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과학에는 절대적인 지식이란 없고 지식을 가장 잘 획득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각각 개인과 소집단의 다양한 관점과 필요에 따라 질문 자체도 달라지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과학이 유일무이한 진리를 추구하고 또 그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꿈이었습니다. 과학의 초창기에 뉴튼 같은 사람은 이론 하나만 잘 만들면 신이 정말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가 하는 섭리를 알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멋진 꿈이지만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그의
장대한 스펙과 감히 넘볼 수 없는 신화를 넘어 과연 그는 왜 철학과 과학이라는 것을 동시에 바라봐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수학의 경우 공식으로 참임을 증명한 경우 번복되는 일이 없지만 과학의 세계에서는 오늘까지 진실이었던 것이
내일은 거짓이 될 수 있기에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다윈주의에 입각하여 바라보며 하나의 것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품고서 바라봐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나 과학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하나의
진리이자 그것이 옳다라는 관점이 팽배하게 퍼져있기에 다윈주의적 사고를 가진 이들을 쉬이 만날 수 없기에 그는 과학이라는 분야에 더욱더 이러한
사고가 퍼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학창시절 끊임없이 과학이라는 과목을 배워왔던 우리는
사과를 보며 뉴턴의 공식을 떠올리고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는 늘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과학의 기반이 되어 알게 모르게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과학이 필요했던 것은 시험을 보는 그 순간, 답을 찾기 위한 과학이 내겐
전부였다. 화학이나 물리, 생물은 물론 지구과학을 배울
때에도 어떠한 물음에 대한 '왜'라는 생각 대신에 답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찾기에만 급급했으며,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 라는 사실에 대해서 대체 99도도 아니고 110도도 아닌 왜
100도에서만 끓는 것인가, 에 대해 단 한번의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생각의 개념이 아닌 그저 진리였으며 그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그것이 밝혀졌느냐, 라는 단계까 아닌 결과만을 알고 그것만 알면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의 전부를 아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 이상의
질문을 할 필요성도, 혹여나 누군가가 나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쓸데 없는 질문이라며 코웃음을
치며 넘겼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빛을 더 얻게 될 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르는 것을 보고 연구하는 만족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신의 창조물은 무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끝없이 탐구하며 진보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전망이다."
그래서 프리스틀리의 겸허한
과학철학에 의하면 과학을 하면 할 수록, 우리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이 더 많이 나오고 그렇기 때문에 탐구하는 기쁨을 끝없이 느낄 수 있습니다.
과학은 무슨 진리를 알아내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 배울 수록 연구할 내용이 더 늘어나는 사업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겸허함이 다윈주의의 기초가 됩니다. 본문
그저
당연한 것들이라 넘겼던 것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포퍼와
쿤의 이론을 통해서 그들이 나누는 쟁점들을 바라보며 그 동안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것들에
대해서 스스로 뒤집어 그것들에 대해서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 늘 바라보려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학창시절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에 대해서 내가 배웠던 것들은 이제는 틀린 답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과학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답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모에 해가는 그 안에서 계속해서 독려해 나가며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데 과학은 진보하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진리를 향해가는 것은 아니라는 쿤의 이야기처럼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찾아 나아가야
하는 모습들이 진정한 과학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