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미로’서 ‘자아의 지도’ 찾는다


△ (왼쪽으로부터) 신희섭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박사
· 생체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 분자생물학적 뇌 연구· <사이언스> 등에 다수 논문 발표
김용석 영산대 교수(철학)
·서양철학, 문화론 연구 ·저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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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연구 발자취
  • ① 우주론에서 ‘창조신화’를 만나다
  • ② 자연을 거슬러 자연을 꿈꾸다

  •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우렁쉥이는 커서 안착하면 뇌 소멸
    인간뇌 복잡성은 인간삶 암시
    마약도 순교도 뇌 즐거움 때문

    “인간 삶에서 뇌가 모든 것이라는 입장이신가요?”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만난 신희섭 박사는 담담히 되물었다.

    인문학자인 내가 뇌에 대한 과학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때, 마음이 뇌이고 뇌가 곧 마음이라는 것이 오늘날 뇌과학의 근본 입장이 아닌가 하고 물었을 때, 그리고 우리말의 ‘마음’(心)은 심장을 떠올리지만 서양말 ‘마인드’는 사유의 의미를 어원에 담아 뇌를 떠올리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실험실 방문에 앞서 대화로 시작되었다. 나는 대화가 잘 되리라고 직감했다. 과학자인 그는 오히려 과학주의적이고 ‘뇌 환원주의’적일 수 있는 내 말에 일단 제동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는 우선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는 것으로 뇌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해면동물은 신경 없이 세포가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를 이룬다. 이런 생물은 간단하지만 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물은 뇌가 필요 없다(식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렁쉥이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유생 때에만 뇌를 갖고 있다. 다 자라면 한 곳에 들러붙어 바닷물에 있는 미립자를 먹이로 걸러 먹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더 이상 필요 없는 뇌는 소멸한다.

    인간처럼 운동뿐만 아니라 상호관계, 판단, 의사결정 등을 위해서는 당연히 더 복잡한 뇌가 필요하다. 따라서 삶은 복잡하지만 덜 편할 수 있다. 덜 편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일지도 모른다. 신 박사의 과학적 설명에 자연스레 인간과 인생을 보는 지혜가 스며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불교의 참선에 관심 있다는 건 아마 ‘부동의 편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결국 뇌를 가상적으로 작동 없는 상태로 둔다는 뜻이 아닐까. 이는 또한 ‘부동을 즐기는 존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연관되지 않을까.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


    △ 철학자 김용석 교수와 뇌신경과학자 신희섭 박사가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안 신 박사의 실험실에서 두툼한 인간 뇌지도 책을 보면서 뇌와 마음에 관한 철학과 과학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그러고 보면 진화의 역사에서 뇌가 주인공이 된 건 얼마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진화에는 ‘창발적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포유류의 출현에서 이런 진화 과정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창발성은 진화의 각 단계가 여러 요인의 단순한 총화가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성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창발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뇌는 몸에 대해 ‘기댐’과 ‘끌어안음’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체로서 뇌는 몸에 의존적이지만 몸 전체를 ‘공존의 상황’으로 끌어안아 유지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상과학의 수준에서 말하면, 뇌는 몸을 옮겨다니며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찾고 몸을 통제할 수도 있지만, 몸 없이는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꼼짝없이 먹힐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명의 종결을 뇌사로 규정하는 데에 물음표를 찍을 수도 있다. 반면 간이나 심장을 이식받으면 동일한 사람일 테지만 뇌를 이식받는다면 다른 사람이라는 가설적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뇌 이식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물음표이다.

    뇌는 ‘따로 또같이’ 인 네트워크
    인간의 주체도 하나이기보다
    견제-균형시스템 자치가 아닐까

    ● 뇌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매혹적인 탐구 과제이기도 하다. 뇌에 대한 가설이 많은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 가운데 ‘뇌가 뇌 스스로를 위해’ 발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가설이 있다. 뇌는 쾌감을 느끼며 쾌감을 위한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독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약에 중독되면 몸은 망가지더라도 뇌는 지속적으로 마약을 요구한다. 이때에 뇌는 몸과 독립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명령을 내린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성행위를 원하는 것도 뇌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간이 훌륭한 행위를 하는 것도 ‘뇌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던가, 몸을 아끼지 않는 순교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행동들은 뇌에 보람의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 박사는 이런 현상들을 “뇌가 보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해학적 기질을 발휘했다. 그건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말을 패러디한 것 아니냐는 내 말에 그는 껄껄 웃었다. 나도 마주보고 웃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종교에 대한 불경의 태도는 아니다. 이는 한 분야의 과학자가 자기 사고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어디까지 펼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 이 무렵에 우리는 하늘의 비유에서 땅의 현실로 내려왔다. 실험실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뇌의 작용기전에 관한 신경과학 및 유전학 연구를 통해 뇌 기능에 관한 중요한 발견을 계속해 오고 있다. 신경세포 안의 칼슘 농도를 높게 유지하자 쥐의 학습능력과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내 이른바 ‘똑똑한 생쥐’를 개발했으며, 티(T)-형 칼슘통로 유전자가 결손된 생쥐의 생리기능 연구를 통해 뇌가 외부의 자극을 능동적으로 선별 조절할 수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실용적 차원에서 간질 치료나 획기적인 진통제 개발의 가능성과 연관돼 있다.

    실험실 한 쪽에는 출입이 통제된 작은 방이 있는데, 그 안에 실험 대상인 생쥐들을 다양하게 분류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데 쥐를 통한 연구가 갖는 한계를 짚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뇌가 ‘복잡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연구의 출발점에 두고 있다. 인간 뇌가 복잡 시스템이라는 것은 뇌의 각 부분 세포의 종류와 배열이 다르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주관은 객관, 객관은 주관으로

    이는 간, 신장, 심장 등의 기관과 매우 다른 점이다. 같은 뇌세포라도 그것을 보조하는 교화세포의 구성이 다르다. 이는 뇌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한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이 영역들이 독립체가 아니라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 계층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는 뇌가 하나의 슈퍼컴퓨터라는 입장을 비켜가는 듯했다. 오히려 뇌는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들의 세밀하면서도 광대한 병렬 네트워크라는 입장인 것 같았다.

    뇌의 각 부분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영역들이라면 앞서 언급했듯이 뇌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특정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부분이 견제하고 감시할지 모른다. 따라서 ‘뇌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몸을 속이고 있구나’ 하는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 이런 과학적 가설들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하나의 견고한 주체라는 게 가능할까. 아니면 다양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자체를 주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아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복수의 자아가 발현하는 것을 상징하지 않을까.

    뇌 연구는 출발부터 다학제적일 필요가 있다. 모든 학문의 대상은 이미 그 학문을 초월해 있다. 다만 그 학문이 다른 학문 분야들과 엮은 네트워크의 어딘가에 걸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어디를 추적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대화의 마무리에 그는 성철스님의 법어집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能隨境滅 境逐能沈 境由能境 能由境能)”. 뇌과학자가 이런 ‘논리의 맴돌이’에서 마음이 갈 길을 찾는 것은 뇌 연구가 결국 인간의 자아 탐구라는, 어렵지만 손을 놓을 수도 없는 과제라는 것을 일러준다.

    김용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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