 요염하기까지 하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녀의 시선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배두나는 자신의 육체를 원자재로 하여 창조하는 예술가이다. 가느다랗게 뻗은 긴 실루엣에 놓인 어릿광대 같은 얼굴로 그녀는 여러 영화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데뷔시기에 대중의 호기심에 큰 바람을 일으킨 그녀는 그뒤 자기 커리어에 연속성을 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그녀의 위치는 한국영화의 갑작스런 성장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는 조역을 맡기에는 너무 카리스마적이고 다수의 대중의 마음에 들기에는 너무 독특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국에는 다수의 대중 외에는 대중이란 없다. 주요 배역을 얻기 위해서는 타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많은 배우가 영화를 하기 때문에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광고나 TV활동을 통해) 유명하기 때문에 영화를 하게 된다. 연기자로서의 재능 외에도 대중의 마음에 들게 하는 재능 또한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연기생활에 다른 방향을 제시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위에서 말한 유의 연예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는 영화인들의 수가 폭넓은 연기자들의 양성소를 보유하기에는 너무 적기 때문이다.

프랑스에는 소피 마르소와 이자벨 아자니 또는 에마뉘엘 베아르 옆에 카랭 비야, 실비 테스튀드 또는 올해 여름 연기생활 20년을 맞아 축하를 받은 베아트리스 달 같은 비정형의 배우들을 일선에 남아 있게 하는 팬들이 있다. 미국에는 스칼렛 요한슨과 제니퍼 제이슨 리가 니콜 키드먼 옆에 존재한다. 이 두 부류는 상호 비침투적이지 않다. 멕 라이언은 제인 캠피온에게서 연기의 맥을 찾을 수 있고, 할리 베리와 샤를리즈 테론은 독립영화에서 톱모델로서의 이미지를 포기할 수 있다(오스카상을 획득하면서 말이다).

한국영화는 이러한 두 번째 허파 없이 완벽하게 숨을 쉬고 있다. 여러 차례의 성공은 인기가 확실히 보장된 인물들만을 전방에 내세우는 정책의 효과를 증명했다. 그렇지만 이런 경향은 두 번째 호흡 위를 짓누르는 베개와 같은 무게를 갖는다. 동시에 재능과 개성의 좀더 많은 다양성을 꽃피우는 데 제동을 건다.

아드리앙 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번역 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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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이 2004-09-1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재욱이 드라마 <짝>에 나올 때만 해도 좋아했는데 <별은 내가슴에>로 너무 뜨면서 변해 버렸고, 강대욱이 <카이스트>에 나올 땐 매력있다고 생각했는데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올인>을 찍으며 뜬 이후엔 또 예전같은 느낌이 없어진 것 같아요. 차태현이나 김정은도 그렇구요. 만약 배두나와 이나영이 앞으로 그렇게 뜨게 된다면 어떻게 변하게 될까 궁금하네요.
 

Obituary
Nature Cell Biology  6, 799 - 800 (2004)
doi:10.1038/ncb0904-799

Francis Crick (8th June 1916 – 28th July 2004)

Aaron Klug

MRC Laboratory of Molecular Biology, Hills Road, Cambridge, CB2 2QH, UK.

On 25th April 1953, there appeared three papers in Nature which changed our view of the world. The structure of the DNA double helix, with its complementary base pairing, is one of the greatest discoveries in biology in the 20th Century. It was also most dramatic, as, quite unexpectedly, the structure itself pointed to the way in which a DNA molecule might replicate itself, and hence revealed the "secret of life". The structure was solved in the Cavendish Laboratory, Cambridge, by Francis Crick and James Watson, using X-ray diffraction data that Rosalind Franklin, at King's College London, obtained from fibres of DNA.

I have elsewhere (J. Mol. Biol. 335, 3–28; 2004) told the story of how this came to happen: the origin of the research on DNA; the early investigations by Maurice Wilkins at King's College; the sorting out of the two forms of DNA by Franklin; the mistakes made both by Franklin and Watson and Crick; the intervention of old rivalries from an earlier generation (that of Lawrence Bragg and Linus Pauling); and the final model-building by Watson and Crick to give the three dimensional structure.

The structure was instantly accepted by the discerning few, but it's reception was mostly hesitant, and had to await confirmation through biochemistry by Arthur Kornberg and through X-ray crystallography at King's College by Wilkins' group. Yet, even then, this remained a discovery in chemistry, until the biological principle of "semi-conservative" replication, proposed by Watson and Crick, was proved by Messelson and Stahl in 1958.

The key points of the paper may be summarized as follows. Within the DNA structure, the two chains, held together by hydrogen bonding between the specific base pairs A–T and G–C, were seen to bear a complementary relationship to each other. This means, as Watson and Crick spelt out in their second paper in Nature in May 1953, that when the two chains come apart during replication of DNA, each can be used as a template to assemble a duplicate of its former partner. The crucial feature of the structure of DNA is not therefore the actual double helical form of the two phosphate-sugar chains — eye-catching as it is — but the unique pairing of the bases projecting from each strand. Moreover, the base pairs can be fitted into the double helix either way round, so that all four bases can occur on both chains. Thus, the second Nature paper also contains the first clear statement on the genetic code: "It follows that in a long [DNA] molecule many different permutations are possible, and it therefore seems likely that precise sequence of bases is the code which carries the genetical information".

In 1962, the Nobel Prize for Physiology and Medicine was awarded to Crick, Watson and Wilkins. Rosalind Franklin had died in 1958, so the Nobel Committee were spared the difficulty required by their statutes of limiting the prize to a maximum of three people. The citation reads "for the discoveries concerning the 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nd its significance for information transfer in living material." Note the word "information", a term that had never appeared in the writings of biochemists, who had been primarily concerned with the transfer of 'energy' in biochemical reactions. Indeed, the citation may be said to have looked forward to the genetic code, research on which was well under way by then, largely led and spurred on by Crick

Francis Crick was born in Northampton, educated at the Grammar School and later, with a scholarship, at Mill Hill School, London. He studied Physics at University College London and then stayed on to do a PhD. This was interrupted by the Second World War, during which he worked in the Admiralty to design magnetic and acoustic mines that could be recognised by one's own side but not by the enemy. Until then he had shown little of his intellectual power, but something special about him must have been discerned by his scientific contacts at the Admiralty. They helped him to obtain a Medical Research Council (MRC) grant to start research in 1947 at the Strangeways Laboratory in Cambridge on the viscosity of cytoplasm, a subject which was meant to introduce him to biology — a field he had now decided to enter. From there he found his way in 1949 to the MRC Unit for the Study of the Molecular Structure of Biological Systems in the Cavendish Laboratory, and enrolled as a research student of Max Perutz to study ox haemoglobin. He got diverted rather easily from this thesis work by the arrival in the laboratory of James Watson, who had come there to learn X-ray crystallography so that he could eventually go on to study the structure of DNA. The two found each other like-minded about the importance of DNA, but their first attempt to build a model of DNA ended in fiasco. Franklin, in a colloquium at King's College in November 1951, which Watson attended, had put forward her view that the molecular structure was likely to be a helical bundle of two or three chains, with the phosphate groups on the outside, in contact with water and sodium ions. Watson and Crick's model was of three helical chains with the phosphates on the inside, neutralized by cations, with the bases pointing outwards. It turned out that Watson, not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a unit cell of a crystal and the asymmetric unit, had conveyed the wrong water content to Crick. Crick redeemed himself by working out the theory of X-ray diffraction by a helical structure; he initially applied this to synthetic a-helical polypeptides, but it later was equally applicable to DNA.

Although the name of Crick will forever be primarily associated with DNA, he continued to make several important contributions to X-ray protein analysis and protein structure right through the heyday of the search for the genetic code. With David Blow, he put Perutz's isomorphous replacement method for solving protein structure on a sound quantitative basis, taking account of experimental errors, to become a standard method. He solved the structure of a-keratin, the prototype fibrous protein, and showed that it consisted of two Pauling a-helices slightly deformed to coil round each other — the "coiled coil". He arrived at this by a brilliant simplification in which the "knobs" (protruding amino acid residues) from one helix fit into the "holes" surrounding the knobs on the other and, to boot, derived theoretically the complicated diffraction pattern to be expected. A foray into collagen structure, inviting mock scorn from Watson, with Alex Rich revealed a triple coiled-coil and pointed the way to a complete solution by G. N. Ramachandran.

All through this time Crick was thinking about the genetic code. How does the information carried by the sequence of bases in a DNA molecule finally get transferred into the sequence of amino acids in a protein? While others looked for a direct physical relationship between a DNA sequence in the helix and an amino acid, Crick reasoned that there had to be an 'adaptor' molecule which carried an amino acid to line up on the RNA sequence translated from the DNA. Moreover, this was likely to be a nucleic acid that recognized the particular codeword on the RNA by the same kind of base pairing as was found in the double helix. Finally, in 1957, Crick identified the adaptor as a small soluble RNA recently discovered by Hoagland, later called transfer RNA, as it transfers an amino acid to the growing peptide chain.

This feat of the imagination exemplified Crick at the height of his powers, as does a brilliantly original paper with Sydney Brenner and Alice Orgel in Nature in 1961, entitled "The general nature of the genetic code for proteins". Brenner and Orgel had been trying to get at the code by mutagenising DNA with acridine and found that it could respond in two ways, either by changing one base into another or by inserting an extra base. But combinations of mutations produced puzzling results, which Crick showed could be explained if, and only if, the codeword (or codon) for an amino acid consisted of three bases. Eventually, all 64 codons were worked out in detail by biochemists using cell-free protein synthesis.

During this period of the 50s and 60s, Crick became, as it were, the conscience of the new subject of molecular biology, spanning as he did its two main components, macromolecular structure (and function) and molecular genetics. He led, he inspired, he conducted an extensive correspondence, he corrected mistakes, settled disputes, he cajoled, he joked. He was generous with his ideas, with his suggestions, and almost always courteous, but could be quite fierce when he encountered muddled thinking and sloppy experimentation. By the 1970s, Crick saw that it was time to move on to problems in cell biology. He and Brenner recruited, among others, John Gurdon and Peter Lawrence, and changed the name of their Division of Molecular Genetics to Cell Biology. Thus, two other animals, Xenopus laevis and Drosophila melanogaster, were introduced into the laboratory, to complement the nematode, Caenorhabditis elegans, already under study by Brenner.

Crick was often described as a theoretician, but this misses the whole man. He understood experiments, he did some himself; for example, trying to demonstrate base pairing between isolated bases, or extracting ribosomes to try out some ideas on protein synthesis. When we worked on chromatin, he would concentrate for hours on end, reading tedious detail in the literature to capture a possible clue. Later, he mastered much neuro-anatomical detail, which elicited the respect of the experts in the field.

Over the years, I learned from him, as he once wrote about himself and Bragg, from watching how he went about a problem. In fact I owe him a particular debt for suggesting that I might take up the subject of chromatin, which he regarded as ripe for study, having heard that there were not twenty or so kinds of histones, the molecules that package DNA, but only five, all the rest being chemical modifications of the parent proteins. This eventually led in our laboratory to Kornberg's discovery of the nucleosome, our work on its structure and on the higher order folding of chromatin.

This loose collaboration came to an end in 1976 when Francis, at the age of 60, decided to move to the Salk Institute to take up a new field — neuroscience. This did not come as a total surprise, because as early as 1962 I remember Francis talking excitedly about Hubel and Wiesel's paper on cortical neurons that responded to the directionality of lines and edges. At the Salk Institute he was a force in building up neuroscience at various levels, but particularly in the field of vision, because Crick thought that this would be the easiest path to understanding consciousness (his ultimate goal) but, for practical purposes, reduced to "awareness": are there awareness neurons? His book of 1994, The Astonishing Hypothesis, set out his ideas and arguments that consciousness is now accessible to scientific investigation. The book is dedicated to Christof Koch of CalTech, with whom he continued to collaborate in setting out a framework for the research.

A new book by Koch, The Quest for Consciousness, appeared a few months ago, the result of many years of thought and interpretation. When, in speaking to Francis, I called it "your book", he corrected me courteously "Christof's book; our work". Francis fought a long battle with cancer, pursuing his subject to the end. He died in hospital three hours after he finished preparing the manuscript of a paper. It is hard to believe that that penetrating intellect and powerful personality has been extinguished. But he will be remembered as one of a select few who created a new science, and his name is likely to live in biology with that of Dar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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