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읽는 세계사 - 하트♥의 기원부터 우주로 띄운 러브 레터까지 1만 년 역사에 새겨진 기묘한 사랑의 흔적들 ㅣ 테마로 읽는 역사
에드워드 브룩 히칭 지음, 신솔잎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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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디지털감성 e북카페」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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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잘 읽히는 번역이라 좋았다. 그런데 그에 비해 제목을 ‘사랑으로 읽는 세계사’라고 한 것은 약간 아쉽다. 오히려 표지에서 부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문구 중 ‘1만 년 역사에 새겨진 기묘한 사랑의 흔적들’이라는 내용을 살린 제목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은 사랑이라는 맥락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짚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 혹은 현상을 둘러싼 인상적이거나 특이하거나 기이한 사건들의 모음집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대건 작가가 이 책의 추천사에서 그런 점을 잘 짚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인류의 사랑에 관련된 유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방대하게 소개하며 그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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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은 사랑의 사건은 무엇일까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례가 있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단테와 베아트리체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맞아, 이들의 이야기가 내게는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러브스토리였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보통 사랑의 가치는 오랜 시간 함께하며 쌓인 애정의 양과 깊이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에서 감동을 주기 마련인데, 평생 단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던 베아트리체에게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을 느끼며 감동과 행복을 느낀, 그러면서도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남긴 단테의 사례는 내게 뭐라 표현하기 힘든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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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흔적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포옹하는 형상으로 남겨진 유해들이었다.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며 영원한 안식으로 접어든 커플들의 형상은 내게 또 다른 감동이었다. 손을 꼭 잡은 모습, 부둥켜 안은 모습, 결코 분리되지 않으려는 의지가 분명히 느껴지는 마지막 순간들이 내게 사람의 온기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암석 재료로 남아 있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형상들 역시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가치란 무엇인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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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흥미로운 이유는 아름답거나 빛나는 느낌뿐만 아니라 기괴한 형상의 기록으로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보여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죽었지만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 시신을 자리에 앉혀 여왕 책봉식을 거행했던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의 이야기나 정조대 이야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나 정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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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필립 라킨이라는 시인이 쓴 「아룬델 무덤」이라는 시의 다음의 내용이다. “두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바로 우리 중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 말이다”(p.127) 저자는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쓴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부분을 마지막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바로 우리 중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 말이다” 모든 것이 흩어져 사라질지라도 마지막까지 남을 그것, 세계의 본질,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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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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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 유래는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자신들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으로부터 나왔다. 이런 특징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타의로 자신의 존재 거점을 이동 당할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의 이주 역사는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에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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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번역 출간된 폴 윤의 소설집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특징은, 각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국계이기는 하지만, 꼭 한국계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 있다. 이 말은, 각지에 흩어진, 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물들의 인생 이야기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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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인종이나 민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외롭고 슬프고 뿌리를 뽑힌 것 같은 인간 존재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인 특유의 서정적 특징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이름에서 한민족의 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일 뿐, 그 이름이 그리스인이건 아프리카인이건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배경에 두고 있다 하여도, 이야기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점에서 폴 윤의 소설은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잘 융화된 사례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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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은 총 일곱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작품은 독립적이면서도 응집력 있는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시간과 공간, 서로 다른 나라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정체성, 소속감, 그리고 문화 간의 충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능숙하게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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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의 가장 큰 미덕은 '디아스포라'라는 주제를 고정된 관념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고통받고 또 견뎌내는 개개인의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상실감, 고독, 그리고 뿌리내리려는 지난한 노력들이 꾸밈없이 펼쳐진다. 어떤 이야기는 극적인 사건으로 독자의 심장을 움켜쥐고, 어떤 이야기는 일상 속 작은 몸짓과 섬세한 심리 묘사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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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에 대한 평가 중 ‘절제되면서도 시적인 문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에서 비슷한 표현이 있었음을 생각나게 한다. 삶의 고단함과 잔혹성이 점철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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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지 않는 지구 - KBS <환경스페셜> 김가람 PD의 기후 위기 르포
김가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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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나 기후위기와 관련한 책이나 기사들을 접하거나, 그에 관한 글을 써야 할 때 늘 떠오르는 책 제목이 있다.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C.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사람이 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란 책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풍요로울 수 있다’다. 다만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풍요나 만족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기준이 재정의되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답은 슬며시 바뀐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질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라며 핀잔을 듣기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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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지 않는 지구』는 위의 책이 던지는 물음에 왜 그렇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답을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과도하게 생산되는 의류, 과도하게 생산되는 음식, 과도하게 생산되는 전자기기 등 물품이 넘쳐나는 시대. 풍요로워 보이는 시대. 하지만 이 풍요는 진정한 의미에서 풍요가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수단으로서 점점 본질이 변질되고 있다. 수요를 초과하는 너무나 많은 생산품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뒤덮기만 한다면 문제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이것이 쓰레기로 바뀐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의 본질은 멀쩡한 것도 자본주의의 순환을 위해 쓰레기로 취급받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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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생산과 유통, 폐기’라는 사이클은 이 책이 문제 삼고 있는 환경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순환시스템이 자리 잡게 된 초기에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쓰레기로 변하는 물품들이 쌓이고, 이것들이 환경 및 기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고, 결정적으로 인류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논란은 불거졌다. 의식 있는 사람들의 문제 제기는 극단의 반응과 평가를 낳는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감각은 착각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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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음 아픈 것은, 과도한 생산과 유통, 폐기로 인해 빚어지는 환경 문제나 기후 위기의 피해를 가장 먼저, 많이, 치명적으로 입고 있는 것이 제3세계의 사회적 약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이라는 사실이다. 휘황찬란한 최첨단의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참하고 몰상식한 대우를 일부 국가와 사회계층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명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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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지 매일 목격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진실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실 가려져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우리는 어느 정도 진실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먼저 불편을 감수하며 손해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결국 인류는 멸종하고 말 것이다. 그때가 곧 지구가 진정한 안식을 취하게 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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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들 - 희미한 질문들이 선명한 답으로 바뀌는 순간
김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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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지만 모든 무형의 것들에 의미와 함께 궁극적으로 형태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유형의 것들에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의미를 새롭게 더함으로써 존재에 풍성함을 더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삶에서 의미의 역할과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동물과 확실히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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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을 유무형의 상품으로 가공하여 대중들에게 전하는 일이 기획이라면, 기획자야말로 가장 흥미롭고 신나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도 있듯이, 기획자들의 고충도 상당할 것이란 것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글 한 편 써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본 사람이라면, 언어를 다루는 것이 주 업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이라는 일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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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분명하고 불투명한 것에 윤곽을 그리고 색을 채우고 입체를 더하는 일의 시작은 항상 보이지 않는 개념적인 것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단어나 개념에 대한 정의, 이것이 분명할수록 방향을 잡는 것도 수월해질 것이다. 관심이 있는 것이나 흥미 있는 일들도 그저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정의를 뚜렷하게 내려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심이라는 것도 보여줄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내지 않으면 그 가치가 반감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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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일의 성과나 결과를 보면서 그 과정에 대한 가치를 놓칠 때가 많다. 중간 과정에서 얻은 수많은 실수나 수정된 것들을 통해서도 배울 것은 많고, 그것이 오히려 후에 있을 업무에 더 좋은 통찰이나 문제해결의 단서를 제공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수집광처럼 다 떠안고 살 수는 없다. 인생에 허락된 저장 용량에도 한계는 있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는 적당한 기준선에서 정리하고 버리는 지혜도 필요성도 인생에 필요한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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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들』은 기획자로 일하는 저자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기는 무한한 가능성들, 그리고 그 가능성들이 어떻게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풀어놓은 책이다. 이미 존재하는 탁월한 문장,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문장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만의 해석과 의미를 더해 업무에 활용하거나 생활의 지혜로 변환시키는 저자의 언어 감각이 무척 인상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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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국내 유일 명화 103점 수록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ㅣ 현대지성 클래식 64
호메로스 지음,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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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처음 든 느낌은 ‘뭐, 이런...?’이었다. 이 거대한 서사시의 발단이 ‘헬레네’라는 한 여인 때문이라는 사실에 약간 맥이 빠졌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한 납치 문제 이상의 정치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한 여인을 되찾겠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영웅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며, 신들까지 나서서 인간사를 흔드는 이야기다. 이게 과연 합당한 이유인가? 정말 이 정도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자연스럽게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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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질문은 점점 더 깊어진다. 아킬레우스는 전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계기로 전장에 복귀해 복수에 나선다. 그의 분노는 정당하고, 슬픔은 진실하다. 하지만 이 모든 시작이 '명예를 빼앗겼다'는 자존심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생각하면 허탈해진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다툼도, 트로이와 그리스 간의 전쟁도, 그 끝없는 죽음도 어쩌면 ‘별것도 아닌 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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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문득 『삼국지』가 떠올랐다. 조조는 동탁의 권력을 몰아내겠다는 명분으로 거병했고, 유비는 한 왕실의 적통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싸운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야망, 분노, 오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갈등을 증폭시킨다. 『일리아스』와 『삼국지』 모두에서, 인간은 대의와 명분을 입에 담지만, 그 이면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들-질투, 욕망, 자존심-이 꿈틀댄다. 그리고 그 감정 하나가 수천의 목숨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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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해부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자존심에 스친 작은 상처 하나, 혹은 상대의 무시로 느껴진 눈빛 하나가 전쟁의 불씨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 감정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한 명이 죽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복수를 다짐하고, 그렇게 반복되는 슬픔의 연쇄 속에서 독자는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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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리아스』가 단지 인간의 비극성과 허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그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그를 찾아와 애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 너머의 인간, 적과 아군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같은 인간’의 얼굴을 본다. 이 장면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왜 이렇게나 별것도 아닌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또 그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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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는 신들조차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전쟁의 신 아레스나 여신 아테나조차 각자의 편을 들어 싸움에 개입한다. 인간은 신들의 장난감 같고, 운명의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작품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죽음을 애도하고,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하는 순간-을 가장 숭고하게 묘사한다. 신의 영역을 넘는 인간의 고통과 용서는, 비록 전쟁을 막을 수 없을지라도, 그 전쟁 속에서 빛나는 인간성의 조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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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일리아스』를 통해 ‘전쟁’보다는 ‘사람’을 보게 된다. 싸움보다는 고통을, 영웅보다는 아들의 시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거대한 역사 속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고 나약한 존재다. 하지만 바로 그 나약함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삼국지』에서 수많은 전투 장면보다 관우의 의리나 유비의 울음이 오래 기억에 남듯, 『일리아스』에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그 죽음을 둘러싼 감정과 연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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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전쟁 속에서 인간은 사랑하고, 슬퍼하고, 후회한다. 그것이 『일리아스』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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