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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비밀스러운 삶 - 명랑한 소들의 기발하고 엉뚱한 일상, 2020 우수환경도서 선정도서
로저먼드 영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농장을 운영하는 할머니, 로저먼드 영은
전업작가는 아니지만 평생 함께 해온 소, 양, 돼지, 닭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 책을 펴냈다.
온갖 판타지 소설, 현란한 문체의 여행에세이, 깜찍발랄한 유행 시집들을 읽다가
이 할머님의 밋밋한 글을 읽자니, 처음에는 정말 적응이 잘 안되었다.
마치 인스턴트 패스트 푸드에 길들여져 있는 입맛이
산골 할머니들이 끓여주는 전통식 콩비지 찌개가 무슨 맛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아, 어쩌다가 내 입맛이 이리 되었는고 싶을 정도로
나의 독서편력이 자극적이고 달달하고 지엽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이 책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내가 편집장이었다면
'로저먼드 영' 할머니를 설득해서
본문 뒤에... 프롤로그를 실어
에필로그로 만들었으리라.
그리고
'소에 대해 알아야 할 스무 가지'
'닭에 대해 알아야 할 스무 가지'
'양에 대해 알아야 할 스무 가지'
'돼지에 대해 알아야 할 스무 가지'를
차라리 프로롤그로 만들어
맨 앞에 실었으리라.
왜냐하면,
소와 닭과 양과 돼지에 대한
농장 이야기들을 진실되게 풀어내는 로저먼드 영 할머니께서
왜 굳이 이렇게 소소한 소 이야기, 닭 이야기, 양 이야기, 돼지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게 되었는지를
'프롤로그'가 위대한 결론으로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서 그 위대한 결론을 먼저 읽고
본문의 소소한 이야기를 읽으려니
'기-승-전-결'에 익숙한
상투적인 독자인 나는 집중이 잘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위대한 '프롤로그' 중 몇 가지를 발췌해 보자.
p.13
"동물을 몇 마리만 키우는 사람은 한 마리 한 마리를 다른 존재로 바라보며
각 동물의 섬세한 특징이나 특이한 개성, 기질 등을 정확히 파악한다.
농장에서 대규모로 가축을 키운다고 해서 동물들의 개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들의 개성과 지능은 사람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p.14
"우리는 다른 종의 지능을 대개 사람 기준으로 판단하려 든다.
과연 인간의 기준이 다른 종에게 의미가 있을까?
동물에게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느낄 무한한 능력이 있고,
이런 감정은 동물 나름의 관점에서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젖소의 지능이 젖소로서 잘 사는 데에 충분하다면,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p.15
"평생 소를 관찰하면서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지능의 놀라운 사례도 보았고
턱없이 어리석은 모습도 보았다.
두 가지 다 사람에게서도 본 특징이다.
소들은 그저 날마다 문제가 생기면 풀기도 하고 풀지 못하기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핵심은 소가 동물답게 살아갈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좀 모자란 종속물로서가 아니라."
p.16
"아이가 부모 형제 없이 비좁고 냉혹한 환경에서 운동도 하지 못하고
날마다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정상적으로 성장하리라 기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농부들과 정부 기관은
가축이라면 이런 환경에서도 거뜬히 자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p.19
"아인슈타인은 '오직 직관만이 가치가 있다'고 했다.
본능과 직관이야말로 어떤 동물에게나 가장 유용한 도구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집약 농장에서 무자비하게 본능과 직관을 억압하고
아예 이런 것을 발달시킬 가능성마저 차단한다.
이처럼 동물과 아이들의 본능을 억압하는 건
전체 사회에 큰 손실인 셈이다."
p.24
"그래서 우리는 동물들 스스로 자신들의 몸을 돌볼
가장 훌륭한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관찰하고 배우고 이 책에 적은 일화는
이러한 동물들의 평범하거나 특별한 사건 혹은 영리한 결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p.34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전했지만 각 '캐릭터들'의 행동은 물론 내가 해석한 것이다.
소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 일부러 인칭 대명사를 썼는데
그건 내가 소들을 그렇게 (마치 사람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의 표현들은
단호하면서도 절제되어 위엄이 있는
'선언문'처럼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언문'을 증명하는 소소한 일화들이
본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물들의 일화들은,
동물들과 교감하며 살아온 '로저먼드 영' 할머니의 삶 자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떻게 그리 묵묵히... 동물들을 지켜내고 바라보며...
이해하며 기다려주며 살아오셨을까...
소의 비밀스러운 삶이란,
다름 아닌 할머니의 따뜻한 시선이 있었기에
서술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할머님이 가지고 계신 수필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도 묵묵히.. 일생을...
무엇인가와 교감하며 배려하며 사랑하며 살아왔다면
이런 소소한 일화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추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인간은 동물들을 가축으로 키우면서
마치 그 동물들을 창조하고 통제하고 운명짓는 것이
인간의 특권인 양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근엄한 경고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느껴야 한다.
소는 힘이 세다.
진실도 힘이 세다.
안 그런가?
* 이 서평은 양철북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