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엔 T 팬티가 뜬다고 한다. 4월 4일자 조*일보 경제면 기사다. 불황에 미니스커트가 뜬다는 이야기는 이미 상식을 넘어 고릿적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미니스커트 -> T 팬티의 환유는 독창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굳이 인터넷 기사의 표제를 그렇게 뽑은 이유는 무얼까? 

1. 불황 = T 팬티라는 므흣한 연상을 선물하기 위해서
2. 너무나 획기적인 뉴스라서
3. 클릭수를 위해
  

답은 뻔하고, 이 페이퍼의 제목도 같은 논리에 의해서 작성 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물론 불황에 뜨는 것이 T 팬티만은 아닌 모양이어서, 오늘 만난 우석훈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공황에는 사회적 담론들이 활발하게 생성되기 마련이고. 그것이 꼭 한 목소리로 모아질 필요는 없다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두 같이 공멸하는 것밖엔 안된다고. 사회적 담론의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는 뜻.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 책들을 앞에 늘어놓고 보자니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과연, 하고.  

꽤 선동적인 제목을 하고 있는 <혁명을 표절하라>의 원제는 <Do It Yourself : A Handbook for Changing Our World>. 지속 가능한 삶, 의사 결정, 건강, 교육, 먹을거리, 문화 행동주의, 자율 공간, 언론, 직접행동 등의 장을 통해 숨을 죄여오기만 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손으로 직접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단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들을 담고 있다. 원제의 제목은 적확하지만, 마음을 잡아 끄는 힘에 있어서는 번역서 제목이 더 좋다.  

이 책은 사회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나 정치 정당 혹은 운동 집단("우리에게 10파운드를 주시면 우리가 당신을 위해 세상을 지켜 줄께요"라는 식의)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방법에 대해 거창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세상의 잘못된 점에 대해(많은 훌륭한 책들이 이미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정부를 전복할, 혹은 정치적 권력을 잡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직면하는 도전들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그리고 정부나 기업들과 관계없이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 여는 글 '우리 손으로 세상 바꾸기' 중에서 

오늘 우석훈 선생과 함께 만난 인물은 일본 비정규직 운동의 아이콘, 아마미야 카린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이름이지만, 우석훈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일본 NHK나 아사히 등의 언론에서 거물급으로 대우"하는 키 퍼슨과 같은 인물이란다.  

그녀의 이력은 꽤나 특이하다. 10대 이전에 집단 따돌림을 경험하고, 비주얼 록밴드의 그루피이기도 했으며, 몇 번의 자살시도 끝에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20세 때에는 천황을 찬양하는 극우파 펑크 밴드(!)를 만들어 보컬로 활동했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하지만 좌파 성향의 다큐멘터리 감독, 쓰치야 유타카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녀는 변한다. 로리타 복장을 하고 천황을 찬양하는 '악'을 질러대던 스무살 아가씨에게 어떤 훈계도, 동정도 없이 그저 카메라를 건네 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미야는 어느 순간부터 사회와 자신의 접점을 찾아내고 허무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민족주의자 아마미야는, 아직 아마미야 자신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주의主義를 짊어지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녀는 비디오카메라와 마주함으로써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좌회전을 통해 '프레카리아트' 운동, 당사자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 후 <생지옥 천국>, <살게 하라! 난민화하는 젊은이들> 등 수십 권의 저서(르포)를 통해 상징적인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성난 서울>은 그런 그녀가 방문한 2008년 여름의 서울이다. 분명 그때 서울은 성난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으니까.

가십을 좋아하지만 또한 가십을 폄하하는 우리들은 '그래서?'라고 시큰둥하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아마 이 책을 읽고도 그렇게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두꺼운 얼굴을 가졌을 것이다. 삶에서 우러나온 시선으로 서울을 바라보는 그녀는 젠체하지도, 방정을 떨지도 않으면서 단순하고 명확한 말로 누구도 쉽게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발문과 결문을 쓰고, 중간의 대담을 함께 한 우석훈은 이 책의 공저자다)  

그나저나, 그 '성났던 서울'은 어디로 갔을까?  

마츠모토 하지메의 가난뱅이의 역습은 이미 지난 페이퍼를 통해 장문의 머릿말을 통째로 옮긴 적이 있으므로, 굳이 더 긴 설명을 늘어 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만국의 듣보잡이여 궐기하라!' 참고)

일본에서 '가난뱅이'로 즐겁게 살고 있는 마즈모토 하지메는 아마미야 카린과는 친구 사이로, 아마미야 카린의 권유로 함께 방한을 했다고 한다. (하지메는 어제 성미산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갖고 이미 귀국했으며 나는 하지메가 디자인한 '가난뱅이 티셔츠'를 입고 카린을 만났다. 카린은 티셔츠를 가리키며 "하하, 힌콘!貧困"이라며 반가워했다… 빈곤이 이렇게 기쁠 줄이야…)  

시종일관 재미있고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책이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고단한 삶, 그 자체다. 아마미야 카린이 말했던, 버블 경제 붕괴 이후 10년 동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묵묵히 참고 살다 보니 어느새 '친구가 노숙자가 되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상황이 지금 일본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이 책이 깊이 와닿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저 대단할 뿐이다. 이 책이 철저한 실용서인 이유는 우리 또한 10년 후를 대비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68을 다룬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명저 <신좌파의 상상력>이 재출간 되었다. '88만원 세대의 희망찾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 앵글을 넘어>(절망의 트라이앵글은 '대학등록금 1000만 원' - '청년실업 100만 명' -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의 삼위일체를 뜻한다. 사실 삼위일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후지다')와 경제학도라면 누구나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다니기 마련인 <미시경제학>의 저자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는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이다. 나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직장인이라면 가차 없이 '비타 악티바 개념사 시리즈'의 <노동가치>를 추천함미다.  


* 길고 긴 4월이 끝났네요. 5월엔 살림살이 좀 나아질까요?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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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 2009-05-08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책을 소개받아서 기분이 좋은데..한편으로는 너무 서글프네요..글의 내용이...막상 책을 읽고나면 더하겠죠...가슴이 답답해집니다...근데..태그에 '아내일도출근해야겠네'ㅋㅋㅋㅋㅋㅋㅋㅋ

활자유랑자 2009-05-11 19:1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에너지와 긍정이 있는 책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제 추석까지는 단 하루의 공휴일도 없다는 사실도 조금 답답하고 서글픈 일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