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뜨루가쯔끼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을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감독 알렉산드르 소꾸로프는 형제가 마음에 들어한 대본을 제끼고 영화학교 시절부터 함께 했던 아라보프의 대본 <일식의 나날들>을 선택했다고 한다. 워낙 아트시네마의 거장이니 그 정도는 용서해드려야 하겠지...만, 그동안 미뤄놓고 못 읽었던 원작 번역본을 어제 읽었는데... 하... 원작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다. 스뜨루가쯔끼 형제의 팬이 될 듯. 그리고 소꾸로프의 영화를 한 번 보면 이 감독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식의 나날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원작과 영화는 주인공 이름과 배경이 무시무시하게 더운 여름날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제로다.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을 읽다가 몇 군데 오역을 발견했다.  

우선 오역은 아니고, 러시아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원작 텍스트를 보면 부제로 <이상한 정황 하에 발견된 원고>라고 붙어있는데 이 부분이 번역본에서는 없어서 실수로 누락된 것인지, 고의적으로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 역자 후기를 보면 번역 대본으로 YMCA-Press에서 1984년에 출판된 책을 사용했다고 했는데 번역 대본 자체에 원작에 손을 본 곳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본문 중에 외국 작가 이름 두 개가 나오는데 번역본에서는 그 이름이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YMCA-Press는 혁명후 서유럽으로 탈출한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어 책들을 서유럽에서 출판하기 위하여 설립한 출판사다. 솔제니찐 책들도 아마 여기서 처음 출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하나, 원작을 보고 처음에 이상한 느낌을 받은 부분은 1, 2, 3... 이렇게 나뉘어진 각 장의 시작과 끝이 말줄임표(한국어에서는 말줄임표를 여섯 개 찍지만 러시아어로는 세 개를 찍고, 아래한글에서는 말줄임표를 대충 몇 개 찍으면 자동으로 줄 가운데 점 여섯 개 + 마침표로 바꿔버린다)로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장의 내용 전체가 인용부호로 묶여 있다. 그게 내용전개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 같지만 원작의 구성적 내용이 번역본에서는 사라져 있어서 살짝 아쉽다.  

 

1) 오역은 아니고 편집과정에서 오타가 나온 것 같은 부분은,  

천엽 즙에 절인 연어, 그리고 해묵은 껍질에 싸여 있는 햄.  

15쪽

'천엽 즙'이 아니라, '천연 즙'이다.  올리브유나 포도주에 절인 연어가 아니라 연어 자체에서 나온 즙으로 절인 연어라는 말이다.  

 

2) 주인공의 친구 바인가르텐이 말끝마다 붙이는 '동지', '동지들'이란 말이 이상해서 원작을 보니 'отец'이란 말이었는데, 이 말은 '동지'처럼 정치적 함의가 들어가는 단어가 아니라 그냥 친한 중년 남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허물없이 부를 때 쓰는 말이라서... '동지'는 적절한 선택이 아닌 것 같다. 

 

3)  

   
 

보기 드문 미인인 그의 아내 스베따는 이미 오래 전에 남편의 바람기에 대해 포기했다. 특히 그가 공공연한 장소에서 아내를 구박하고 부부 싸움을 하는 걸 즐기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안 뒤에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89쪽 

Светка, женщина исключительно красивая, но склонная к меланхолии, давно махнула на него рукой, тем более что он в ней души не чаял и постоянно дрался из-за нее в общественных местах.

원문을 직역하면,   

"보기 드문 미인이지만 우울증 내력이 있는 그의 아내 스베따는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이런 성격에 신경을 끈 상태였다. 아내를 끔찍히 사랑하는 그는 공공장소에서 그녀 때문에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곤 했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의 친구 바인가르텐을 말하는데, 그가 정열적인 삶을 살며 여자를 사귈 때도 저돌적이었다는 성격 묘사를 하는 장면이다. '그녀 때문에' 싸운다는 부분이 '부부 싸움을 즐기는' 것으로 오해되어 원문에는 없는 바인가르텐의 '바람기'까지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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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사모은 VHS 영화 테이프들이 꽤 되었다. 백 개쯤은 솎아내서 세탁기 설치하러 왔던 아이(처음 불렀을 때는 아버지랑 같이 왔는데, 정작 설치하는 날엔 혼자 왔다. 한 18~19살 정도 돼 보이던...)에게 "이 테이프들 좀 가져갈래요?" 했더니 뻘쭘해하면서 "얼마에?"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냥 가져가. 난 필요없거든." 했더니 거의 설치비 받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좋아라하며 들고 갔다. 이틀인가 후 이 아이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애가 그날 이후로 집에 안 들어오는데 혹시 모르냐, 고. 그걸 내가 알리 없지만, 짐작에 친구집에라도 가서 그 많은 영화들을 밤을 세워가며 봤을 거 같다. 아님 말구.  

그렇게 솎아내고도 꼭 간직하고 싶은 영화들을 우체국에 들고가 한국으로 부쳤다. 내 기억에 책은 5킬로 단위로 포장하는데 비디오테이프는 2킬로 단위로 포장해야 했다. 그때 택시탈 돈도 없어서 집에서 우체국까지 거의 1킬로 넘는 거리를 근 한 달을 책을 지고 날랐다. 그 우체국 직원이 우리 하숙집 주인 나따샤 친구였고, 우리 아파트 뒷 동에 살았는데, 그 날 내가 잔뜩 책을 짊어지고 우체국 문을 밀고 들어갔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야, 야, 이리 다 갖고와봐. 도대체 얼마나 지고 온 거야?" 하고 저울에 가져온 책을 차례로 올려놓고 재보았더니 도합 25킬로였다. 그때 나는 내가 괴력의 소유자임을, 아니 돈이 없으니 별 짓이 다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한 달인가 두 달 쯤 후에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세관에서 비디오테이프들을 압수해놓았다는 것이었다. 테이프가 너무 많아서 취미용이라고 보기 힘들고 상업용이라고 판단하여 세금을 물거나 테이프 중에 몇 개만 와서 가져가라는 소리였다. 암튼 여차여차해서 테이프들을 모두 찾아왔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 비디오플레이어는 이미 버린 후였고, 사연많은 테이프들은 아직도 박스안에서 잠자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러시아어로 더빙된 <러시아 하우스>다. 다음 영화 다운로드에 가보아도 없고, 유튜브를 찾아보아도 없다. 오늘같이 비오는 날 보고 싶은 영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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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0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학간 하숙집 주인분 이름이 나타샤인것을 보니 사타님 러시아로 유학가셨나봐요? 러시아 하우스 숀 코넬리 주연인데 저도 이영화를 봤지만 내용이 가물가물 하네요^^

Sati 2011-08-10 00:09   좋아요 0 | URL
네, 이 영화 본 게 91년 모스크바인 관계로 영화의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져서 그런지 가끔 생각나는 영화네요. 미셸 파이퍼가 '포 괄 적'이란 단어를 러시아어로 발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요.
 

 

 

 

 

 

 

 

        

 

 

분수 (198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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