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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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때 한국에는 이른바 진보담론을 형성하는 명 칼럼리스트들이 백가쟁명까진 아니더라도 서로들 필력과 내공을 과시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80년대의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타고난 부지런함과 진중한 역사의식에 기반해 강고하던 기성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글들을 썼다.

물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쌍두마차는 강준만과 진중권이다. 그리고 도올이 있었고, 지금은 거대한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유시민이 있었다. 아,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운영, 리영희라는 거목이 버티고 있었지.  이들 자유주의자들보다 조금 더 좌측에는 박노자와 홍세화라는 좌파의 지성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이 앞다투어 글을 쓰던 시기에는 이른바 우파를 참칭하던 극우세력들의 글은 정말로 웃음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가장 큰 상징은 박정희 군주론을 썼던 조갑제의 책을 그대로 패러디한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이들에게 가리워졌던,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칼럼리스트가 조용히 활동하고 있었다. 글의 아름다움으로 보나, 그 사상적 건강함으로 보나, 또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나 지적 충실함으로 보나 그는 이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뚝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위의 사람들같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들처럼 명쾌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채 기자출신 답게 중도적인 글을 풀어갔던 이유가 클 것이다. 뜨뜻미지근한 것은 한국사람의 취향이 아니니까. 물론 여기서 내가 누구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가는 짐작하실 것이다. 일단 이 정도만 언급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들, 한 때 중도파의 집권을 위해 암묵적으로 결합해 조선일보-한나라당 수구동맹과 싸우던 이들은 마침내 중도세력이 집권한 후 자신의 포지션을 뚜렷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일찌감치 방향을 틀어버린 정운영 선생은 제외한다면  맨 처음 강준만이 (정치적인 글에서)절필을 선언했고,  탄핵을 기점으로 진중권 역시 애매한 글쓰기로 인한 집중포화를 맞고 글쓸 동력을 잃어버린다. 박노자는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을 떠나면서부터 한국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잃어버렸고, 유시민은 글을 쓰기에는 너무 정치에 깊숙하게 발을 담궜다. 도올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홍세화는 순결한 19...가 아닌 순결한 좌파로 남기 위해 스스로의 글을 자신의 틀에 가둬버린다.

결과적으로 이들 대부분은 절필했거나, 예전같이 사람들의 가슴을 치고 양심을 뒤흔드는 글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던 이 사람이 홀로 그런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이름은 고종석이다.

고종석마저 없었다면 지금 '양심적인 우파의 상식적 극우비판'이나 '자유주의자의 신자유주의 비판'을 이처럼 명쾌한 언어로 풀어낼 사람은 없다. 물론 그도 지쳤다. 지금의 상황에서 지치지 않을 '상식을 가진 칼럼리스트'가 어디 있으랴? 그는 이번 책에서 강준만에 대한 (절필의)아쉬움과 (떠날 수 있는)부러움을 동시에 풀어낸다. (강준만 생각, "신성동맹과 같이 살기" 69~71페이지)

그럼에도 나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라는 사실을.  세상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손바닥처럼 뒤집는 이도 아니며, 한 때 입장을 같이하던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고무찬양이 아닌 비판적인 관점을 직필로 풀어놓는 이이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그가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 필화를 일으킨 동아일보의 '김순덕 칼럼'에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그는 이런 조악한 글을 견딜 수 없는,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며,  그것도 취미로 쓴 것이 아니라 이 책에도 나오듯 조선일보에서 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작가이다. 그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책을 사서 읽어보라) 사람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어보고, 세상에 대한 눈을 틔우기를 기원하면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책 소개(?)를 마친다.

P.S  이 책은 수작이다. 그러나 그의 이전 책인 불후의 명저인 '서얼단상'이나 '자유의 무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이 좋았다면 반드시 이 두 책을 사서 읽어보라. 특히 서얼단상. 그리고 김훈이 '부당하게' 독점해 버린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소설가'라는 칭호를 나뉘가질 자격이 충분함을 보여주는 그의 소설들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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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빛낸 명반 50
신승렬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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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책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신승렬입니다.

예전에는 알라딘에 '저는 이 책의 저자입니다'라는 메뉴가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져서 저자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진 듯 싶습니다. (혹시 아직 있다면 알려주세요. 옮기겠습니다)

위에서 아실 수 있듯이 저는 알라딘의 꽤 오래된 단골 고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는 올리지 않고 이 곳에서 저희 책에 관심있는 분들께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무슨 자격으로 이 책을 썼느냐고 물으신다면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른바 문화비평가들보다는 그래도 저희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책의 서문에서 국내에서 몇 안되는 '순수 한국 대중음악 비평가' 자격을 갖추신 가슴 운영자 박준흠님이 저희 대신 말씀해주시고 있듯이 한국에서 이른바 가요비평을 한다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문화비평가 출신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청소년기에 한국 대중음악을 듣지 않고 자란 세대입니다. 그리고 민주화 시기의 문화담론 과잉시기에 문화담론을 쓰면서 음악평론에 접근한 세대이죠. 이들에게는 뿌리깊은 '팝음악 사대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즉, 한국의 대중가요는 서구 팝의 저급 모사물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그래서 이들은 가요를 평할 만한 가요에 대한 애정이 없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정치적 변혁기에 문화를 투쟁으로 바라봤던 그 시각 그대로 한국 대중음악을 평하면서 매우 왜곡된 담론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 가장 큰 피해자를 서태지라고 볼 수 있겠죠)

저희는 그래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90년대를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 사이에 보냈던 이들입니다. 저희에게 가요는 이론서의 실습대상이나 서구 팝과의 비교대상, 혹은 정치나 문화비평 이론의 적용 대상이 아닌,

그냥 "한국 대중음악"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이것이 첫 질문에 대한 저희의 대답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또 다른 예상되는 질문에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대체 너희의 기준은 뭐냐?" 간단합니다. 저희는 저희가 좋아하는 음악을 골랐습니다. 무책임하다구요? 책을 사서 뒷편의 색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감히 단언컨데 90년대에 활동했던 대중음악인 (가수 뿐만이 아닌 연주자와 작사,작곡자, 프로듀서를 총괄해서) 중 언급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겁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가요평론가'연 하고 있는 문화비평가들보다 저희는 90년대에 훨씬 더 많은 한국 대중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통신망을 통해 의견을 나눠 왔습니다. 이번 작업은 그 시절 저희가 나누었던 수많은 '내공대결'의 복기일 따름입니다.

보도자료에서 썼습니다만, 이제까지 90년대 대중음악을 다룬 대부분의 책들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서태지와 그 나머지들, 혹은 유사품"으로 극단적인 문화담론을 생산해 왔던 책이 있었고, 그 반대로 주류 가요시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인디, 혹은 저항가요만을 다뤄 온 정치과잉, 의식과잉의 책들이 있었죠.

저희는 그 어느쪽도 90년대에 대한 잘못된 복기이며, 그들이 무시해왔던 90년대의 주류 아티스트들, 이를테면 이승환이나 015B, 신해철, 윤상, 듀스 등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물론 인기 가수였지만 그들의 응당 받아야 했던 음악적 평가는 언제나 위의 두 가지 담론들 속에 철저하게 무시되어 왔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그들의 자리를 돌려주고자 했습니다. (이들 위주로 인터뷰를 한 것도 그러한 의도입니다)

책 값이 비싸게 책정된 것은 아쉽습니다. 저희 의도는 아니지만요.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희들 책이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신 분들, 혹은 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생각하는 그 시절 팬들에게 적어도 책값 이상의 만족은 드릴 수 있을거라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2006.8.23 저자대표 신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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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소년 2006-09-2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각하고 참 비슷하네.. 하면서 쫒아와보니 90년대 명반 쓰신 분이시군요.. 전 네이버 블로그 당첨자거든요(10명 뽑아서 책 주셨죠.이건 아내 아이디). 그냥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건필하시길!

DJ뽀스 2007-01-0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인데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
 
Clazziquai 2집 - Color Your Soul
Clazziquai (클래지콰이)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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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들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가지 않았다. 즉, 1집에서 성공했던 요인들을 그대로 다시 재활용하는 안일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성공요인이 뭘까?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 - 그러나 결코 트롯풍의 가요음계를 쓰지 않은- 와 가벼우면서도 세련된 리듬, 마지막으로 발랄한 보컬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Stepping out 이나 Gentle rain을 들 수 있겠다) 이다.

이 앨범은 일단 1집에 비해 무겁다. 멜로디는 더 가라앉아 있고 리듬파트는 1집에 비해 간결하고 댄서블한 베이스를 강조하고 있으며 호란의 보컬은 더 거칠어졌다. 이런 특징들로 인해 어떤 곡(Come alive)은 클래지콰이의 곡이 아니라 롤러코스터의 최근 앨범들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리고 이전 앨범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디스코(Fill this night)나 뿅뿅거리는 80년대 뉴웨이브풍의 곡(Be my love)도 있다. (이 곡에는 심지어 80년대를 풍미했던 말춤을 기억케 하는 말 울음소리마저 삽입되어 있다. 나같은 노땅들에게는 참 반가운 사운드이다 ^^)

그러면,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성공적인가? 가상한 노력이라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솔직하게 말해 자꾸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집은 그야말로 넘쳐나는 아이디어들로 채워진 앨범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아이디어가 이미 상당부분 고갈된 상황에서 치열한 노력으로 만들어낸 앨범으로 보이는데, 음악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찬 아이디어 하나를 이길 수 없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아마데우스'를 보라)

1집이 보사노바 정도를 빼면 어떠한 음악장르로 딱히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사운드들로 대부분의 곡들을 채워넣었다면, 이번 앨범의 곡들은 비교적 정통적인 장르에 가깝다. 모르겠다. 클래지콰이는 이런 시도를 곡의 충실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은 결국 아이디어의 고갈로 나온 결과라고 보고 싶다. (서태지의 최근 앨범들도 비슷한 결과로 생각된다. 예전의 그의 앨범들이 평론가들을 당혹케 만드는 다양한 사운드로 채워졌다면 최근의 앨범들은 너무나 '전형적인' 음악들로 채워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다른 한국 뮤지션들이 따라갈 수 없는 클래지콰이만의 세련된 사운드메이킹이나 뽕끼를 싹 뺀 담백한 멜로디라인은 여전하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여전히 한국의 그저그런 댄스앨범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며, 이들이 해석한 디스코나 펑크, 뉴 웨이브는 그 본질을 제대로 짚고 있다. 이들의 장기였던 보사노바 리듬의 곡들도 여전히 탁월하고, '춤' 같은 발라드는 1집보다 분명히 진일보했다고 본다.

흔히 말하는 소포모어 징크스일까? 아니다. 보통 소포모어 징크스는 안일하게 전작의 성공을 답습하려 하다가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들은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 노력은 인정해줄 만하다. 그러나 내 생각엔 이들에겐 처절한 고뇌보다는 긴 휴식을 통한 아이디어 재충전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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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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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가 내게 지난 10년간 정부가 만들어낸 홍보물 중 가장 훌륭한 것을 장르 불문하고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이 작품을 내 서재에서 뽑아서 건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어느 외국인이나 만화를 잘 모르는 한국인이 한국 젊은 만화가들의 가능성을 엿볼수 있는 대표작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해도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뽑아 들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제목처럼 열 명의 노력이 모여서 만들어낸 배부른 밥 한그릇이다. 많은 옴니버스 작품집들이 들쭉날쭉한 작품성과 중구난방의 주제의식, 혹은 작품성향으로 인해 통일성을 찾기 힘든 반면 이 만화책은 다행스럽게도 수준이 비교적 고르고 주제의식은 (당연하게도) 명쾌하며 작가들의 성향도 비슷한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잘 정리된 하나의 작품집을 이루어 냈다.

이 작품집이 특히 훌륭한 것은 흔히 정부에서 기획한 만화들이 빠지기 쉬운 도식성에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아마도 이러이러한  만화책을 만들겠다는 기획만 담당하고 작가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일임하는 자율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흔히 이야기하는 '발칙한 상상력'의 비제도권 작가들 작품까지도 여과없이 품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작품집에서 가장 반가운 이름은 박재동일 것이다. 한겨레 만평으로 한국 만평의 수준을 아예 다른 층위로 끌어올렸던 그가 떠난 뒤 아쉬움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실린 한컷짜리 만화들은 여전히 그의 감각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에게 열 개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최호철'코리아 판타지'를 선정할 것이다. 쟁쟁한 작가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코리아 판타지는 그의 장기인 탁월한 풍경묘사와 진득한 주제의식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한 수작을 넘어 한국, 혹은 세계 만화사에 등재시킬지도 모르는 도입부의 말풍선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몽고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초기 도입부에 주인공이 듣는 한국말은 "YA, Inma!" 와 같이 표기된다. 즉 그녀에게 한국말은 해독이 불가능한 무의미한 언어일 따름이다. 그런데 한 두 페이지 넘어가면 점차적으로 "철야 haeyaji"처럼 익숙하게 듣는 말들은 알아듣기 시작한다. (철야라는 말을 얼마나 지겹게 들었으면...) 그리고 열 페이지쯤 이르면 그녀는 한국말을 전부 알아듣게 된다. 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흔히 아무 생각 없이 그려넣는 말풍선과 그 속의 대화에까지 고심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 작품집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사만을 늫어놓기는 어렵다. 유승하, 조남준, 그리고 최호철 같이 비교적 신진작가군에 속하는 이들이 훌륭한 작품들을 선보인 반면 어느정도 지명도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괜찮지만 이름값을 한다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간판스타'나 '악동이'로 한국만화계에 한 획을 그었던 이희재의 작품이 명백하게 가장 태작이라는 것이다. 2004년에 나온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촌스러운 딱 80년대 그대로의 인물들의 모습이나 복장, 풍경묘사를 보면서 나는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춰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닌가 싶은 우려를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한가? 십시일반이 좋은 이유는 한 두 명 좀 적게 가져와도 열 명이 밥그릇을 채우다 보면 결국 꽉 찬 밥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은 충분히 훌륭한 성찬 한 그릇이다. 나처럼 80년대를 거쳐오면서 관에서 만든 만화라면 오직 반공만화나 시책홍보만화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들에게 이 작품은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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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Illustrated Edition
댄 브라운 지음, 이창식 번역감수,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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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은 당연히 다 빈치이다. 영어 사전에서 르네상스 사람(renaissance man)을 찾아보라. 아마도 대부분의 사전은 "다방면, 특히 예술과 과학에 능통한 이를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을 것이다. 다 빈치로부터 나온 단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의이다.

모든 것이 분화되고 전문화되어있는 현대사회에서 '르네상스 사람'은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특히 검색엔진에 단어 하나만 쳐 넣으면 바로 답을 얻을 수 있는 인터넷의 등장은 때때로 주위에서 보이던 '만물박사'들이 설 자리를 뺏아간다. 이런 현실 속에서 현대의 르네상스 사람으로 제일 먼저 지목될 대표주자는 아무래도 이탈리아의 지성 움베르토 에코일 것이다.

기호학자로 시작해서 문명비평가, 논술 전문가,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소설들에서 예외없이 다방면에 걸친 박식함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나라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의 모습을 재현해내고 있다.

길게 돌아왔다. 뜬끔없이 에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소설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에코의 소설들, 특히 '장미의 이름' 과 '푸코의 진자'를 언급하면서 비교하기 때문이다. 독자들 뿐만 아니라 저자와 출판사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 이 책의 영문판 표지에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의 'Umberto Eco on steroids' 라는 서평 문구가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신문등에서 접하는 서평들은 대체로 너무나 일률적이다. "에코 소설처럼 다양한 비밀결사에 대한 지식들을 인용하긴 하지만 이 소설은 에코의 소설에 비래 깊이가 부족하고 너무나 헐리우드 영화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결국 에코의 (훌륭한)소설들과 이 (대중)소설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들은 흡사 어떤 헐리우드 영화이건 '이 영화는 허술한 이야기구조와 전개를 화려한 영상으로 커버하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진부한 시간때우기 작품이다'라고 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책임한 평가일 뿐이다.

우선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이 이 소설을 깎아내리며 만신전에 모신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는 무엇이 다른가? 내 생각에 에코의 소설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 빈치 코드와 다를 바 없는 재미를 위한 대중소설일 따름이다. 정교하게 재현한 중세의 풍습이나 방대한 유럽의 비밀결사에 대한 인용이 있다고 그 소설들이 학술서가 되는가?  그 모든 것들은 다 빈치 코드의 인용과 마찬가지로 소설적 재미를 더하기 위한 장치일 따름이다.

다음으로 다 빈치 코드의 구성은 정말로 엉성한가? 최근에 읽은 미국 대중소설들 중에 이 정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이야기구조를 갖춘 소설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발로 뛰어서 얻은 수많은 지식을 인용'하면서도 그것들을 나열하다가 이야기 구조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초보 작가들이 취재거리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버리기 아까워 무리하게 끼워넣다가 이야기의 일관성을 망친다. 반면 이 소설은 어떤 인용들도 전체 스토리의 흐름을 해칠 만큼 튀거나 무리하게 인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야기 구조만 놓고 보면 너무 많은 비밀결사에 대한 인용으로 이야기의 핍진성을 놓쳐버린 '푸코의 진자'보다 훨씬 낫다고 보겠다.

물론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는 이 소설과는 다른 층위에 있다. 그 소설들 속에는 에코가 평생을 천착해 온 기호와 사물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의 사상을 읽어내고 감탄할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에코 자신도 독자의 다수가 그러한 책읽기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소설이 위대한 것은 그러한 깊이있는 지식과 통찰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훌륭한(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드러난 것만을 읽을 때, 앞에서 말했듯이 에코의 소설들과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적당한 수준의 현학들이 만들어내는 지적인 재미를 즐기면 그만이다. 시중에  '멍청한 내용에 엉성한 구조의 소설들'이나, '현학적인 내용을 어렵게 풀어서 누구도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수면용 책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에코라는 현대의 유일무이한 르네상스 사람의 책과 비교해서 이 책을 그렇게들 깎아 내리는데는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다. 동메달을 금메달과 비교하면서 깎아내리기보다, 수많은 탈락자들과 비교해 훌륭하다고 칭찬해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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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안 2005-09-1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이네요.. 저도 장미의 이름과 다빈치 코드를 비교하면서 글을 올렸었는데..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도 충분히 동감이 갑니다.
단지, 콜롬부스의 달걀처럼... 처음 기호학을 대중에게 다가가게 한 에코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가 아닐까요. 물론 세계적으로 그렇다기 보다는 국내 독자들에게요.
그런 면에서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거 아닐까요.
좋은 글 잘 읽었고, 다시 한번 다빈치 코드와 장미의 이름, 그리고 기호학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