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교수의 새 책 제목이 <아버지의 편지>라니, 무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본 기억은 없지만, 그 말은 내게 한 작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는 가끔 그렇게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신문기사를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오곤 했다. 언젠가는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조선일보 기사가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조선일보에 글을 실은 적이 없었다. 펼쳐보니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유미리에 관한 기사였다. 아버지는 유미리라는 이름에, 그리고 '방황과 절망이 빚어낸 문학성'이라는 홍사중씨의 칼럼 제목에 각각 붉은 형광펜 칠을 해놓았다.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차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 김연수, '뉴욕 제과점' 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p.74)
그리고, 바로 그 작가와 얼마전 만난 인터뷰 자리에서 잠시 틈을 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저희 과 행사에 오셔서 뵌 적이 있는데, 작년에도 또 오셨다면서요?"
"아… 정민 선생님이 전화를 주셔 가지고요. 시간 있냐, 하시는데 아마 그 몇해 전에 제가 갔었다는 걸 모르셨던 모양이에요. ("아, 그때는 안식년이셨을 거에요") 네… 그래서 뭐 못간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웃음)"
그렇다. <아버지의 편지> - 김연수 작가 - 정민 교수로 이어지는 이 '크리'의 동시성(synchronicity)! 그것이 이 좋은 금요일에 꼼짝없이 이런 페이퍼를 쓰게 만든 것. 아 이 가혹한 운명이란…
어쨌거나 정민 교수에게는 그런 면이 있는 모양이다. 거절하기 힘든 면이. 그에 더해, 여느 대학 강단에서 보기 드물게 조는 학생들의 꿀밤을 때리기도 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학생들(?)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 그러니까 '아버지 같은'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그래서 내게, 대학 내내 요리조리 빠지며 그 분의 수업을 듣지 않도록 만들었던 모습이.
하지만 자식은 언젠가 자라 또 다른 자식의 아버지가 되고, 제자는 어느새 자라 스승의 책을 판다.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는 온전히 알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의 책을 눈앞에 놓고 있는 오늘, 그 마음만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것만 같고(그래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부질 없는 말을 자꾸만 늘어놓게 되었다는 이야기. ('왜 이 페이퍼는 개인적일 수 밖에 없나'에 대한 길고 지루한 변명!)
너무 늦었지만 각설하고 들어가면,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장의 선택'을 위해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선인들의 생동하는 삶과 사유를 오롯이 담은 글을 우리에게 소개해 온 정민 교수가 이번엔 옛 아버지들의 편지를 소개한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의 대학입시에 목을 매듯 자식의 과거 급제를 위한 노심초사에서부터, 직접 담근 고추장을 보내니 사랑채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함께 먹으라 이르는 자상함에 이르기까지. 이황, 유성룡, 박지원 등 우리에겐 그저 역사 속 인물로만 남아 있는 인물들의 자식 사랑이 우리의 부모와 다르지 않아 더욱 애틋하기만 하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편지의 주인공들은 이황, 백광훈, 유성룡, 이식, 박세당, 안정복, 강세황,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총 10명의 인물들. 눈익은 인물도, 조금 눈설은 인물도 있지만 시시콜콜하고 노심초사하며 사려깊기도 한 편지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두 낯익은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
아버지의 모습이야 사실 설명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장 즐거웠던 편지 한 토막을 옮기는 것으로 부족한 설명을 대신하려 한다. 역시나 연암 박지원의 '고추장 편지'. 사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편지이고, 책 속에는 연구자가 아니라면 모를, 그렇지만 멋진 다른 편지들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아쉬움이 커서.
직접 담금 고추장 한 단지를 보낸다 - 안의에서 종의에게 보낸 편지
'아동기년(我東紀秊)' 2권을 지었다. 실로 소략한 점이 많으니 탄식할 만하다. 비록 그렇긴 해도 상고하여 살피기는 좋으니, 모름지기 뇌아(차남 종채)에게 주어 때때로 자세히 살피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어려서 총명할 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박씨가훈(朴氏家訓)' 1권은 올라갔더냐? 선조의 휘자(諱字)는 푸른색 종이로 가리면 어떻겠느냐? 이 책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소학감주(小學紺珠)'는 간신히 베낀 것인데 잃어버렸다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가 서책에 대해 성의 없기가 이와 같으므로 늘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나는 문서를 살피는 여가에도 오히려 한가한 일에까지 미쳐 때때로 책을 저술하고 혹 법첩을 임서하며 붓 글씨 연습을 한다. 너희가 1년 내내 무슨 일을 일삼고 있는 게냐?
내가 4년 간 '강목'을 열심히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읽었어도, 늙고 보니 책만 덮으면 문득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은 책자 하나를 만들어 초록했지만 전혀 긴요하지 않은 책이 되고 말았다. 나는 비록 손발이 근질거려 한 것이라 스스로 그만둘 수는 없지만, 너희가 심심하게 날을 지내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생각을 하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젊을 적에 이와 같다면 장차 늙어서는 어찌 지내려는 게냐? 허허!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
말린 고기 세 접
곶감 두 접
볶은 고기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본문 200~201페이지, 편지 전문)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아버지의 마음, 그러니까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하는 마음 같은 것이 애틋하고 또 절절하게 다가와 자꾸 자꾸 곱씹게 된다. 그리하여, 대학 4년 내내 그 분의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는 스스로의 치기를 조금 뼈아프게 반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반성처럼, 이 또한 너무 늦은 것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이 늦은 반성조차 꽤나 부족한 것이겠지만.
"내게 보낸 편지에서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아버지는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겠냐'와 '아니겠느냐'가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서 나도 내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편지를 쓸 때쯤이면 그 차이를 알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나도 왜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는지, 왜 세상의 모든 불빛은 결국 풀풀풀 반짝이면서 멀어지는지, 왜 모든 것은 기억 속에서만 영원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던 어떤 작가처럼, 나 역시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라고 스스로 위로 하는 수밖에.
* 그런데, 정민 선생님의 좀 '어려운 면', 그러니까 내가 위에서 '아버지 같은'이라고 표현했던 그 면이, 실상 손아래 사람한테만 보이는 모습은 아닌 모양이다. 정민 선생님의 스승인 이승훈 선생님은 언젠가 (그러니까 정민 교수가 안식년이었던 그 해) 학생들과 함께 갔던 학술 답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진다.
"아이고, 민이가 안오니까 이렇게 편하네"
** 그렇지만 그 사제지간은 또한 애틋하기도 한 모양이어서 지난 2004년에 출간된 이승훈 선생님의 시집 <비누>의 말미에, 정민 교수가 아래와 같은 멋진 글을 남기기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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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오토바이
정민
선생님과 한 대학 한 건물에서 지내온 세월이 20년이다. 학부 3학년 학생 시절 처음 만났다. 지금도 연구실을 마주 하며 산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이 참 많다. 하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선생님 생각을 하면 늘 시집 <나는 사랑한다>에 수록된 '오토바이'란 작품이 생각난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의자, 작은 방, 개미, 염소.' 그는 말 그대로 해질 무렵을 사랑하는 몽상가다. 세상엔 아예 관심이 없는 소부르주아 시인도 그에게 꼭 맞는 말이다. 의자에 집착하고 모자에 집착하고 개미나 염소 같은 하찮은 것에 집착하고, 주문진에 집착하고, 안개에 집착하고,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현실 따윈 아랑곳 않고, 귀찮은 것은 죽어도 못한다.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와이셔츠 소매 단추는 언제나 채우는 법이 없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못지 않은 국문과 교수가 바로 그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30년 전부터 어디론가/떠나고 싶었지만!'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감기다. 나는 이 구절에서 늘 목이 메인다. '30년 전부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만!' 얼마나 눈물나느 표현인가? 그는 결국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채, 늘 똑같은 일상을 변함 없이 되풀이한다.
내가 관찰한 선생님의 일상은 이렇다. 학교에 오면 먼저 허름한 바지로 갈아 입으신다. 날마다 박카스를 두 병 마신다. 그것도 한꺼번에 다 마시지 않고 반 병씩 나눠 마신다. 11시 30분이 되면 대원반점에 전화를 해서 점심을 시킨다. 메뉴는 늘 잡채밥이다. 10년이 넘도록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3분의 1쯤 드시고는 신문지로 그릇을 꽁꽁 뒤집어 씌워 방문 앞에 내 놓는다. 표지판을 '외출'로 바꿔 놓고 한숨 주무신다. 볼펜은 모나미 볼펜 파란색만 쓴다.볼펜심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심지 끝 쪽을 몇 밀리쯤 잘라 펜 끝에 겨우 나올락 말락 하게 만들고는 세워서 쓴다. 개미 허리에 실을 묶어 쓰면 그런 획이 나올까? 아무튼 선생님의 글씨를 알아보는 것은 특별한 재능에 속한다.
석양 무렵이 되면 연구실을 나선다. 집에 들어가기 전, 맥주 두 병, 그것도 하이트만 마신다. 남들이 고기를 구워도 드시지 않고, 밥을 먹어도 드시지 않고, 김과 마른 멸치만 드신다. 기분이 나면 몇 병을 더 마시기도 하고, 더 기분이 좋으면 노래방에 가서, 수첩 속에 꼬질꼬질 접어둔 메모지를 꺼내, 다른 노래도 아니고 언제나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당공원'을 부른다. 그것도 2절까지 언제나 메모지를 보며 부른다. 집에 가서 더욱 국물에 밥을 말아 저녁을 드시고, 잠을 청한다. 아! 고단한 하루여.
최근엔 목 디스크로 오른 팔 통증이 심해 운전도 않는다. 해질 무렵 하이트 맥주 두 병은 그래도 거르지 않으신다. 담배는 도라지를 피우시다가 최근엔 건강을 생각해서 에세로 바꿨다. 오전에는 에세를 피우시고, 오후엔 금연초를 피운다. 전에는 작은 잔에 커피를 진하게 타서 드시더니, 요즘은 녹차 티백으로 바꾸신지 꽤 되었다. 무엇이든 한번 결정하면 바꾸는 법이 없다.
학교에 입시라든가 학과장 회의라든가 모임이 있는 날 아침이면 으레 전화가 온다. 바꿔 주는 아내가 늘 웃는다. "정 교수! 나 이승훈이야."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내가 다 안다. "몸이 안 좋아서 오늘 학교에 못 나가겠네. 자네가 내 대신 말 좀 잘해주게."란 말은 꼭 하신다.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악의는 없다. 도대체 원래가 그렇게 생겨 먹은 분이시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선생님의 생활은 규칙적이긴 해도 전혀 논리적이진 않다. 하지만 학문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시 이론서의 고전이 된 <시론>만 봐도 대충 짐작하겠지만, 미학의 고전부터 현대 시학의 최신 이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념들이 차곡차곡 머릿속에 다 정리되어 있다. 언제 어떤 질문을 해도 거침이 없다. 라깡을 물으면 라깡이 나오고, 하이데거를 물으면 하이데거가 나온다. 촘스키를 물으면 촘스키가 나오고, 푸코를 물으면 푸코가 나온다. 작은 개념을 묻거나, 큰 흐름을 물어도 막히는 법이 없다. 늘 감기에 시달리고, 팔이 아프고, 하이트 맥주도 마시고, 시도 쓰시지만, 공부도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한다. 지금까지 매년 2권 이상의 연구서를 펴내온 것은 이런 바탕에서다. 선생님이 술 드시는 모습만 본 사람들은 이런 왕성한 작업이 늘 궁금할 것이다.
개념이나 용어에 대한 사고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대학원 특별전형 면접 시험을 보면, 늘 선생님 때문에 진행이 지체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구분해서 설명해 보세요." 학생들은 당황해서 허둥댄다. 질문은 언제나 기본 개념과 용어를 벗어나지 않는다. 질문이나 대답을 녹음해서 그대로 옮기면 손댈 것 없는 문장이 된다. 도대체 군더더기가 없고 멈칫대는 법이 없다. 지난 해 계간 '시와반시'에서 주최한 '이승훈 시인과의 만남'이란 행사에서도 그랬다. 그냥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그대로 고급한 문장이요, 심오한 이론이었다. 느닷없는 질의에도 선생님의 응답은 미리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다듬은 원고를 써 놓고 읽는 것 같이 정돈된 대답뿐이었다.
전에는 가는 법이 없으시던 국문과 학술답사를 최근 몇 년간은 함께 가셨다. 거기서 한번씩 백일장을 하면 그 작품 하나하나를 평하는 말씀이 또 주옥이다. 거지같은 작품도 선생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걸작이 된다. 선생님은 연설하기를 좋아한다. 한번 마이크가 건네지면 보통 10분은 넘어간다. 물론 아무데서나 그러지는 않는다. 어려운 자리, 격식 갖춘 자리는 아예 나오지도 않을 뿐 더러, 나온다 해도 조용히 계시는 편이다. 하지만 학생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말씀이 청산유수다. 중간중간에 톡 쏘는 위트와 데굴데굴 구르게 하는 유머도 꼭 끼어든다.
최근엔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셨다. 한동안 연기론에 몰두하시더니, 며칠 전엔 내게 오셔서 <산해경>을 빌려가셨다. 시에도 그런 흔적이 풀풀 묻어난다. 선생님의 시를 보면 선생님의 근황을 잘 알 수가 있다. 먼저 세상을 뜬 동생 일로 괴로우시구나, 누구와 연애를 하시나보다, 손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시는구나, 갑자기 불교 공부를 하시나 보다. 시 속에다 뭐든 다 말씀하시기 때문에 뭐든 다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시콜콜히 다 말하고, 숨기지 않는 선생님의 이런 시작 태도를 영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오불관언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머리로 생각해낸 진정성보다는 선생님의 그런 시가 더 진실해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시에 진지한 구석이 없다며 타박한다. 이게 말장난이지 무슨 시냐며 시비한다. 하지만 선생님의 언어 속에는 말장난을 넘어서는 어떤 힘이 있다. 아우라가 있다. 간혹 문단에서 논리나 이론을 가지고 선생님과 시비를 붙는 경우도 보았다. 하지만 한번도 선생님을 이기는 논객은 본적이 없다.
선생님은 도대체 자기 밖에 모른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당신 몸이 귀찮으면 모른 척한다. 그런데 그런 얌체 같은 행동이 밉지가 않다. 함께 술자리에 있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선생님의 행동에는 정말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이다.
선생님의 시는 늘 비슷한 것 같지만 한번도 같지 않았다. 계속 변화하면서도 일관성이 있었다. 훗날 선생님은 현대 시사에서 큰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그때가 되면 지금 내가 쓴 버릇없는 이 글도 하나의 사료적 가치를 띤 증언이 될 수도 있지 싶다. 시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이 글은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라 몇 날을 망설였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단숨에 다 써졌다. 내가 알게 모르게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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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말하셨지 "○○○ ○○○" 라는 이상한 제목에 들어갈 아버지의 말씀은, 이 책을 읽으실 독자 분들의 몫으로 남기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페이퍼가 되어 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