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만일 누가 내게 지난 10년간 정부가 만들어낸 홍보물 중 가장 훌륭한 것을 장르 불문하고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이 작품을 내 서재에서 뽑아서 건낼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어느 외국인이나 만화를 잘 모르는 한국인이 한국 젊은 만화가들의 가능성을 엿볼수 있는 대표작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해도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뽑아 들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제목처럼 열 명의 노력이 모여서 만들어낸 배부른 밥 한그릇이다. 많은 옴니버스 작품집들이 들쭉날쭉한 작품성과 중구난방의 주제의식, 혹은 작품성향으로 인해 통일성을 찾기 힘든 반면 이 만화책은 다행스럽게도 수준이 비교적 고르고 주제의식은 (당연하게도) 명쾌하며 작가들의 성향도 비슷한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잘 정리된 하나의 작품집을 이루어 냈다.

이 작품집이 특히 훌륭한 것은 흔히 정부에서 기획한 만화들이 빠지기 쉬운 도식성에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아마도 이러이러한  만화책을 만들겠다는 기획만 담당하고 작가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일임하는 자율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흔히 이야기하는 '발칙한 상상력'의 비제도권 작가들 작품까지도 여과없이 품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작품집에서 가장 반가운 이름은 박재동일 것이다. 한겨레 만평으로 한국 만평의 수준을 아예 다른 층위로 끌어올렸던 그가 떠난 뒤 아쉬움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실린 한컷짜리 만화들은 여전히 그의 감각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탁월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에게 열 개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최호철'코리아 판타지'를 선정할 것이다. 쟁쟁한 작가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코리아 판타지는 그의 장기인 탁월한 풍경묘사와 진득한 주제의식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한 수작을 넘어 한국, 혹은 세계 만화사에 등재시킬지도 모르는 도입부의 말풍선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몽고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초기 도입부에 주인공이 듣는 한국말은 "YA, Inma!" 와 같이 표기된다. 즉 그녀에게 한국말은 해독이 불가능한 무의미한 언어일 따름이다. 그런데 한 두 페이지 넘어가면 점차적으로 "철야 haeyaji"처럼 익숙하게 듣는 말들은 알아듣기 시작한다. (철야라는 말을 얼마나 지겹게 들었으면...) 그리고 열 페이지쯤 이르면 그녀는 한국말을 전부 알아듣게 된다. 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흔히 아무 생각 없이 그려넣는 말풍선과 그 속의 대화에까지 고심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 작품집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사만을 늫어놓기는 어렵다. 유승하, 조남준, 그리고 최호철 같이 비교적 신진작가군에 속하는 이들이 훌륭한 작품들을 선보인 반면 어느정도 지명도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괜찮지만 이름값을 한다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간판스타'나 '악동이'로 한국만화계에 한 획을 그었던 이희재의 작품이 명백하게 가장 태작이라는 것이다. 2004년에 나온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촌스러운 딱 80년대 그대로의 인물들의 모습이나 복장, 풍경묘사를 보면서 나는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춰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닌가 싶은 우려를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한가? 십시일반이 좋은 이유는 한 두 명 좀 적게 가져와도 열 명이 밥그릇을 채우다 보면 결국 꽉 찬 밥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은 충분히 훌륭한 성찬 한 그릇이다. 나처럼 80년대를 거쳐오면서 관에서 만든 만화라면 오직 반공만화나 시책홍보만화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들에게 이 작품은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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