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진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이런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부는 존재하지만 우리 것은 아니고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침을 떼고 모른척, 오늘도 토익책을 읽고 적금을 붓는다. 그쪽이 마음 편한 것이다.

우석훈은 <88만원 세대>를 통해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고 말했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가난뱅이의 역습>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만국의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는 인터넷 신조어)이여 궐기하라!"  

이 책은 가난을 불평하지도, 그렇다고 인내하지도 않는다. 단지 죽도록 일만하고, 그 결과로 더욱더 피폐하고 가난해지며 부자들의 배만 불리는 경쟁사회의 쳇바퀴에서 빠져 나올 것을 권할 뿐. 당연하게도,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이다. 대신 그 가난은, 다른 누구의 배를 불리지도 또 다른 누구의 밥을 빼앗지도 않는 그런 가난이다.  

'대안 가난' 혹은 '공정 가난'이라고 해야할까?  

다시 말해 그것은 "평생 시시껄렁한 일을 해야 하는 노예"의 가난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공짜로 살아갈 수 있는" 가난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임승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이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는 일이니. 도무지 가난뱅이들끼리 싸워서 어쩌겠다는 건가? 

<습지 생태 보고서> 최규석의 삽화와 어우러진 텍스트는 꽤나 발랄하게 씌어졌지만 웃으며 넘기다 보면 이 책이 철저한 실용서 임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이 농담 같은 책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농담도 그런 농담이 없다.  

책 한 권 값도 사실 만만치 않은 우리 가난뱅이들을 대표해 이 자리에 옮기는 것은 책의 서문 격인 '첫머리'와 '첫머리(속편)'이다. '가난뱅이 선언' 쯤으로 들리는 이 두 편의 첫머리를 보고 있자면, 책의 내용과 저자의 영리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듯. 백문이 불여일견!

* 첫머리

미안, 쫌 심했나? 큭, '공짜로 살아가는 기술'이라고라? 말이 그렇지, 흠 그리 만만하진 않단 말이야…. 하지만 그보다 훨씬 끝내주는 작전을 알려줄 테니까 안심하라구!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참 재미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그러면 안 돼, 저 사람처럼 살아라…. 아이고, 시끄러!  

요즘 '격차 사회'란 말이 유행하면서 모두들 '더 나은 생활'이라는 압박에 시달리는데 말이지, 이거이거 정신 나간 세파에 꼭 뛰어들어야 하겠어? 그렇게는 못하겠단 말씀이야! 누굴 바보로 아나! 대충대충 월급쟁이가 되어 30년 대출상환으로 집을 사면 도망도 못 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잖아. 빠릿빠릿하지 못한 남자하고 결혼해서 따분한 가정주부로 살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아이 목을 졸라 죽인 여자도 나타나고 말이야. 회사에 충성을 바쳐 아르바이트직에서 정규직으로 착착 승진해서 출세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혹사만 당하고 찬밥 신세가 되니까 우을증에 걸려 죽어버리잖아. 아니, 이런 김밥 옆구리 터지는 얘기가 어디 있어?  

어이, 이렇게 될 바에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멋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아? 지금 실업자 지원이나 프리터 대책 같은 걸 봐도 결국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라' 하는 얘기밖에 안 돼.  

근데 요즘 같은 세상에 '제대로'라는 게 뭐지? 말도 안 되는 저임금에 일만 죽도록 하다가 피로 좀 풀려고 거리에 나가면 이거 사라, 저거 사라, 귀가 따갑다구. 신상품에 발이 채여 괜히 사고 싶은 마음만 들잖아. 월급이 쬐금 많은 놈이라도 어쩌다 보면 돼먹지 못한 비싼 전자레인지 같은 걸 사는 데 보너스도 다 써버리고 무일푼이 된다구. 그런 꼴 당하기 싫어서 어디 가서 좀 쉬려고 둘러보면, 공원 벤치엔 요상한 팔걸이를 만들어서 낮잠도 잘 수 없고, 기차역 대합실이었던 자리에는 어느새 스타벅스가 들어앉아 있으니…. 쳇, 재수 없어…. 돈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집에 들어가잖아? 텔레비전을 켜보라구. 사채 광고가 왕왕 돈 빌려준다고 난리를 떤다구. 예쁜 아가씨가 돈 빌려주는 줄 알고 입을 헤 벌리고 돈 빌리러 가보라구. 사람은 코빼기도 안 뵈고 기계만 떡하니 버티고 있다구. 그 다음엔? 필요 이상으로 험상궃은 아저씨들이 빚 받으러 찾아오신다구…. (이쿠! 그런 얘기까지 할 건 없잖아!) 여하튼 돈은 안빌리더라도 말이지, 매일 죽어라 일해서 PDP 사고, 세탁건조기 사고, 돈 모아서 도요타 자동차 사고(물론 대출 받아서!), 불경기로 찌부러진 치바나 사이다마 근처 땅에 30년 상환 조건으로 내 집 사고, 마지막으로 퇴직금을 탈탈 털어서 자기가 들어갈 무덤을 산단 말이지…. 결국 죽을 때 가져갈 땡전 한 푼 없이 써버리는 것, 그게 바로 제대로 된 '격차 사회'고 '더 나은 생활'이란 말이야….  

…흥, 이거 뭐야! 시시해, 답답해!! 

말하자면… 정사원으로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집도 사고해서 이제는 '우등반'(* 우등반 : 일본어로는 '가치구미', 즉 승자들의 집단을 말한다. 상대어는 '마케구미', 즉 패자들의 집단으로 '격차사회'의 양극화를 나타내는 유행어)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자네! 우쭐거릴 일이 아닐세! 안된 얘기지만, 자네도 이미 각 잡힌 가난뱅이란 말씀이야. 진짜 '우등반'이란 말이지, 잠깐 일을 쉬거나 몇 년쯤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놈들이라구. 이런 놈들은 무지무지 노력하고 무지무지 재수가 좋아야 해. 그러니까 보통 사람한테는 무리지. 게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데 돈이 들어온다는 말은 누군가 대신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니까, 시대를 잘 타고났기에 망정이지 옛날 같으면 가난뱅이들이 멍석말이를 해서 먼지 나도록 흠씬 두들겨 패주었을 것이라는 말씀.  

그런데 우리가 손가락 까딱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어떻게 되지? 백발백중 눈 깜짝할 새 돈이 떨어져서 찍소리도 못하게 될 거란 말이야.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져버리는 자전가 같은 우리 인생은 자타 공인 가난뱅이란 말씀. 아니 현재 일본 사회의 90퍼센트 이상은 가난뱅이 계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 모범수냐 문제아냐 그런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거야. 흐음, 이거 그렇다면 탈출해야 하는 거 아냐?  

이기는 사람도 없는 경쟁사회에 휘둘리기는 죽기보다 싫으니 말이야!  

그런데 마음대로 살 거라고 선언이라도 해보라지. 좀 더 노력해보라는 둥, 세상을 위해서 일하라는 둥 설교하려는 놈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라구. '사회를 위해 고생이 되더라도 노력한다 -> 세상이 나아진다 -> 떡고물을 얻어먹는다'는 건 부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내뱉는 말이지. 이렇게 하면 우수한 노예가 될 뿐이야…. 거짓부렁! 뻥이야! 그만두는 게 좋다구.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나중에는 새 발의 피 같은 돈 부스러기나 얻어 쓸 수 있을 뿐이니까.  

그에 비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 좀 곤란한 일에 부딪힌다 -> 몸부림친다 -> 어떻게든 된다(무슨 수든 쓴다)'는 생각을 해봐.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방식 아냐? 이거야말로 얼마나 인간답고 즐거우냔 말이야. 

조오타. 이렇게 된 바에야 멋대로 살아볼까! 야호! 시시한 놈들이 지껄이는 말은 듣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보자. 우리 가난뱅이가 이 세상을 한바탕 걸지게 뒤집어보자! 좋아 좋아! 정했어! 축제란 말이다! 시끌벅적 한판이닷! 

* 첫머리(속편) 

근데 잠깐만 기다려! 당신들, 덤비지 말구 내 말 좀 들어봐!! 

세상은 의외로 빡빡하다구. 기죽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근처 공원에서 매일 낮잠이나 자보라지! 그런 과격한 행동을 개시하면 먼저 근처 골목대장들이 알아보고 "저 사람, 회사도 안가나 봐!" 하고 밀고를 해서 동네에 금방 소문이 쫘악 퍼져.  

더구나 갑자기 아무 일도 안 하고 낮잠만 자고 있으면 조만간 돈이 떨어질 게 뻔하잖아. 학생이라면 학교에서 쫓겨날 테고, 방세가 밀리면 집주인한테 방 빼라는 소리를 듣겠지. 배가 고파 빵을 훔치다가 걸리거나, 공갈 좀 해보려다 실패해서 중학생한테 린치를 당할 수도 있어. 이웃의 판잣집에 가서 사기 반 공갈 반으로 "댁에 흰개미가 득실거려서 집이 무너질지도 몰라요! 200만 엔만 들이시면 제가 고쳐드릴게요"하고 말했다가 거짓말이 들통 나면 노친네한테 멱살을 잡힐 수도 있어(옛날 노친네들은 의외로 힘이 세거든). 할 수 없이 벤치에서 풀이 죽어 자다가 굶어죽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멋대로 산다는 게 그리 녹록지 않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하라구?! 

첫째 돈을 물 쓰듯이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의 본연적인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야. 그럼 어떻게 하느냐. 고고한 척하며 가난을 자랑거리로 내세워봤자 궁색하기 짝이 없거든. 그것보단 여차해서 큰 일이 나도 잘 넘길 수 있는 생활 기술을 익혀두자는 말이지. 또 거리 전체, 지역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밝고 씩씩하게 살아간다면 서로 도울수도 있고 훨씬 살기가 편해지지 않을까? 게다가 자기 힘으로 일도 하고 놀이도 해나간다면 스트레스도 낭비도 훨씬 줄어들 거야. 그렇게 못살게 하는 방해물이 나타나면 꼼짝 못 하게 물리치는 기술도 습득해두면 범에 날개를 다는 격이지.   

야! 야! 야! 매일 얼근하게 취해서 노세노세 하는 베트남 식당 주인을 보라구! 오후에 일을 마치고 거리를 배회하면서 춘화를 보여주겠다고 하면 벌떼처럼 모여들던 에도시대 상인들은 어떻구! 밝고 씩씩하게 살아도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야! 위대한 조상들의 뒤를 잇자구! 

이 책은 격차 사회의 승자 반인 '우등반'을 향하느라 평생 시시껄렁한 일을 해야 하는 노예가 되는 기술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공짜로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몸에 익히는 데 도움을 줄 거야.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우리 가난뱅이 계급의 서바이벌 기술 실용서인 셈이지! 자, 어때? 침 넘어가지 않아? 

축제를 벌이자! 시끌벅적 한마당이닷!


댓글(0) 먼댓글(2)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놀아봐야 놀 줄 알지 - 마쓰모토 하지메, &lt;가난뱅이의 역습&gt;, 이루, 2009
    from Fly, Hendrix, Fly 2009-04-21 19:26 
    가난뱅이의 역습 -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이루 세상에 처음부터 뭐든지 잘하는 사람은 없다. 기타를 잘 쳐보려면 기타를 일단 잡아야 하고, 춤을 잘 춰보려면 최소한 TV에 나오는 댄서들의 안무를 따라는 해봐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 참 많은 사람들이 해보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넌 경험이 없어서 안 돼.”라고 말하는 경우다. 요새 취업정보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요구하..
  2. 가난뱅이의 역습
    from 으악! 2009-09-13 22:52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직접 해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했던 작전들을 소개해준다. 책에 나와있는 오프라인 작전들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 작전들은 평화적이면서 재미도 있어보이고 사람들 사이의 정도 느껴지는 것 같아서 따라해보고 싶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p.20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만 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