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사모은 VHS 영화 테이프들이 꽤 되었다. 백 개쯤은 솎아내서 세탁기 설치하러 왔던 아이(처음 불렀을 때는 아버지랑 같이 왔는데, 정작 설치하는 날엔 혼자 왔다. 한 18~19살 정도 돼 보이던...)에게 "이 테이프들 좀 가져갈래요?" 했더니 뻘쭘해하면서 "얼마에?" 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냥 가져가. 난 필요없거든." 했더니 거의 설치비 받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좋아라하며 들고 갔다. 이틀인가 후 이 아이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애가 그날 이후로 집에 안 들어오는데 혹시 모르냐, 고. 그걸 내가 알리 없지만, 짐작에 친구집에라도 가서 그 많은 영화들을 밤을 세워가며 봤을 거 같다. 아님 말구.  

그렇게 솎아내고도 꼭 간직하고 싶은 영화들을 우체국에 들고가 한국으로 부쳤다. 내 기억에 책은 5킬로 단위로 포장하는데 비디오테이프는 2킬로 단위로 포장해야 했다. 그때 택시탈 돈도 없어서 집에서 우체국까지 거의 1킬로 넘는 거리를 근 한 달을 책을 지고 날랐다. 그 우체국 직원이 우리 하숙집 주인 나따샤 친구였고, 우리 아파트 뒷 동에 살았는데, 그 날 내가 잔뜩 책을 짊어지고 우체국 문을 밀고 들어갔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야, 야, 이리 다 갖고와봐. 도대체 얼마나 지고 온 거야?" 하고 저울에 가져온 책을 차례로 올려놓고 재보았더니 도합 25킬로였다. 그때 나는 내가 괴력의 소유자임을, 아니 돈이 없으니 별 짓이 다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한 달인가 두 달 쯤 후에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세관에서 비디오테이프들을 압수해놓았다는 것이었다. 테이프가 너무 많아서 취미용이라고 보기 힘들고 상업용이라고 판단하여 세금을 물거나 테이프 중에 몇 개만 와서 가져가라는 소리였다. 암튼 여차여차해서 테이프들을 모두 찾아왔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 비디오플레이어는 이미 버린 후였고, 사연많은 테이프들은 아직도 박스안에서 잠자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러시아어로 더빙된 <러시아 하우스>다. 다음 영화 다운로드에 가보아도 없고, 유튜브를 찾아보아도 없다. 오늘같이 비오는 날 보고 싶은 영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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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0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학간 하숙집 주인분 이름이 나타샤인것을 보니 사타님 러시아로 유학가셨나봐요? 러시아 하우스 숀 코넬리 주연인데 저도 이영화를 봤지만 내용이 가물가물 하네요^^

Sati 2011-08-10 00:09   좋아요 0 | URL
네, 이 영화 본 게 91년 모스크바인 관계로 영화의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져서 그런지 가끔 생각나는 영화네요. 미셸 파이퍼가 '포 괄 적'이란 단어를 러시아어로 발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