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하게 아파오며 피하기만 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철학이란 것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그 산을 넘기가 쉽지 않은 것인가, 에 대한 고민과 한번쯤은 이 문턱을 넘어서 알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금 <서양철학사를 보다>란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늘 문턱의 초입에서 이 문제를 통과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등바등하고 있었던 나날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면서 늘 다시 처음 그 자리로 오는 나로서는 이 한번의 문턱을 넘기를 고대하며 간절함을 담아 한 장 한 장 넘기게 된 것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사색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완성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지식을 탐구해가는 과정’을 의미해요.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는 첫 강의 시간에 “나는 제군들에게 철학(Philosophie)이 아니라 철학 하는 것(Philosophieren)을 가르치고 싶다.”라고 말했지요.
마지막으로 철학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적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에요.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열심히 가더라도 목표에서 멀어지기만 하지요. 인가는 편리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과학을 연구했어요. –본문
하나의 정해져 있는 틀을 배우는 것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사색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말을 보며 그저 단순하게 암기하는 것이 아닌 왜 이러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눈 앞에 있는 웅덩이는 보지 못한 채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던 탈레스는 하녀에게 쓴 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가 당시 고민했던 이 세상의 근원이 물이라고 보았으며, 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며 이 안에는 영혼이 포함되어 있다던 아낙시메스의 이야기는 현재의 과학으로 보면 틀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이러한 사유들이 쓸데 없는 고민이 아닌 그들이 주변에 있던 세계를 알아가기 위한 고민이었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주는 의미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강조햇어요.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중용은 1과 5의 중간이 3이라는 식의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예요. 예를 들면 만용과 비겁함의 중용은 용기고, 헤픔과 인색함의 중용은 절약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때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식사의 적당량에 비유할 수도 있어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저마다의 식사량이야말로 포식과 소식의 중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간음, 절도, 살인 등과 같은 것에는 중용이 있을 수 없지요. 이것들은 무조건 악이랍니다. –본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학창시절 빠트리지 않고 꼭 알아야 할 내용이기에 그의 이름과 중용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인데, 짧게나마 이 책을 통해 바라본 중용의 참 뜻에 대해서 그 동안 그야말로 허투로 알고 있었구나, 를 깨닫게 된다. 어떠한 상태에 있어서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중용인줄 알았던 나로서는 1과 5사이의 3이 중용의 면모라고 보았다면, 저자가 들려주는 중용의 모습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드러난 올바른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로 자리잡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설과 원죄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왜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짓고 그 죄로 하여금 벌을 받아 고통을 받게끔 만들어 놓으신 것인지에 대한 물음까지 이어가게 되는데, 이른바 ‘자유의지’라 불리는,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 의지를 갖게 한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배려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그 자유의지가 있기에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넘어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이자 철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바라는 ‘전지전능하고 영원히 행복한 상태’를 신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어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철학은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본문
고대철학에서부터 중세, 근세, 현대 철학까지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물고 물리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그 당시의 고민들은 이렇게 변해왔구나 등 철학이라는 거대하고 딱딱한 철옹성의 지대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하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보다도 이 안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배우는 것은 물론 그 동안 멀게만 느꼈던 철학에 대한 기본을 배우고서 그 다음 단계로 뛰어 넘을 수 있는 주춧돌로서 이 책의 역할은 톡톡히 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이 즐거울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보람차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