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의 하루는 베스트셀러 순위를 체크하며 시작된다. 종합 순위가 먼저, 인문․사회․역사․과학이 그 다음이다. 스포츠 기자가 프로팀들의 순위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인문 분야를 관리하는 마음은 ‘엘롯기’(엘지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 기아 타이거스의 줄임말) 팬을 더 닮았다. 가장 유심한 것은 역시 종합 순위이고, 나는 엘지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를 바라듯 내 분야 책을 응원하지만 둘 다 꽤나 요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종합 순위에 속속 사회과학서들이 표지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재고는 준비되지 않았고 출판사도 마찬가지였지만 주문을 하고, 책을 찍는 와중에도 순위는 계속해서 올랐다. 20위 안에 몇 권씩 나타나나 싶더니 어느덧 종합 1위를 차지하는 책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6월 5일,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20에는 7종의 인문․사회과학서가 있다. 통계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과학의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치. 하지만 1위를 차지한 책은 다름 아닌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의 <여보, 나 좀 도와줘>이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언제나 내 분야 책이 1위를 차지하기를 바라마지 않았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고.

5월의 네 번째 토요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오후 다섯 시에 잠에서 깨 흐릿한 눈으로 핸드폰을 켠 후 물을 마셨다. 전원이 꺼진 사이에 몇 통의 전화가 온 모양이었지만 다시 전화하지는 않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식탁에 앉아 TV를 틀었다. 숙취가 있었고, 입 안은 텁텁했으며 TV는 지루했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수십 개의 채널을 돌아 MBC에 멈추어 설 때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눈을 비빈 후, 다시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얼마나 있었을까? 나는 핸드폰을 들어 나를 찾던 이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담배를 피웠다. “당신이 흘려보내는 오늘이 어제 죽은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하던 오늘이었다.” 같은 말에 감흥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내가 피는 이 담배가 누군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것이라는 생각엔 목이 메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가득 채워진 한 컵의 물과 표면장력을 그렸던 것 같다. 언제라도 넘칠 것 같은 불안함. 하지만 시간이 고요히 흘러준다면 언젠가는 증발되어 위태로움은 사라질 것이었다. 반면, 그것을 기어이 넘치게 하는 데에는 오직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 미세한 진동이어도 좋다. 결국 폭탄을 터트리는 것은 아주 작은 불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부질없는 생각이 바로 뒤를 이었다. 만약 그에게 담배가 있었다면. 어쩌면 그는, 마지막으로 한 ‘까치’정도는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담배 피는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니까 그는, 어딘가에 그를 위해 남겨진 마지막 한 개비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 망상의 끝에서 나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누가 그의 ‘돛대’를 앗아 갔을까? 라고. 물론 나는 답을 알지 못하고, 다시금 자리에 앉아 베스트셀러 순위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담당을 맡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일 종합 베스트 1위를 기록한 그 책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문득 생각이 물처럼 흘러 나를 부목처럼 이끈다. 그곳에서 나는 언제까지 1위를 기록할지, 몇 부나 더 주문해야 할지, 더 잘나갈 수 있는 관련도서는 없는지 생각하는 또 하나의 나를 본다. 다음번에 다시 1위를 기록하려면 무슨 일이 있어야 할까 무심히 상상하는 나를.

밥그릇의 무게가 가끔은 너무 아찔하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07



"내가 담당을 맡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일 종합 베스트 1위를 기록한 그 책"이라고 썼지만,
그 후로 내겐 한 권의 책과 하나의 달력이 더 생겼다.
10월 1주에 그 자리를 차지한 <성공과 좌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노무현 2010 달력>.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진보의 미래>는 애꿎게 2위에 머물러 있는 셈인데, 달력도 책도 모두 내 분야이므로 나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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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1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인문책이 20위안에 반 차지하는 세상이 왔으면..
그 땐 이놈으 세상이 이놈으 세상이 아니라야 할테니까 --;;
뭔소리래..

활자유랑자 2009-12-19 20:28   좋아요 0 | URL
이놈으 세상이 아니면 그놈으 세상인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