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을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무엇이고 이 안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마지막 장까지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서 읽어내려 가는 것이 보통의 독서 방법이었으며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에 떠오르는 느낌들을 조합하여 리뷰를 올리는 것으로 나의 일독은 끝나게 되곤 했다. 그 안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들을 쫓아서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독자로서의 몫을 다한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책을 읽는 동안에도 페이지를 넘기며 그 전과 후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에 대한 흐름만을 인식하면 나의 독서는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저 페이지를 넘기며 읽는 것이 나의 독서법이라면 저자는 책 안에서 주인공들의 잠재적인 심리적인 요인이나 그 안에 담겨 있는 드러나지 않는 의미들에 대해서 파헤치고 있었으며 그저 줄거리만 아는 것이 문학을 읽는 것의 전부라 여겼던 나에게 그는 문학을 마주하는 자세는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문학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면 정신분석 역시 한 개인이 겪어 온 삶의 역사를 재정리한다는 점에서 이 상이한 두 분야는 비록 그 목적과 기법은 다를지 모르나 그 탐구 대상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그리고 문하고가 정신분석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같은 배를 탔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본문 셰익스피어에서부터 샐린저까지 저자는 들어보았을 고전들을 통해서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이미 읽어본 작품들을 저자의 이야기들을 따라서 읽다 보면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내용들의 하나 둘 드러나게 되는데 분명 동일한 작품을 읽었음에도 내가 인지한 내용과 프로이트의 시선을 통해 그가 바라본 문학작품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읽은 책과는 또 다른 책을 보는 듯한 마음으로 책일 읽어나갔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작품을 보면서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부친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한 모습들이 나오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자신의 삼촌을 위해 칼날을 겨누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지금만이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선뜻 삼촌을 향해 그 복수를 실행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햄릿에게 김적인 동요를 일으킨 두 가지 ㅇ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첫째, 그가 갖고있던 거세공포는 왕위에 오른 삼촌을 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그 자신은 결코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근친상간적 욕구를 과감하게 실천한 삼촌에 대해 자신이 과연 징벌을 가할 수 있느냐 하는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이라는 측면에서 그 자신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른 삼촌이기 때문이다. -본문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는 <어린왕자>를 보노라면 단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내용들을 꼬집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코끼리를 먹어버린 보아뱀을 보면서 모두다 하나같이 ‘모자’라고 이야기하는 어른과 같이 나 역시도 ‘모자’라고 보는 장면에서 동심을 잃어버린 서글픔만을 느끼고 있었는데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어머니의 뱃속에 든 아이를 상징하며 모자는 여성의 성기를, 뱀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저 순수하게 그린 아이의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저자는 이 그림이야 말로 어린 아이의 관심이 담겨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아직도 100% 수긍하기가 어려운 부분이었다. 어린 왕자가 고아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고의는 아니겠지만 그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다. 작가는 그를 낳은 부모에 대해서 아예 언급조차 없다. 마치 혼자 스스로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정성껏 돌보던 화산들과 바오바브 나무의 존재는 결국 어머니의 신체를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혼자인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별을 떠났지만 사막에서 만난 여우로부터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우고 자신의 별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곧 관계의 중요성이었다. –본문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그의 이야기들을 듣노라면 그녀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라 이야기하는 부분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도 겪고 있었다는 정신병의 일종이 그녀에게서도 발견 되었으며 특히나 어린 시절 그녀가 겪었던 끔직한 일들에 대해서 그 때의 일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마치 그녀가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은 그녀로부터 나온 결말이라는 이야기에서 착찹함이 느껴진다. 두 의붓오빠에 의한 지속적인 성추행은 버지니아뿐 아니라 언니 바네사에게도 똑같이 가해졌지만, 바네사는그런 충격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반면에 버지니아는 일생을 두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두 자매는 성격 면에서도 서로 매우 달랐다. 바네사가 모성적인 측면이 강했던면 버지니아는 전혀 그러지 못했으며, 오로지 지적인 면에서 언니를 능가했을 뿐이다. 다만 버지니아는 오로지 지적인 면에서 언니를 능가했을 뿐이다. –본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아직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기에 이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반 정도는 이해가 가고 반 정도는 아직도 물음표로 남아 있는 부분들이 있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 저자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구태여 저자가 말하는 대로만 이 이야기들을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문학을 바라보는 방향을 정해진 길이 없을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