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판으로 전차가 지나고, 축음기 소리통에서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멜로디가 울리던 그곳, 경성.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긴 양복의 모던 보이와 에나멜 구두를 또각 거리며 다가오던 모던 걸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대륙경영의 꿈을 안고 조선을 정탐, 훗날 조선침략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혼마 규스케의 수첩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요? 유교 중심의 문화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왕비의 역사로 조선사를 다시 쓴다면 어떨까요?

흥미로운 역사서들이 눈에 띄는 이번 주 만선, 출발 합니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경성,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최근 몇 년간 새롭게 조명 되고 있는 경성을 다룬 또 하나의 역사서가 출간 되었습니다. 이번에 포착한 것은 '연애'. 그 시절의 연애라고 하면 이광수의 <무정>이나 번안 소설 <이수일과 심순애> 정도가 떠오르시나요? 무슨 말씀. '모던'에 살고 '모던'에 죽던 그들의 화려한 스캔들을 공개합니다.

자살로 마무리 되고 만 비극적 연애 사건,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 윤리를 뒤엎고 당당하게 사랑을 외치던 신여성들의 낭만적 연애 사건, 여자를 사랑한 여자의 (당시로선) 충격적 연애 사건과 경성을 붉은색으로 물들인 혁명적 연애 사건까지… 각양각색의 흥미로운 연애 사건들을 담고 있는 책은, 그러나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주의에 그치지 않고 당시 경성의 공기를 충실하게 그려냅니다.

"당신은 왜 죽었나이까? 나만을 두고 죽는다면? 왜! 혼자 죽었나이까? 나를 두고. 나도 당신의 뒤를 따라가렵니다. 깨끗하게 죽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나 당신이 이미 한강을 택했으니 나도 당신이 죽은 한강을 취하려 합니다. 곱게 잠든 당신의 깨끗한 영靈은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나를 원망치 말고, 나를 기다려 주소서……."  -<애상의 한강파에 청년 의사 노병운 씨 투신>, 동아일보 1933년 9월 29일자


* "조선의 시국이 정말로 급박하다",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조선잡기>

개항 이후 공사관과 영사관이 설치되고, '대륙경영'이라는 큰 꿈을 안고 조선 반도를 밟은 일본의 낭인들. 그 낭인들에게 조선이란 그야말로 '기회의 땅' 이었을지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 조선은 그들의 큰 뜻을 위해 시급히 분석되고 파악되어야 할 공간에 다름 아니었지요.

혼마 규스케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로, 1893년에 처음 내한한 후 부산에 머물며 경성, 중부지방을 정탐하고 행상을 하며 황해도와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정탐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 후 도쿄에 돌아가 '이륙신보'에 조선 정탐내용을 연재하고, 154편의 글을 한 권으로 묶어 7월 1일 간행했으니 그 책이 바로 이 책, <조선잡기>인 것이지요.

근대 일본인의 시선으로 조선의 문화와 문물 풍속을 접하면서 느꼈던 여러 풍경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이 책에서 드러나는 조선의 주된 이미지는 '순진함', '무사태평', '불결', '나태', '부패' 등입니다. (<이 영화를 보라>에서 근대를 '위생권력'의 문제로 다루었던 것이 떠오르네요)

'아름다운 동방의 아침의 나라' 일색인 서양인의 여행기와는 달리 조선 말기의 풍습과 일상생활을 민중들의 모습을 통해 세밀하게 다루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불편한 서술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오는 풍경도, 이런 소소한 것들이 어찌 정탐의 내용이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드는 모습들도 가득한, 색다른 기록입니다. (그 포복절도 할 본문을 맛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펼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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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 <기인기사>

물재勿齋 송순기宋淳夔가 현토식懸吐式 한문으로 편찬한 '신문연재구활자본야담집新聞連載舊活字本野談集'인 <기인기사록>을 번역하고 저자 나름대로 매만져 놓았다는 이 책 <기인기사>의 정체는, 제목 그대로 "별난 사람 별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야담집. 다시 말해, "조선판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말씀.

이 책의 원본이 되는 <기인기사록>의 하권이 일제 시대 금서였고, 그리하여 이 야담집이 우리 야담사에서 얼마만큼의 중요한 위치에 놓이는 지를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아마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자체로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옛사람들의 삶을 엿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니까요.

(원문의 기기묘묘함이야 읽을 능력이 없으니 알 바 없지만, 그것을 풀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풀어 엮은이'의 뒤지지 않는 '말빨'이 궁금하시다면 아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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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의 사정 <여왕의 시대>, <조선 왕비 오백년사>

제목에서 느껴지듯 모두 여왕 혹은 왕비라는 정치 권력의 최정점에 존재했던 여성들을 통해 역사에 접근하는 두 권이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역사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사정.

<여왕의 시대>는 클레오파트라에서 서태후와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한 여왕들의 모습을, <조선왕비 오백년사>는 유교적 여성관 아래에서 배제되었고 때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왕비들의 역사를 그립니다. 특히 후자의 작업이 더 흥미롭네요.

* 그 남자의 사정 <문학청년의 탄생>, <부랑청년 전성시대>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근대의 풍경을 그려내는 문학평론가 소영현 씨의 책 두 권도 함께 출간 되었어요. 격변하는 소용돌이 속의 근대, 그 소용돌이를 만드는 '형성적 주체'가 바로 청년이라는 것.

<문학청년의 탄생>은 '문학'을 패션처럼 휘감고 온몸으로 예술의 자립적 공간을 마련코자 했던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게 된 시대배경, 그리고 다시 그렇게 나타난 이들이 어떻게 근대일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부제는 '근대 청년의 문화정치학'.

조금 딱딱해 보인다고요? 그런 분들을 위해 <부랑청년 전성시대>가 있습니다. 부제인 '근대 청년의 문화풍경'에서 나타나듯 우리와 같기도, 또 다르기도 한 그들의 모습, 시대의 공기를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진짜 '청년'이 '청년' 같았던 시대. 가끔씩은 정말 그들의 시대가 부럽기도 합니다. 물론 '부랑(불량)청년'이 되고 싶습니다.

  
* 역사의 대반전, 신자유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

이 책이 등록되기 전까지 저자 박세길 씨의 알라딘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운동권의 필독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의 저자. 진보적 역사 읽기 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직설적인 정보라 이 책을 등록하며 다시 수정하긴 했지만, 사실 그 말처럼 박세길 씨를 심플하면서 정확하게 소개할 말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보아도, 어쩐지 웃음이 나오는 소개네요)

그 '필독서'가 필독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가독성'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이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에서도 마찬가지어서, 두께 때문에 부담이 되시는 분들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해요.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하는 책은,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 혁명의 역사를 되짚어 오지만(혁명의 추억), 그것이 기왕의 혁명사를 다룬 책들과 다른 것은 바로 '미래의 혁명'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사회혁명은 바로 "민주주의의 본원적 가치가 전면적으로 실현 되는 과정이어야 함"을 역설 하는 저자는, 하여 '창조적 다수'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창조적 다수는 누구일까요? 글쎄요, 이미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포스트워 1>, <포스트워 2>

1권과 2권, 1450여 쪽의 방대한 분량을 통해 이 책이 그리고 있는 것은 유럽의 역사입니다. 그것도, 제목에서 보여지듯, 그냥 역사가 아닌 1945년에서 2005년의 역사. 60년의 역사를 그리기 위해 왜 이토록 많은 글자들이 필요했을까요?

"지난 세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각 변동의 진원지이자 금세기 인류가 지닌 평화의 기회를 실험할 주요 실험실인 유럽. 이 막대한 서사적 중요성을 지닌 주제는 이제 그 무게에 합당한 저자를 찾았다." - 스트로브 탤봇, 브루킹스연구소 소장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부터 냉전의 기원, 유럽 제국주의의 종언과 식민지 해방, 유럽경제공동체의 탄생과 발전, 서유럽의 경제적 번영과 불만, 소련의 동구권 지배와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발칸 전쟁, 난민과 불법 이민 노동자, 스포츠, 음악, 영화 등 전후 유럽의 거의 모든 것을 스릴있게(!) 그려내는 책은 전후 60년, 유럽인들이 건설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이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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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번 주도 책들이 가득한 한 주였습니다. 특히나 '역사' 책들만 가득 실었더니, 어쩐지 타임머신이라도 된 것 같네요.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안다는 말, 그 말을 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과거를 그린 책은 대개 흥미롭다는 것.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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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771 2008-07-0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인문MD님께

<기인기사>를 옮긴 간호윤이라고 합니다.
“고맙습니다”란 말씀 한 자락 없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기에 이 지면을 빌려 글을 씁니다.
알라딘인문MD님께서는 참 글을 잘 쓰시는군요. 속도감도 여간 아닙니다. 여러 꼭지를 쉬이 읽었습니다. ‘만선’이란 명패만큼이나 그득한 글의 풍어더군요.

더욱이 <기인기사>는 ‘머리말’부터 촘촘히 읽으시고 책의 역사, 작가의 작품에 대한 애정에 더하여 언어적 표현까지 짚어주셨더군요. 고심에 고심을 덧대어, 글을 적어 내려간 작가의 내밀한 마음을 살펴주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서평이 출판사의 원고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을 본 터이기에 알라딘인문MD님의 독서량과 필력에 더하여 글 쓰는 이로서의 애정까지도 볼 수 있더군요. 그래,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하여야겠기에 두어 자 적었습니다.

한 말씀만 더 놓겠습니다.
이 <기인기사>의 원본인 <기인기사록>은 ‘일제강점기 금서(禁書)’에 ‘매일신보 연재’ 따위의 이유만으로도 문학사적 가치가 녹록치 않은 책입니다. 지명도 있는 이의 손에 ‘이 책이 출간됐으면―’하는 생각이 들만큼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알라딘인문MD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간호윤 근배 (011-9060-8710, 032) 217-8710)
2008. 7. 4.

활자유랑자 2008-07-0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라딘 인문담당MD 금정연입니다. 이렇게 먼 길을 직접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책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문학사적 가치에 대해 무식한 소리를 한 것은, 말 그대로 무식하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책이 재미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업 부탁 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