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망한 왕조의 늙고 병든 마지막 왕이었다. 酒色은 나의 덧없는 나날이었고 폭정은 내 위대함이요 악명은 역사가 되었다. 나의 연호 4년 己未年 크고 붉은 말 한마리가 광화문을 네 바퀴 돌고 난 다음 음울한 울음을 울고는 사라졌다. 거북이가 웬 장수의 동상 밑에서 빠져나와 교보빌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우 여러 마리가 모 신문사로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마리가 편집국장 데스크에 올라앉았다가 없어졌다. 덕수궁에서는 금계와 참새가 교미하고, 전갈좌가 밤하늘을 기어가 황소를 물어뜯어 죽였다. 피 묻은 별이 아현동 민가에 떨어졌는데 땅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더니 거기에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다. 서울의 수돗물은 온통 벌건 녹물이었고 어떤 중이 曹溪寺 대문을 열고 보니 큰 배가 절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다. 한강 고수부지에 물고기들이 올라와 죽었는데 고기들이 모두 외눈박이였다. 수만 마리의 바퀴벌레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녔다. 모기떼가 해를 가렸고 밤에는 고궁의 오래된 회양나무가 사람 소리를 내며 울었다. 다리가 뚝 끊어져 달리던 통학 버스가 물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들이 애비를 죽여놓고 집을 불지르는 일도 있었다. 또 큰 개가 서쪽에서 인왕산 언덕에 와서 대권을 바라보고 짖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성 안에 개들이 길 우에 모여 혹은 짖기도 하고 혹은 울기도 하다가 얼마 후 흩어졌다.
노왕이 이제 임종을 맞는 차에, 시녀들이 와서 나의 데스 마스크를 뜨겠다고 법석이었다. 아, 나는 그거 필요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내 나이 수만큼 나의 죽은 가면을 떠가지고는 이제 나더러 그것들을 무대 중앙에서 깨뜨리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늙은 왕은 울상이 되어 나의 석고상을 들고 관객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내 얼굴로 집중되는 핀 조명: 빛의 막 속에서 왕은 딱 이 한마디만 하고 내 얼굴을 깨뜨렸다.
"이건 삶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