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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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자신을 좌파라고 떳떳이 밝혀도 예전처럼 남산에서 잡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저자는 스스로가 B급 좌파라고 칭하는 당당함을 보이고 있는데,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자를 '빨갱이'라고 욕할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이 사회가 좌파에 대하여 관용적이 되었다는 뜻이고, 이는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 그리고 민중들의 힘에 의한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책은 70여 편에 가까운 에세이로 되어있다. 이 에세이들은 하나의 통일된 초점을 가지고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위선적인 지식인에 대한 경멸, 복지부동의 정치권에 대한 분노, 아직 덜 성숙한 '미개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이러한 초점은 문화 예술에서 보수 신문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이르고 있어서,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그의 시선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것 같다. 물질적인 성장을 구호로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왔던 우리 사회의 각 분분들에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뒤에 쳐저서 썩고 있는 각종 현상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식과 시선들을 풀어헤치는 그의 글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칭하고 있던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사회의 상처들을 드러내 보이면서, 나를, 그리고 많은 독자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또한 지식인과 지도층은 어떠해야 하는지, 아니 최소한 어떡하면 안 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고, 사회의 소외받은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위선에 대한 혐오와 약자에 대한 사랑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글들에서 어떤 학문적 깊이를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B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예리한 시각은 단연코 A급이다. 그러하기에 한국 사회의 병폐들을 알고 싶다면, 그리고 그 병폐에 대한 분노와 민중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박노자와 김규항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 그가 이 책에서 지식인을 '내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라고 했던것처럼, 내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의 나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이 책을 통해서 정확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각 에세이는 약 4페이지의 분량을 할당하고 있어서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 내용도 무척 쉬우며, 어려운 용어는 전혀 없다. 또한 한 개인의 삶과 생각, 그리고 비장함이 잘 녹아 있어서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한 두편씩 읽고 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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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라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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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우의 노래

                    서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하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겨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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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
          
                            오세영

도서관은 골 깊은 산이다.
등산하듯 층계를 올라
어두운 서고(書庫)를 뒤진다.
이 골짜기는 역사 서가(書架), 저 산봉우리는 철학 서가,
저 능선은 과학 서가
고서(古書)는 이끼낀 바위로 앉아 있고
사서(史書)는 칡넝굴로 얽혀 있다.
이곳 저곳 걸으며
화두(話頭) 하나 참구한다.
나는 누구일까
청노루, 백사슴 다 아는 산 길에서
길을 잃고 망연히 헤매는데
앞에는 문득
깎아 진른 듯 가로 막고 서 있는 절벽.
그 까마득한 벼랑에 핀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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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관세음의 노래

                             서정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넌출 밑에
푸른 숨결은 내것이로다.

세월이 아조 나를 아조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오르는 가슴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것이로다.

오고 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달이여.
땅 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 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더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
이 한만디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그만 향낭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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