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한겨레21.

국보급 캐릭터의 창조자, 포터

[김재희의 여인열전]

▣ 김재희/ <이프> 기획위원 franzis@hanmail.net

성공한 캐릭터는 오늘날 국보급 가치를 갖는 문화 콘텐츠이다. <해리 포터>나 <포켓몬> 같은 콘텐츠 하나를 개발하려고 각국에서는 국가적 지원을 쏟아붓는 실정이다. 영국과 미국 등 영어권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의 고전 ‘피터 래빗’, 그리고 미키마우스보다 훨씬 먼저 태어난 ‘글로체스터 양복쟁이’ 생쥐들은 어느덧 100살이 넘었는데, 이들은 진작부터 디즈니에서 탐내던 영국의 국보급 캐릭터이기도 하다.


△ (사진/ Rex Features)

이들을 창조한 비어트릭스 포터(1866~1943)는, 산업혁명 이후 면방직 공업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부를 획득한 신흥 졸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겉으로는 왕족처럼 한 무리 하인을 거느리고 계절 따라 곳곳에 널린 별장으로 유람을 가는 쾌적하고 화려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실은 괴팍한 부모 밑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겪어야 했다. 오죽하면 열네살부터 자기만 아는 글자를 만들어 비밀일기를 써야 했으리.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인데다 바깥 세상과 차단된 음산한 저택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며 그녀의 관심은 풀과 버섯과 벌레, 도마뱀과 개구리, 생쥐와 그 먹잇감 같은 소소한 생명들에 쏠렸다. 시시때때 이들을 그리며 국보급 토끼를 그리는 솜씨를 키운 셈이다. 사춘기 무렵 그녀를 돌봐주던 애니 언니가 시집가서 낳은 아이들에게 보낸 카드에 담긴 소박한 필치의 생쥐와 토끼들은 아직도 그대로 살아, 전세계 어린이들의 공책과 필통, 심지어는 부엌과 욕실에서 쓰는 플라스틱 물건에도 그 정겨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대모 격인 비어트릭스는 사후에도 전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엄청난 저작권료를 통해 지금껏 놀라운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건 마흔이 되어 만난 첫사랑마저 부모의 반대로 떠나보낸 그녀가, 그림을 팔아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진 뒤, 자신의 출신과는 거리가 먼 깡촌 마을 농부로 거듭나며 시작한 사업이기도 하다.

산업화의 바람과 함께 영국의 농촌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자, 이에 맞선 지역 인사들이 뜻을 모아 자연보존운동, 이른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40대 후반 드디어 부모의 손을 빠져나와 도시내기의 면모를 벗고 덥수룩한 양치기 아줌마로 변신한 비어트릭스는, 시골에서 만난 듬직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1943년 77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30년 세월, 꾸준히 그림을 그려 책을 만들어 팔아 그 수입으로 주변의 땅을 사들여 본래의 아름다운 시골 모습을 지켜가며, 사진을 찍듯 섬세한 손길로 이 지역의 면면을 그려놓았다.

비어트릭스가 자연보존협회에 기증한 500만평이 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땅과 농장, 저택은 그녀의 그림에 기록된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피터 래빗의 어머니가 살았던 자연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아주 특별한 관광지로, 지속 가능한 경제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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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opinion/200502/25/200502251814255401100010101012.html

[삶과 문화] 내 소설 속의 그녀

고 이은주씨의 영면을 빌며

1994년 겨울 어느 밤, 아는 이의 전화를 받았다. 뭘 쓸까를 고민하는 친구에게 나는 "나라면 트렁크에 갇히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쓰겠어" 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한강변에서 만난 두 남녀가 장난삼아 폐차의 트렁크로 들어간다. 불륜을 좀더 극적으로 만들려는, 그저 장난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트렁크의 문을 닫아버린다. 비 내리는 11월의 한강변. 아무도 오지 않고 그들은 거기에서 절망적으로 정사를 벌이고 그러면서 죽어간다. 알고 보니, 많은 것이 남자의 예상과 달랐다. 아내는 레즈비언이었고 정부는 양성애자이고 자기는 바보였다는 이야기. 동이 틀 무렵에는 이미 초고가 끝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그 단편으로 등단해 작가가 됐다.

10년 뒤인 2004년 가을, 부산영화제에서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를 만났다. 그 소설과 다른 한 편의 판권을 사고 싶다고 했다. 몇 달 뒤 계약을 했다. 그러고는 서로의 일에 열중하느라 접촉이 없었다. 영화는 영화대로 굴러갔고 나는 나대로 살았다. 가끔 연예가 뉴스를 통해 소식은 들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변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우편으로 보내줬다. 제목은 원작과 달리 '주홍글씨'였다. 나는 읽지 않았다. 시나리오라는 게 읽기 쉬운 물건이 아니기도 하고 읽어봐야 별 소용도 없을 터였다. 영화는 감독의 것이니까.

시사회가 여러 차례 열렸지만 이상하게 때가 잘 맞지 않아 결국 나는 개봉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우리 동네의 복합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내 소설이 원작인 영화를 보는 것은 두 번째였고 TV 단막극까지 합하면 모두 네 번째 보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어색하고 낯선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인물들이 구체적인 모습과 음성, 자세와 표정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지난밤의 악몽을 현실에서 마주치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쩌면 그것은 변형된 데자부와 닮았기도 하다. 나는 그 인물들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내 바깥으로 나갔는지는 알고 있다. 영화는 두 소설을 섞은 것이고 감독이 추가한 부분도 있어 소설과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정부의 직업이 재즈 가수라는 설정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희라는 그의 이름, 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묘한 상황은 10년 전의 어느 날 밤, 내 머릿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설정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느 날 밤, 나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어떤 인물이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존재가 돼 스크린 속에서 배회하는 것을 목격하는 일의 생경함에 대해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 이은주씨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며칠 동안 아무 일도 못하다가 아무래도 이 일에 대해 쓰지 않고는 안 되겠다 싶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누구도 10년 전 나의 골방에서 잉태된 어두운 상상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배우로 하여금 그 배역에 몰입하도록 만든 감독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아마도 나와 감독,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이도 무죄일 것이다. 그러나 저 젊은 여배우의 죽음에 모두가 무죄라는 결론은 이상하게 부당해 보인다. 스크린 속의 요정이 사실은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존재이고 다치거나 죽으면 119구조대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놓고 상상하고 비난하고 숭배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무책임의 전력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양심 안에서 유죄다.

고인의 영면과 명복을 빈다. 부디 안녕히 잘 가시라.

김영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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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사과나무
김성주 지음 / 더북컴퍼니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설에 집에 갔다가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와 마트에 갔다.

엄마가 사라고 적어준 것들을 카트에 넣고 과자 부스러기들을 사러 움직이는데 아빠가 책 코너에 가서 이 책을 고르고 계셨다. 예전에 엄마도 이 책을 보고 싶어하셨던 기억이 나서 아빠한테 사달라고 했다. 다 커도, 아빠한테 무얼 사달라고 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알라딘에서 샀으면 900원 싸게 샀겠지만 아빠랑 책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책 얘기를 하는 즐거움은 900원 어치보다 더 크니까, 비싸게 산 건 아니다.

<사과나무> TV 프로는 가끔 보았다. 그런데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이 너무 안되었고, 대단하고, 그러다 보니 눈물도 나서 찾아서 보지는 않았다. 책은 그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 김성주 아나운서는 말솜씨도 조곤조곤 하지만 글솜씨도 그에 못지 않다. 아픔을 이기고 장애를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름다웠지만, 소설가 김훈 님과 한솔교육 사장님의 이야기도 좋았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웃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김성주 아나운서 본인의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종교나 인생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며 보냈을 청년시절도 연상되고 지금도 매 순간 '마지막 한숨은 남겨두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눈에 그려진다. 무슨 일을 하든지 천직으로 알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보고나니 나도 좀 진지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집에 두고 왔으니 아빠랑 엄마도 다 읽으셨겠다. 다음에 집에 가서 도란도란 이 책 얘기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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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박정현 5집을 즐겨듣는다. 이제 또 3년은 들어야 되는 거야? ^^

 

어제는 신년하례를 하러 교수님 댁에 다녀왔다. 어느덧 랩에서 뒹군지도 올해로 7년째. 학생중에 최고년차가 되어서 무게잡으려고 노력하지만 오랜만에 본 선배들 앞에서는 다시 어린 양이다. 서른까지만 귀여운 척하고 그 담부터는 의젓하리라.

설 연휴 전에 책꽂이에서 책을 좀 솎았다. 10여권을 들어다 과학도서관에 던져 주고 돌아오는 길에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코를 묻고 길을 걷는 총각을 보았다. 물리과로 쑥 들어가던데. 뒤통수가 귀여웠다.

연말에는 충격적인 사건들도 있었다. 한 다리 건너 잘 아는 친구의 갑작스런 사고, 또 다른 후배의 안좋은 소식. 내일 일을 모른다는 게, 인생의 진실인가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도록. RE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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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시네21

 

거짓없는 진실 때문에 사랑이 멈춘다, <클로저>

진실은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거짓에 상처받은 연인들은 진실이 마음을 치유해주리라고 믿지만, 차라리 흉터가 되도록 참고 참아야 했는데, 라고 진실을 듣는 순간에야 후회한다. 그 남자하고 잤어? 나보다 좋았어? 몇번이나 오르가슴을 느꼈지? 당신은 내 삶을 무너뜨렸어. 순결할 것만 같던 진실은 치졸한 의심으로 튀어나와 상처를 후벼파고, 자해나 마찬가지인 그 순간, 환상은 깨지고 사랑은 증발한다. 일흔 넘은 노장 마이크 니콜스가 연출한 <클로저>는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는 그 난투의 순간을 눈치채는 영화다. 니콜스는 “우리는 사랑의 처음과 끝만을 기억하고 그 중간은 편집해버린다. 거기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겨난다. 우리는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 삶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는가”라는 말로 <클로저>를 설명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단 하나를 알아보았다고 해도 그 관계가 무너지는건 순식간이다. 최소한 순식간이었다고 기억된다.

작가를 꿈꾸는 런던의 부고담당 기자 댄(주드 로)은 거리에서 만난 앨리스(내털리 포트먼)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같이 살기 시작한다. 그는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일했던 앨리스와의 관계를 에로틱한 소설로 써서 출판하기에 이른다. 책에 들어갈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간 댄은 남편과 별거 중인 미국인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만난다. 또다시 첫 만남에서 사로잡힌 댄은 안나에게 구애하지만, 앨리스의 존재를 알게 된 안나는 매몰차게 그를 거절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피부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와 결혼한 안나는 오랫동안 물리쳐온 댄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실을 래리에게 고백한다. 댄과 안나는 함께 있으면서도 지난 관계를 떨치지 못한다.

1997년 원작 희곡을 발표한 작가 패트릭 마버는 그들이 진정 사랑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작품을 러브스토리라고 규정했다. “여기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성적인 질투, 남성적인 시선,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 하지만 이건 결국 단순한 러브스토리고, 대부분의 러브스토리가 그렇듯, 엇나가고 만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독하게도 엇나간 나머지 어느 순간 경쟁과 복수에 압도당하기 시작한다. 버려진 남자의 마음속에 그녀가 아닌 그 남자가 들어앉아 행동의 방향타를 쥐게 된 것이다. 래리는 점점 더 강한 파장으로 댄이 맺는 관계에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을 단련시키고 변화시킨다.


<졸업>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으로 숱한 관계를 탐구해온 마이크 니콜스는 눈물로 치장해야 마땅할 이별의 순간에도 본능을 파고든다. 틈을 주지 않고 안나를 추궁하는 래리는 처음엔 사랑으로 호소하지만, 안나와 댄의 섹스를 캐고들면서, 육체적인 폭력에 가까운 분노를 터뜨린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하고 래리보다는 유약한 댄도 다를 바가 없다. 안나가 댄과 잤는가, 그뒤엔 안나가 래리와 잤는가, 마지막으로 앨리스가 래리와 잤는가. 두 남자가 묻고 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 질문들은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고, 두 남자와 두 여자가 형성했던 폐쇄적인 원을 무너뜨린다. 그들은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사랑하기를 그만둔, 앨리스 같았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나는 댄 앞에서는 참고 있던 앨리스의 눈물을 사진으로 폭로했고, 래리는 앨리스의 진실을 거짓이라 비난했고, 댄은 오만하게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코미디로 분류되는 원작과 달리 묵직한 <클로저>는 섬광 같은 첫 만남과 질식할 것처럼 답답한 이별만이 존재하는 영화다. 그들이 행복했던 시절은 말로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서 짐작을 더해야만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댄은 정말 앨리스를 사랑했고 그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안나를 사랑했을까. 그는 어쩌면 끊임없이 사랑을 시작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클로저>는 그처럼 만들어지는 영화다. 자막이나 암시없이 시간은 도약하고, 사랑하는 과정없이 만남과 헤어짐만 있고, 닫힌 공간에 고립된 남자와 여자는 목격하지 못한 사건을 두고 서로의 마음을 할퀸다. 그 때문에 “나는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에 관심이 없고, 이 영화의 어느 누구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관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볼 것이다.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라는 마이크 니콜스의 부연은 감독이 흔히 하는 공치사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클로저>처럼 모호하고 정적인 영화에서 신경질적인 긴장이 배어나오는 건 글자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마이크 니콜스의 노련한 손길에 더해 네 배우의 상호작용 탓이 크다. 이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인물은 래리와 댄, 안나, 앨리스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인이 모르도록 부정한 눈길을 주고받고, 온갖 감정이 들어차서 폭발하려는 원을 내리누르고, 그 많은 대사로도 하지 못한 말을 눈동자로 대신한다. 마이크 니콜스는 그들 사이에 놓인 공기만으로도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한달 동안 네 배우와 리허설을 했다. 그 덕분인지 내털리 포트먼을 비롯한 네명의 배우는 스크린에 보이지 않을 때도 언제나 존재감을 유지한다. 악을 쓰며 싸우는 래리와 안나의 거실 어딘가에서 댄의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시나리오와 연출과 연기가 서로의 영역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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