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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지기 쉬운 반석 - 베드로의 내면세계를 찾아가는 여행
마이클 카드 지음, 임혜진 옮김 / IVP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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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베드로, 그는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가?

 

성경을 제대로 읽는데 큰 장애물 중 하나는,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익숙하다는 점이다. 모처럼 성경을 통독하고자 창세기를 폈다. 천지장조와 인간의 타락, 노아의 방주와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도 친숙해서 서너 장을 넘어가기도 전에 좀 식상해진다. 내용이 엇비슷한 복음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한 설교를 마태복음에서 또 하고 계시며, 마태복음에서 행한 기적을 누가복음에서도 반복하신다. 자칫 성경 읽기는 이미 읽은 소설을 다시 읽는 김빠진 경험이 되기 쉽다. 익숙함은 종종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허나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은 구약의 창세기와 출애굽기요, 신약도 공관복음서 정도다. 이 경계를 넘어서면 성경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내세울 것이 못된다. 그나마 익숙하다 생각하는 성경의 이야기들조차 정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종종 마음을 가다듬고 복음서를 정독하곤 한다. 그 때마다 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낯설고 새롭다. 내가 알고 있던 인자하고 부드럽고 사랑 많으신 예수상이 정작 복음서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분은 파격적이고 때론 거칠며 도무지 타협점이란 없는 가까이 하기 쉽지 않은 인물로 발견될 때가 많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님은, 성경을 꼼꼼히 살펴보니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일 경우가 왕왕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다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 성경을 깊이 읽고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카드는 우연한 기회에 동구권의 고대 교회에 들렀다가 교회 벽면에 그려진 베드로의 성화를 보고나서 그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표면적이고 당시 유행에 따른 베드로의 모습을 넘어, 성경이 보여주는 베드로를 재발견한다. 저자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를 깊이 살펴보며 베드로의 내면 세계를 추적한다. 베드로의 내면 세계는, 그저 한 사내의 정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모해 가는 베드로의 내면, 즉 베드로의 내면 탐구는 곧 예수님을 만난 한 사내의 내면의 기록이 된다. 그의 내면을 탐구하면 그의 내면에 가 닿은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마이클 카드는 베드로의 일생을 세밀하게 그려냈는데, 그 그림은 동시에 시몬이란 갈릴리 어부를 교회의 반석으로 만드신 예수님을 손길을 비추는 훌륭한 거울이 된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게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깨어지기 쉬운 사람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깨어지기 쉬운 사람의 실패와 좌절과 회복을 따라가며 베드로가 예수님이 이름 붙이신 반석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복음서에서 좌충우돌하며 예수님을 알아가던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여전히 결점이 있지만) 훌륭한 교회의 기초가 되고, 베드로전후서에서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반석(산 돌)이라 칭하며 그 자리로 초청한다. 베드로의 일생을 돌아보건대, 이 초대는 예수님이 주시는 약속이자 소망의 시작이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다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저자는 베드로를 탐구한 결론적 소망으로 제시한다.


마이클 카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새롭고 깊게 읽는 본을 보여주었다. 베드로에 관해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가 성경에 담겨 있을 줄이야. 예수께서 이토록 세밀하게 베드로의 내면에 다가가셨을 줄이야. 아니다, 어쩌면 성경이 다양한 변주와 화음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이클 카드는 성경에 담긴 베드로라는 한 곡조를 살려내서 우리에게 들려준 음유시인인 듯싶다. 또 아브라함과 베드로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새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신앙의 안내자다. 세밀하고 깊게 보는 눈, 잘 듣는 귀를 가진 복된 친구, 닮고 싶은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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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의 자녀 - 친밀한 소속을 부르짖는 마음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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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잃어버린 아빠의 음성을 찾아서



잃어버린 아빠의 음성

사춘기를 지나며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에 변화가 있었다. ‘아빠’라는 말 대신 ‘아버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로는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할 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표식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아버지’라는 호칭만큼 아버지를 내게서 구별하고 한층 떼어내려는 내면의 시위였다. ‘아버지’는 ‘아빠’보다 객관적이고 공식적이며 정이 덜 담겨 있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자유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아버지’란 호칭은 사춘기 시절 내 편에서의 독립선언이었다.


‘아빠’와 ‘아버지’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일단 건너고 나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춘기 나의 독립선언 이후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라는 호칭만큼 점점 더 공식적이고 소원해져 갔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아빠’라 부르던 시절에는 아빠와 아들 간의 애틋한 추억이 남아있다. 허나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빠’ 시절과 같은 정겹고 즐거운 기억은 없다. 처음 내가 자유를 찾기 위해 사용한 ‘아버지’라는 호칭은 내 인생에서 ‘아빠’를 떠나보내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이후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아빠’라는 단어가 내게서 사라진 것이다. 오직 ‘아버지’만 있었고, 그 ‘아버지’는 ‘아빠’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아빠를, 아빠의 음성을 잃었다.


아바의 자녀

‘아빠’는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언어다. 세 살 먹은 딸아이가 내게 요청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너무 당당하단 생각이 든다. 내 딸은 너무도 당당하게 아빠인 내게 청하고 칭얼대고 얘기한다. 아빠 놀자, 아빠 그림 그리자, 아빠 아이스크림 사줘, 아빠 밖에 나가자... 부모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요,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생산적일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녀석은 아빠에게 천연덕스럽고 당당하게, 때로는 뻔뻔하게 다가온다. 내가 아빠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에게 ‘아빠’는 어떤 상황에서도 맘 편하게 부르고 기댈 수 있는 이름이다. 나도 그런 딸아이가 그저 좋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진리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다 알고 있는 명제인지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알고 있는가는 확인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라는 진리는 머리로 백번 인정한다고 무슨 유익이 되는가. 내면 깊은 곳에서 인정하고 매일의 삶에서 누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지식이다. 이 책의 저자 브레넌 매닝이 전달하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논리적 지식이 아니다. 우리 내면의 모습, 그 깊은 곳에서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 삶과 확신을 다룬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이심을 ‘가슴으로’ 알고 있는가 점검해 준다.


그 자신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젊은이에서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가 알콜 중독이란 처절한 실패를 겪고 그 역경을 이겨낸 사람으로서, 브레넌 매닝은 이 책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사랑받는 자, 곧 아바의 자녀임을 보여준다. 절대 무차별한 사랑과 긍휼을 지니신 분, 우리 망가진 모습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받으시는 분,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종교인이 될 필요가 없다. 자신을 고쳐 보려 몸부림치거나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안간힘을 쓰다 지쳐 쓰러질 이유도 없다. 자기 모습에 실망하여 죄책감의 그늘에 머물 까닭이 없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이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의 ‘아바’가 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그 사실을 알기를 애타게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빠’다.


진정한 ‘아바의 자녀’였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받고 기뻐하시는 ‘아바의 자녀’다. 다만, 너무 오랜 동안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이름이다. 매닝은 ‘아바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적용되어야 할 우리 삶의 영역들을 짚어간다. 거짓 자아를 버리고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장 자기답고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아바의 긍휼을 닮고 열정을 회복한다. 온전한 한 인간이 된다. 아바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서 어린아이가 됨을 뜻한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다. 아빠가 보고 있는 동안 어디서도 당당하고 자연스런 내 딸아이처럼, 아바이신 하나님 앞에 나도 그럴 수 있겠다. 그분은 우리의 아바, 우리는 아바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아빠의 음성을 찾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그렇다. 시간은 사라지고 사랑과 즐거움과 열정만 남는다. [아바의 자녀]는 책 전체가 저자와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관계에 대한 감미롭고 열정적인 고백과도 같다. 저자는 설명하고 처방하려 들기보단, 고백하고 자기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고백을 듣다보면 어느덧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가 고백하는 아바의 넓은 품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오랜 동안 잊었던 아바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저자는 권한다. 매일 매순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약속과 그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의 일상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은혜와 섭리를 발견하라고. 브레넌 매닝은 우리가 잃어버린 아바의 음성을 우리 가슴에 전해주는 전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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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아버지 -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통한 복음의 핵심 재발견
톰 스매일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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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P Book News]에 기고한 글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잊혀진 것들

 

제목만 보고 이 책이 감동적인 영성서적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성부 하나님에 관한 신학서적에 가깝다. 성부 중심의 신학을 다루고 있고, 문체도 대중적이기보다는 학문적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려면 다소 집중된 시간이 필요하다. 외따로 시간을 내어 밑줄을 긋고 생각을 적어가며 읽어야 한다. 오가는 버스에서 읽다가는 내용이 잘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많은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할 것이며, 이 책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고된 읽기를 요청할 것이나, 그 수고에 값하는 결실을 맺어줄 것이다. 그 열매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재발견이다.


 

이 책의 저자 톰 스매일은 현대 기독교가 성부 하나님을 잊었다고 말한다. 예배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지만, 교회는 실상 성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 교회는 예수님 또는 성령님 혹은 다른 은사와 제도에 집중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 혹 성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다 해도, 성부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관심의 비중은 현저히 적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에 집중하여 성육신과 십자가의 은혜에 눈물 흘린다. 성령님의 강림과 성령의 은사를 간구한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어느 편이든 하나님 아버지는 잊혀지거나, 아니면 오해된다. 성부 하나님은 엄하신 분이라, 좀더 온유하고 우리가 대하기 편한 예수님께 집중하거나, 우리가 열심히 구하기만 하면 주시는 성령님께 호소하게 된다. 양쪽 모두 성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자, 성경이 말하는 ‘성부 중심의 신앙’을 벗어난 일이다.


 

저자는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령과의 관계, 성부의 아버지됨의 의미, 성자의 아들됨의 의미, 우리의 자녀됨의 의미를 명징한 신학과 언어를 동원하여 설명하며, 그 뒤에 담긴 성부 하나님의 주도성과 중심성을 확인해준다. 우리가 잘 공감하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이 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던 것임을 발견할 때, 성자께 집중하던 우리의 관심과 감사는 성자 너머에 있는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성령의 임재와 은사조차도 그것을 주시며, 뜻을 갖고 주시는 성부 하나님의 우위성이 전재되지 않는다면, 그저 우리의 필요에 따라 구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믿는 모든 영역의 배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성과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성부의 중심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 신앙이 중심을 잡고 균형을 이루게 됨을 알게 된다.


 

성부 중심의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순종’과 성숙이다.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감미로운 순종’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선성을 인식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며 우리 삶에 요청된다. 아버지와 함께 잊혀졌던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들이, 우리가 아버지 중심의 신앙으로 방향을 선회할 때 다시 자연스럽게 회복된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때, 현대 교회는 ‘순종 중심의 기독교’로 거듭날 수 있다.


 

저자는 은사주의 갱신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80년대에 이 책을 썼는데, 저자가 책의 곳곳에서 우려하는 갱신운동의 모습은 현재 한국교회의 일반적 특징과 무척 닮은꼴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정작 하나님 아버지됨의 의미를 잃어버린 우리 세대에게 이 책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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