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0년 남짓한 인터넷 서점의 역사에도 나름의 전설은 있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있다. 읽는 순간 장바구니 버튼을 클릭하게 했다는 리뷰의 달인, 출판사도 몰랐던 책의 미덕을 짚어내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는 선책選冊의 달인, 할인 쿠폰과 1+1 신공의 발명으로 무림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는 이벤트의 달인…. 제각기 자신만의 비기로 업계를 주름잡았던 이들이지만, 강호를 떠나며 남긴 말은 한결같았다. “이제 책을 읽고 싶다”는, 조금 쓸쓸한 그런 말.

  물론 이 자리에서 업계의 현실을 개탄할 생각은 없다. 사장님이 보실까 두려워서… 라기 보단, 책이 탄생한 이래 어느 시대나 상황은 마찬가지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독서의 전통이 고고하게 흐르는 나라, 프랑스의 모리스 블랑쇼는 언젠가 “비평가란 비非독자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피에르 바야르는 한 술 더 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썼다. (이에 비해 윤 모 선배가 쓴 <2주에 1권 책읽기>는 어찌나 순진한 기획인지!) 세계적 고수들의 사정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개 MD야 말할 것도 없겠다.

  물론 선량한 독자제위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책을 추천하는 MD가 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태도는 너무 데카르트적인 것이 아닌지? 악명 높은 심신이원론처럼 물物로서의 책보다 내용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명제를 떠올려 보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를 업계 용어로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 앞에 책이 있다” MD는 바로 그 책을 파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윤리란 책 자체와 관련된 것이지, 내용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거성 롤랑 바르트는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덧붙인다.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의 실례가 있다. 형형색색의 표지 속에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작업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을 보라. 제작비 4억, 제작기간 5년, 원고지 3만 6천여 매로 이루어진 명실상부한 ‘블록버스터’ 기획을 앞에 두고 나는 묻는다.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 (심지어 소설은 단 한권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또, 이토록 어여쁜 표지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스물다섯 권의 책을 책꽂이에 일렬로 꽂아 넣는 호사를 뿌리칠 자신이 내게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책은 보기에 좋은 책이다!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영화 속 졸부들이 하드커버 껍데기로 서재를 채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그런 당신을 위한 에코의 일화 :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에코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이런 현답이 있나!

  그래서 우리는, 서점을 서성이고 인터넷을 뒤지며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 책장에 오늘도 몇 권의 책을 꽂는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꿈꾸며, 즐거운 독서를 상상하며. 그러니 읽는 속도보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빠르다고 움츠려들지 말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사는 일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하물며 우리의 책꽂이는 넓고, 종말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 무비위크 403호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무용담은 물론 뻥이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이 업계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으니. 과거의 유산 따위 있을리 없다. 지젝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정도 될까. 저렇게 서두를 뗀 것은 순전히 저널리즘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ㅋㅋ)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자리에서 업계의 현실을 규탄할 생각은 없다. 사장님이 보실까봐 두려워서는 물론 아니다. (ㅋㅋ) 출판연감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책의 종수는 4만 여종. 블랑쇼의 "비평가는 非독자다" (위에서는 생략 되었지만) 모리스 나도의 "잡지나 신문사의 편집장은 제곱의 비독자다"라는 말에 절절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은, '책'으로 밥먹기를 선택한 자의 업보다. 아무 도리 없는.

그렇다면 MD란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패러디한 것은, 조금 우스운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냥 농담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사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라는 문제는, 책을 파는 사람에게 언제나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잘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인가? 좋은 책을 잘 팔리게 해야 하는가? 답은 요원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가장 그럴듯한 답은 그것이다. 우리 앞에 닭이 있으면 삼계탕을 먹고, 계란이 있으면 계란 후라이를 먹으면 된다!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는 탄생한다....... (농담이라고 쓸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A4 1장이 채 안되는 글임에도 수없이 많은 외국 이름과 인용이 등장한다. 이 블로그에 '인문MD'라는 타이틀을 걸고 글을 쓰게 된 이후 갖게 된 버릇. 불평도 많이 듣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중요한 점은 나 역시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거다. 어쨌거나 잘난 척은 아니라는 얘긴데... 이런, 글쓰기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를테면 벤야민의 몽타주 기법 같은 것. (ㅋㅋㅋㅋㅋ) 역사적 맥락에 의해 쓰여진 무엇을 아무 설명 없이 끌고 들어 오는 것. 쓰는 이는 물론 읽는 이 역시 정확하게 그것이 뭔지 몰라도 '흐흥, 재미있네' 하고 넘어가는 것. 이쯤 되면 재미 없다, 라는 반론이 나올 텐데...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진심입니다. 그런데 정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재밌다. 따라서 나는 <2주에 1권 책읽기>라는 윤 모 선배의 기획이 여전히 너무 나이브하다고 말하는 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데카트르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오바인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을 스피노자로 맺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데카르트가 등장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부분은 마음에 든다. "하물며 우리의 책꽂이는 넓고, 종말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이것이야말로 대인배의 자세! 물론 현실은 시궁창. 중고샵에서 긁어 버린 수십권의 책들이 우리 집 마루에는 여전히 쌓여 있고... 마야인에 의하면 종말도 머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러모로 고민 되는 요즘이다. (급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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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2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권 동시에 읽기>도 위 리스트에 끼워 넣고 싶군요.

무튼, 내가 책을 못 읽는 이유가 그거였나봐요. 나는 책팔이근성이 너무 강한거죠! 막 사는 속도는 자동찬데, 읽는 속도는 마차에요. 달그락달그락

활자유랑자 2009-12-21 13:36   좋아요 0 | URL
문화지체라는 말이 생각 나네요. 도덕 시간에 배웠던 거 같은데... 네이버를 찾아 보니 "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독서지체'?

우연아닌우현 2009-12-2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토록 솔직한 글 완전 사랑합니다. 저도 알라딘에서 많이 사긴 했는데! (억울해요!!!) 그래도 여느 인터넷 쇼핑 품목과 마찬가지로, 몇 번 책을 사고나면 소개글에 현혹되지 않는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는 겁니다. 다만, 그 때까지 초기 장벽에 부딪혀 책과 멀어지는 안타까운 중생들이 있다지요 'ㅂ'

활자유랑자 2009-12-22 15:14   좋아요 0 | URL
음, 적절한 말씀이세요.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2009-12-2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2 15:15   좋아요 0 | URL
혹시 문학MD님하고 헷갈리신 거 아닌가요? (농담)
기회가 닿으신다면... 말씀 좀 더 해주세요.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

2009-12-30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12-31 15:45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행(?)이에요. 약간 안도. ㅎㅎ
2010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 :)

아람 2009-12-2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ㅋㅋ글이 무척 재밌군요. 저널리즘적인 접근방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스피노자로 끝나는 글, ㅋㅋㅋ 누가 이러저러한 말을 했습니다, 라는 해석이 뒤따르지 않으면 전혀 이해 못 할 글이지만, 재밌어요. :-)

활자유랑자 2009-12-22 15: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갑자기 부끄럽네요...;
좀 더 깊이 들어가야겠어요.

하이드 2009-12-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 "

이 페이퍼가 자꾸 보여서, 결국 들어와 다시 한 번 댓글 남깁니다. ^^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요? 진짜 궁금해졌어요. 사는 사람 말고, 읽어내는 사람이요. 설마 손꼽을 정도는 아니겠지요? 우리나라 인구가 얼만데 (죄송합니다. 인구드립;ㅎ)


활자유랑자 2009-12-23 16:11   좋아요 0 | URL
기간을 정해 놓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향후 3년 간을 기준으로 놓고 생각하면... 손에 꼽을 수 있을지도? ; (일단 저는 읽을 생각이 없고요;)

엘 우즈 2010-02-16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솔직하고 재미있네요 *

활자유랑자 2010-02-16 19:15   좋아요 0 | URL
'현실적으로' 일주일에 수십권씩 출간되는 책을 읽을 수 없는 MD의 진심...입니다. T.T

valeria 2010-03-2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니홈피에 출처 밝히고 퍼가겠습니다. ^^ 좋네요.
www.cyworld.com/valeri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