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joins.com/opinion/200502/25/200502251814255401100010101012.html

[삶과 문화] 내 소설 속의 그녀

고 이은주씨의 영면을 빌며

1994년 겨울 어느 밤, 아는 이의 전화를 받았다. 뭘 쓸까를 고민하는 친구에게 나는 "나라면 트렁크에 갇히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쓰겠어" 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한강변에서 만난 두 남녀가 장난삼아 폐차의 트렁크로 들어간다. 불륜을 좀더 극적으로 만들려는, 그저 장난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트렁크의 문을 닫아버린다. 비 내리는 11월의 한강변. 아무도 오지 않고 그들은 거기에서 절망적으로 정사를 벌이고 그러면서 죽어간다. 알고 보니, 많은 것이 남자의 예상과 달랐다. 아내는 레즈비언이었고 정부는 양성애자이고 자기는 바보였다는 이야기. 동이 틀 무렵에는 이미 초고가 끝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그 단편으로 등단해 작가가 됐다.

10년 뒤인 2004년 가을, 부산영화제에서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를 만났다. 그 소설과 다른 한 편의 판권을 사고 싶다고 했다. 몇 달 뒤 계약을 했다. 그러고는 서로의 일에 열중하느라 접촉이 없었다. 영화는 영화대로 굴러갔고 나는 나대로 살았다. 가끔 연예가 뉴스를 통해 소식은 들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 변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우편으로 보내줬다. 제목은 원작과 달리 '주홍글씨'였다. 나는 읽지 않았다. 시나리오라는 게 읽기 쉬운 물건이 아니기도 하고 읽어봐야 별 소용도 없을 터였다. 영화는 감독의 것이니까.

시사회가 여러 차례 열렸지만 이상하게 때가 잘 맞지 않아 결국 나는 개봉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우리 동네의 복합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내 소설이 원작인 영화를 보는 것은 두 번째였고 TV 단막극까지 합하면 모두 네 번째 보는 것이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어색하고 낯선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인물들이 구체적인 모습과 음성, 자세와 표정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지난밤의 악몽을 현실에서 마주치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쩌면 그것은 변형된 데자부와 닮았기도 하다. 나는 그 인물들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내 바깥으로 나갔는지는 알고 있다. 영화는 두 소설을 섞은 것이고 감독이 추가한 부분도 있어 소설과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정부의 직업이 재즈 가수라는 설정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희라는 그의 이름, 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묘한 상황은 10년 전의 어느 날 밤, 내 머릿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설정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느 날 밤, 나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어떤 인물이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존재가 돼 스크린 속에서 배회하는 것을 목격하는 일의 생경함에 대해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 이은주씨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며칠 동안 아무 일도 못하다가 아무래도 이 일에 대해 쓰지 않고는 안 되겠다 싶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누구도 10년 전 나의 골방에서 잉태된 어두운 상상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배우로 하여금 그 배역에 몰입하도록 만든 감독에 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아마도 나와 감독,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이도 무죄일 것이다. 그러나 저 젊은 여배우의 죽음에 모두가 무죄라는 결론은 이상하게 부당해 보인다. 스크린 속의 요정이 사실은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존재이고 다치거나 죽으면 119구조대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놓고 상상하고 비난하고 숭배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무책임의 전력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양심 안에서 유죄다.

고인의 영면과 명복을 빈다. 부디 안녕히 잘 가시라.

김영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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