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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피버
데보라 모가치 지음, 유혜경 옮김 / 아침나라(둥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저자소개 말고는 줄거리도 나와있지 않은 이 책을 알게 된 건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 덕분이다. 지금도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책을 산 작년만 해도 책을 둘러싼 띠(?)에는 데보라 모카치의 추천사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쥬드 로 때문이다!
우연히 팬 까페에서 쥬드 로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함께 영화 '튤립 피버'를 찍는다는 기사를 읽고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튤립뿌리 투기에 지나칠 정도로 흥분했던 거처럼 나 역시 잔뜩 기대감을 안은 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채 덮기도 전에 아무 준비도 없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걸 후회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 책의 결말에 대해 경고를 해줬어야 했다. 막연하게나마 해피엔딩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그들의 열정이 이토록 고통스런 결말을 초래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건 마치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처럼 시속 100km가 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에게 달려오는 열차를, 그저 손을 놓고 바라만 보고있어야 하는 끔찍한 고통과도 같다. 나는 울면서 책을 덮은 뒤 다시는 읽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리뷰를 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시 읽게 되자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원래 두 번째는 그만큼 아프지 않은 법이다.
1630년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어느 중산층 저택. 소설은 소피아라는 이름의 주인공 '나'와 남편 '코르넬리스'의 저녁식사 장면으로 차분하게 시작한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이는 없고 나이 차가 부녀뻘인 그 결혼생활은 성실하지만 어쩐지 지루해 보인다. 하녀 '마리아'와 애인인 생선장수 '빌럼'의 뜨거운 연애와는 반대로 말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소피아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젊은 화가 '얀 판 로오스'가 등장한다.
이 정도면 누구나 바로 짐작할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무분별하게 빠져들고, 소피아는 하녀의 망토를 두른 채 얀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위험한 열정에 몸을 맡긴다. 그런데 그 망토로 인해 빌럼은 마리아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 생각해 해군에 입대해 버리고, 임신한 채 남겨진 마리아는 쫒겨나지 않기 위해 주인마님의 부정을 알고있다고 협박하는데..
사랑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미친 짓이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장애물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더. 당연한 수순처럼 그들의 열정은 파국으로 치달아가고, 우리는 결과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허무만이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뒤늦게 열정을 깨달은 코르넬리스는 어쩌면 만족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피아와 얀, 그들은 어땠을까. 그들이 돈과 사랑을 모두 차지하려고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결과는 달라졌을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운명이란 게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고통도 고스란히 받아들일 만큼 젊고 순수하며 열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더 잔인한 법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열정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해도 노인 코르넬리스가 '이 꽃들(튤립)이 아름다움의 무상함을 상기시켜주지 않소?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말이오' 라고 감히 가르치려 들 때, 우리 젊은 사람은 얀이 말했듯이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 즐겨야 하는 거겠지요.'라고 되받아 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