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에 들어온 타성바지 청년. 마을에서 세도가인 집안 여인을 사랑했다가 얻어맞아 미쳐버린 사람. 친구와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고향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청년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세상에 그토록 흔한, 가슴 아픈 일 중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 사람, 사랑하는 여자네 집안 사람들에게 얻어맞아 미쳤다는 그 사람 말이야. 본 적 있니?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다니? 그 여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발랄라이카로 연주된 러시아 민요 '나는 당신을 만났었네'를 거푸 들으면서 그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될 줄 알았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곤고한 한 시기를 겪은 후배가 걸은 숱한 길의 기억이며 또 다른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면서 다른 제목을 가진 소설이 되었습니다.

<이혜경,  현대 문학상 수상 소감중에서>

 

집안의 풍운아처럼 재산을 야금야금 독식한 큰 오빠. 독신으로 잡지사 기자를 거쳐 새로운 물결에 떠밀려 떠나온 고향에서 학습지 교사로 전락한 나. 한때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아 정신을 놓아버린 미친데기, 명재. 소설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이다.

어머니 제사에 빠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큰오빠의 목소리는 갑자기 후줄근해졌다.
새로 뽑은 승용차의 승차감에 대해 말하던 때의 팽팽함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피시시. 빠지는 바람을 의식한 큰오빠는 다급해졌다.

도입의 세 문장은 이 소설의 복선과 상황과 배경설명 주인공의 현재 위상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후줄근해지는 목소리와 새로 뽑은 승용차, 다급해진 오빠를 방관하듯 지켜보는 나. 매일 달리는 자동차가 큰오빠의 상징으로 대변된다. 큰오빠는 장자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보살핌 덕에 재산을 야금야금 거덜내 마침내 그들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른 형제들이 달가울리 없다. 어머니의 보호막 덕분에 형제들은 대놓고 큰오빠에게 쉰소리를 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오빠에 대한 경멸이 담아있다. 큰오빠는 사업을 벌이네 새로운 일을 하네 재산을 탕진했지만 그것들은 오빠의 명품 오디오와 새자동차 같은 것들로 남아있기도 하다. 서슴없이 이혼을 하고 혼자인 오빠와 나는 다르면서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나는 회사의 새로운 물결에 의해 자리에서 떨려나 지방으로 좌천된다. 비굴해도 나는 자리에서 떨려날 수는 없다. 오랫동안 그 일에만 몸을 담고 있었으니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도 두려운 나이였다. 결국 모멸감은 있어도 다시 고향에 돌아가 학습지 교사로 전락된 자신의 위상을 돌아본다. 미친데기로 통하는 명재는 나의 당고모와 사랑에 빠진 죄로 얻어맞아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래도 아직 이 풍진 세상에서, 사랑했던 여자가 있는 곳에서 버티고 있다. 명재를 보며 나는 큰오빠에게 전화를 건다. 명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매일 실패만 하는 오빠에게 어떤 위안을 하고 싶지만, 형제에게 소외당한 오빠에게 명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 옛날의 명재가 이 풍진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남아, 허기지면 먹을 것을 찾고 뭇사람 앞에선 추레함을 뿌끄러워할 줄도 알더라고. 나는 왜 그 이야기가 꼭 하고 싶었을까.

친구들에게 조차 달라진 내 위상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나. 그렇게 되버린 나를 나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미친데기 명재가 정신을 놓은대로 그 세계를 질긴 잡초처럼 적응하며 살아가듯 그래야 한다고, 오빠에게 말하고 싶었던 나. 이제 그만 방황을 접고 다른 형제들처럼 잡초처럼 살아보라고, 적응하며 살아보라고 꼭 말하고 싶었던 나.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징한 고갯마루에서도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나... 

세 번째 만에 이 소설의 의미를 간파했으니 잡초처럼 적응하게 된 것일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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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14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세상의 큰오빠들은 집안의 재산을 야금야금 독식할까요?
이혜경 씨가 현대문학상 수상했어요?^^

플레져 2006-03-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오빠의 딜레마는 어머니에게서 나오는가봐요.
소설속의 어머니가 바람막이가 되주어서 몹시 언짢았어요.
집안의 재산 = 큰오빠꺼, 라는 거 요즘 세상엔 안먹히죠 ㅎㅎ
이혜경씨가 2002년도에 수상했어요 ^^

mong 2006-03-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에서 화악-이 소설이 읽고 싶어지네요 ^^

플레져 2006-03-1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께 삐끼가 되면 좋으련만~ ㅎㅎㅎ

반딧불,, 2006-03-1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플레져님 글이랑 무비님 글은 몽땅 다 읽고싶게 만드는 저력이 있으시니 뭐.ㅠㅠ

플레져 2006-03-1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저력이라고 하시니...쑥쓰러워요 ^^:;

2006-03-1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