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군 투덜양] 삼광보다 열피! <알렉산더><샤크><오션스 트웰브> 스크랩 0

<알렉산더> <샤크> <오션스 트웰브>.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영어제목, 미국영화 뭐 이런 거 말고. 그렇다. 그것은 이 영화들에 웬만한 영화에서는 다들 충분히 주연을 하고도 남을 스타들이 최소 세명 이상은 나와주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하도 영화 제작비가 뛰다보니 한명 가지고는 안심이 되지 않아 스타들을 떼로 출동시키는 안전빵 마케팅 작전이 유행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소스 멀티유즈 멀티미디어 콘텐츠들이 멀티플렉스에서 개봉되고 있는 각종 에브리 멀티의 시대다보니 영화도 덩달아 멀티해지고 싶었던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만 여튼, 가히 ‘멀티플 스타 시스템’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일련의 영화들의 개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구의 의미를 새삼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삼광(三光)보다 열피(十皮)’.

그렇다. 아무리 왕대박급 스타들이 한꺼번에 떼로 몰려다닌다 해도, 영화 자체의 짜임새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각종 안스타급 배우들로 탄탄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영화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스톱적 메타포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이 경구는, 우리에게 위 영화들의 패착의 원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장장 삼분 빠진 세 시간에 육박해버림으로써,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관객에게 몸소 체험케 하는 시뮬레이션 무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알렉산더>의 러닝타임은 사실, 안젤리나 졸리의 뱀쇼, 발 킬머의 꼬장, 그리고 앤서니 홉킨스의 국사교과서 낭독에 골고루 시간을 안배하려는 쓸데없는 배려만 아니었더라면 족히 한 시간은 단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또, 목소리 연기하는 스타들의 얼굴을 닮은 물고기들을 출연시켜서, 그 스타의 캐릭터를 그대로 물고기화해보자는 아이디어 하나에만 의존한 채, 결국 진부해 터진 ‘시골 청년 교화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스토리를 늘어놓는 작태를 보였던 <샤크>의 ‘말은 많은데 쓸 말은 적은’ 썰렁함은, 애초에 100% 스타에 의존한 기획이 아니었더라면 생기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또한, 사실 자기네들끼리 웃고 즐기면서 보면 딱 좋을 고급 홈비디오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영상물을, 자신들이 한꺼번에 한 영화에 떼를 지어 우르르 출연해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스스로 감명받아 그걸 멀쩡한 영화를 사칭하여 개봉해냈던 <오션스 트웰브>의 시건방짐은, 가히 스타들의 자아도취로 야기된 국제적 민폐의 절정이었다. 물론 스타라는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특히나 상업 영화판처럼 도박성이 짙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결국 한 배우에게 ‘스타’란 ‘직업’이 아닌 ‘현재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따름이다. 그리고 ‘스타배우’가 자신의 ‘현재상태’를 그만 ‘직업’으로 오판하는 바로 그 순간, 스타는 일종의 재앙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부터 <오션스 트웰브>까지 일관되게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필자는 작금의 ‘떼스타 영화’들의 줄개봉을 보면서 이 경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밖에 없다.

삼광보다 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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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5-01-2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100%. 알렉산더라도 안봐서 다행이다~
 

소설속 시공에 ‘삼팔선’은 없다


① 소설가 김연수씨

왜 ‘갈라진 조국’인가
1920,30년대 만주서 답 찾아

2004년 소설계를 양분하다시피 한 김훈씨와 김영하씨의 활약을, 김연수(35)씨는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이 제3의 김씨는 2004년의 절반 가량을 연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연변대에서 중국어 기초과정을 공부하는 틈틈이 그는 계간 문예지에 장편을 연재했고, 한 권 분량에 육박하는 중단편을 발표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그는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한 권씩 내놓을 참이다.

단순히 책을 두 권 내놓을 예정이라고 해서 그를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장편과 중단편을 막론하고 김연수씨의 최근 작업이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우리 소설의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고, 이념과 상상력을 옥죄어 온 보이지 않는 금을 넘어서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20, 30년대 만주의 조선인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 개화기에 조선에 온 미국인 등이 최근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다. 연변, 그러니까 만주 체류 경험이 그의 작가적 시야를 넓혔음이다.




“만주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젊은 나이에 목숨을 바쳐서 투쟁한 선조들은 어찌 해서 결국은 이렇게 갈라진 나라를 물려 주게 되었나’ 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89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읽은 책들의 ‘과학’과 ‘진리’가 정말 과학이고 진리일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그 때 내가 확신하지 못했던 것들은 여전히 확신이 안 되더라. 1920, 30년대 용정 얘기를 쓰면서 나는 89년 서울을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순수하고 이상적이었던 젊은이들이 천국을 원했지만 결국은 지옥에서 죽는 이야기가 내 장편의 얼개이다.”

요즘 화두는 국경
문학도 국경넘어 세계로

만주 체류를 전후한 그의 요즘 관심은 ‘국경’이라는 것이다. “정전 체제의 남한은 사방이 갈 수 없는 금으로 막혔고, 문학 역시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지리적 위치만 달리 해서 보면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세상 이치인 터에 소설적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게 요즘 그의 화두로 보인다. “남한 내의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 역시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4년의 소설을 돌아보면 확실히 변화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서사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신인 작가들도 이야기를 중시하는 작품으로 승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야말로 소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 자신 젊은 나이에 동서문학상과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음에도, 작가들이 갈수록 상과 상금에 생계를 의존하게 되는 양상에 대해 그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작가들이 알게 모르게 상을 의식하면서 작품을 쓰고 때로는 상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생계가 가능해지는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무서운 동료?
김훈 김영하 박민규씨…

‘무서운 동료’가 누구인가 하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대뜸 “김훈 선생님, 김영하씨, 박민규씨”를 꼽았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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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5-01-0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올해는 김연수 책이 두권이나 나온단다~~~
 

선정기준은... 내맘대로. :)

1. 우리소설 Best

 

 

 

 

 

작년에는 김영하/김연수/성석제 등 남자 작가들을 많이 읽었었는데 올해는 그와 반대로 주로 여자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좋아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재미있게 읽고서 두 번째 책들을 기다렸었는데 심윤경/이지민 작가가 재미있는 책을 내 주어서 나까지 뿌듯했다. 게다가 기다리고 있던 윤성희 작가의 소설집까지 마지막에 나와서 더 반가웠다.  <거기, 당신?>은 마음이 아려서 한 번에 많이 읽을 수 없다.  

2. 다른 언어 소설 Best

 

 

 

 

 

사실 올해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해라고 볼 수 있다. 작년에 읽은 에 이어, <연애소설>,<레볼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까지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재일,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은 경계에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좌절을 느끼게 해 준다. 더불어 여름을 뜨겁게 달구어 주었던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읽는 내내 재미있었으나 영어로 읽은 탓인지 지금은 기억이 잘 안나고 있다. --;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드림온 처치곤란 코너에서 영하님이 언급하셔서 읽게 된 책이다. 뒤로 갈 수록 좀 재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리고 왜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읽고나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신선한 말장난이었다.

3. 우리 산문 Best

 

 

 

 

올해는 산문을 많이 읽어서 다섯 권만 꼽기가 힘이 들었다. <서늘한 미인>도 좋았고 <헌법의 풍경>도 재미있었고 <뷰티풀 몬스터>도 뷰티풀 했는데... 그래도 <10cm 예술>은 정말 예술이다. 그림도 예술이지만, 김점선씨가 사는 방법 자체가 예술이다.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은 <10cm 예술>을 소개해 준 중매쟁이다. 이 책 안에 있는 책들만 골라 읽어도 배가 부를 거 같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은 문장 하나 하나 반짝반짝 빛난다. 웃기면서 울리는 재주, 알고보니 김연수씨가 최고였다. <수상한 과학>과 <자유의 무늬>는 사실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 곱씹어 볼 기회를 주는 책들이다. 고종석 아저씨 책을 보이는 대로 집다보니 걸린 책이 <자유의 무늬>였는데 한국어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4. 외국어 산문 Best

 

 

 

 

<소년의 눈물>은 서경식 교수가 일본어로 쓴 산문이고 <사다리 걷어차기>는 장하준 교수가 영어로 쓴 글인데 다시 우리 말로 번역이 되어 나왔다. 그리고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짧은 글들인데 읽으니 마음을 빗자루로 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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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 - 황인숙의 엉뚱한 책읽기
황인숙 지음 / 이다미디어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고르는 일은 어렵다. 어렸을 때는 '계몽사 소년소녀 전집'에서 한 권 한 권 곶감 빼먹듯이 읽으면 됐는데 나이가 드니 그러기가 힘들다. (물론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을 한 권씩 골라 읽는 재미는 여전하다.) 아무래도 매체들이 권하는 책들에 먼저 손을 뻗게 되는데 대부분의 매체들이 신간을 중심으로 소개해서 그런지, 나의 독서생활도 너무 신간중심,이 되는 것 같아 아쉬웠었다.


그래서 가끔 '책에 관한 책'들을 읽게 되는데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은 이런 내 맘에 쏙 드는 책이었다. '황인숙의 엉뚱한 책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만큼 그녀의 책읽기는 샛길에서 헤매거나 먼 산을 바라본다. 그녀가 여러 책의 '행간에서 자기 자신을 읽은' 결과물은 나에게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이 책을 읽고나니 읽어보고 싶은 책 리스트가 갑자기 늘어났다. 한 권 한 권 읽어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뜬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나,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가산 카나파니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리고 쓰시마 유코의 <나>.  그녀의 책 읽기는 사회과학서적부터 동화, 사진집,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나는 이야기의 골짜기마다 그녀가 머물었던 흔적들이 제일 마음에 든다. 이런 소설들부터 읽어보고 싶다.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 중에는 내가 이미 읽은 책들도 있다. 나와 다른 곳에서 책장을 열고 나와 같이 한숨쉬고 나와 같이 밑줄 긋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있다는 게 든든하다. 조금은 천진하고 나보다는 좀더 착한 마음으로 책속을 서성대다가 그 기록을 남긴 황인숙씨가 좋아진다.


서평을 모은 책에 서평을 쓰다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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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미로’서 ‘자아의 지도’ 찾는다


△ (왼쪽으로부터) 신희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박사
· 생체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 분자생물학적 뇌 연구· <사이언스> 등에 다수 논문 발표
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서양철학, 문화론 연구 ·저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관련기사

  • 뇌연구 발자취
  • ① 우주론에서 ‘창조신화’를 만나다
  • ② 자연을 거슬러 자연을 꿈꾸다

  •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우렁쉥이는 커서 안착하면 뇌 소멸
    인간뇌 복잡성은 인간삶 암시
    마약도 순교도 뇌 즐거움 때문

    “인간 삶에서 뇌가 모든 것이라는 입장이신가요?”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만난 신희섭 박사는 담담히 되물었다.

    인문학자인 내가 뇌에 대한 과학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때, 마음이 뇌이고 뇌가 곧 마음이라는 것이 오늘날 뇌과학의 근본 입장이 아닌가 하고 물었을 때, 그리고 우리말의 ‘마음’(心)은 심장을 떠올리지만 서양말 ‘마인드’는 사유의 의미를 어원에 담아 뇌를 떠올리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실험실 방문에 앞서 대화로 시작되었다. 나는 대화가 잘 되리라고 직감했다. 과학자인 그는 오히려 과학주의적이고 ‘뇌 환원주의’적일 수 있는 내 말에 일단 제동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는 우선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는 것으로 뇌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해면동물은 신경 없이 세포가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를 이룬다. 이런 생물은 간단하지만 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물은 뇌가 필요 없다(식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렁쉥이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유생 때에만 뇌를 갖고 있다. 다 자라면 한 곳에 들러붙어 바닷물에 있는 미립자를 먹이로 걸러 먹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더 이상 필요 없는 뇌는 소멸한다.

    인간처럼 운동뿐만 아니라 상호관계, 판단, 의사결정 등을 위해서는 당연히 더 복잡한 뇌가 필요하다. 따라서 삶은 복잡하지만 덜 편할 수 있다. 덜 편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일지도 모른다. 신 박사의 과학적 설명에 자연스레 인간과 인생을 보는 지혜가 스며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불교의 참선에 관심 있다는 건 아마 ‘부동의 편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결국 뇌를 가상적으로 작동 없는 상태로 둔다는 뜻이 아닐까. 이는 또한 ‘부동을 즐기는 존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연관되지 않을까.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


    △ 철학자 김용석 교수와 뇌신경과학자 신희섭 박사가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안 신 박사의 실험실에서 두툼한 인간 뇌지도 책을 보면서 뇌와 마음에 관한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그러고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뇌가 주인공이 된 건 얼마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진화에는 ‘창발적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포유류의 출현에서 이런 진화 과정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창발성은 진화의 각 단계가 여러 요인의 단순한 총화가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성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창발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뇌는 몸에 대해 ‘기댐’과 ‘끌어안음’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체로서 뇌는 몸에 의존적이지만 몸 전체를 ‘공존의 상황’으로 끌어안아 유지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상과학의 수준에서 말하면, 뇌는 몸을 옮겨다니며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찾고 몸을 통제할 수도 있지만, 몸 없이는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꼼짝없이 먹힐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명의 종결을 뇌사로 규정하는 데에 물음표를 찍을 수도 있다. 반면 간이나 심장을 이식받으면 동일한 사람일 테지만 뇌를 이식받는다면 다른 사람이라는 가설적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뇌 이식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물음표이다.

    뇌는 ‘따로 또같이’ 인 네트워크
    인간의 주체도 하나이기보다
    견제-균형시스템 자치가 아닐까

    ● 뇌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매혹적인 탐구 과제이기도 하다. 뇌에 대한 가설이 많은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 가운데 ‘뇌가 뇌 스스로를 위해’ 발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 뇌는 쾌감을 느끼며 쾌감을 위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독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약에 중독되면 몸은 망가지더라도 뇌는 지속적으로 마약을 요구한다. 이때에 뇌는 몸과 독립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명령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성행위를 원하는 것도 뇌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훌륭한 행위를 하는 것도 ‘뇌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던가, 몸을 아끼지 않는 순교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행동들은 뇌에 보람의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 박사는 이런 현상들을 “뇌가 보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해학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건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말을 패러디한 것 아니냐는 내 말에 그는 껄껄 웃었다. 나도 마주보고 웃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종교에 대한 불경의 태도는 아니다. 이는 한 분야의 과학자가 자기 사고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어디까지 펼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 이 무렵에 우리는 하늘의 비유에서 땅의 현실로 내려왔다. 실험실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뇌의 작용기전에 관한 신경과학 및 유전학 연구를 통해 뇌 기능에 관한 중요한 발견을 계속해 오고 있다. 신경세포 안의 칼슘 농도를 높게 유지하자 쥐의 학습능력과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 이른바 ‘똑똑한 생쥐’를 개발했으며, 티(T)-형 칼슘통로 유전자가 결손된 생쥐의 생리기능 연구를 통해 뇌가 외부의 자극을 능동적으로 선별 조절할 수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실용적 차원에서 간질 치료나 획기적인 진통제 개발의 가능성과 연관돼 있다.

    실험실 한 쪽에는 출입이 통제된 작은 방이 있는데, 그 안에 실험 대상인 생쥐들을 다양하게 분류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데 쥐를 통한 연구가 갖는 한계를 짚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뇌가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연구의 출발점에 두고 있다. 인간 뇌가 복잡 시스템이라는 것은 뇌의 각 부분 세포의 종류와 배열이 다르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주관은 객관, 객관은 주관으로

    이는 간, 신장, 심장 등의 기관과 매우 다른 점이다. 같은 뇌세포라도 그것을 보조하는 교화세포의 구성이 다르다. 이는 뇌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한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이 영역들이 독립체가 아니라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 계층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는 뇌가 하나의 슈퍼컴퓨터라는 입장을 비켜가는 듯했다. 오히려 뇌는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들의 세밀하면서도 광대한 병렬 네트워크라는 입장인 것 같았다.

    뇌의 각 부분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들이라면 앞서 언급했듯이 뇌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특정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부분이 견제하고 감시할지 모른다. 따라서 ‘뇌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몸을 속이고 있구나’ 하는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 이런 과학적 가설들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하나의 견고한 주체라는 게 가능할까. 아니면 다양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자체를 주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아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복수의 자아가 발현하는 것을 상징하지 않을까.

    뇌 연구는 출발부터 다학제적일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의 대상은 이미 그 학문을 초월해 있다. 다만 그 학문이 다른 학문 분야들과 엮은 네트워크의 어딘가에 걸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어디를 추적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대화의 마무리에 그는 성철스님의 법어집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能隨境滅 境逐能沈 境由能境 能由境能)”. 뇌과학자가 이런 ‘논리의 맴돌이’에서 마음이 갈 길을 찾는 것은 뇌 연구가 결국 인간의 자아 탐구라는, 어렵지만 손을 놓을 수도 없는 과제라는 것을 일러준다.

    김용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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