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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26
뒤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이 사건이 당신에게 미친 영향을 나는 잊을 수가 없소. 나는 식사중에도 다른 건 생각지 않고 당신만을 보고 있었소.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귀엽고 순진하고 황홀한 모습을 영원히 잃어버린 거요.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그것은 24시간 동안에 사라져 버렸어. 당신은 완전히 늙어 버렸어..
며칠전 수잔 E. 필립스 소설에서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고아같은 한 사춘기 소녀가 남몰래 이 소설을 읽으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걸 발견하고 흥미가 생겨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원작소설보다 히치콕 영화 '레베카'를 먼저 보았는데, 이미 결말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는 건 무척 즐거웠다. 마치 단발머리에 칙칙한 교복과 흰 양말, 검은 구두를 신고 여자들 밖에 없는 학교를 다녀야 했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쩐지 그 시절로 돌아가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읽으며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여중생이 된 느낌이랄까..
베일에 쌓인 영국의 대저택. 수줍음이 많은 가난한 고아처녀. 한번 상처한 경험이 있는 부유한 중년신사. 그들의 사랑을 위협하는 광기어린 전 부인의 그림자. 그리고 전부인과 관계있는 가정부와 사촌이라는 존재. 그리고 첫 번째 결혼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클라이막스. 이 미스테리 심리소설에는 '제인 에어'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라면 푹 빠져들만한 그런 음울하고 환상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다. 거기에 누가 범인일까, 하는 미스테리 요소까지 양념으로!
결국 맥심 드 윈터는 레베카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초반부의 연애를 빼면 레베카라는 광기가 없는 드 윈터 부부의 생활은 어쩐지 따분하기까지 하다. 캐롤라인은 오히려 프랭크 클로리와 있을 때 더 편안해하는 거 같다..
암튼 사랑스런 아내 캐롤라인이 어른이 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맥심 드 윈터처럼 소녀에서 여인이 된다는 것은 어쩐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듯한 그런 서글픈 일이다. '레베카'를 읽는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강렬한 느낌을 받고 잠시 멈칫할지도 모르겠다.
참, 듀나는 '레베카'를 보고 덴버스 부인이 레베카의 잠옷을 들고 쓰다듬는 장면에서 로맨스를 느꼈다고 했는데, 난 페티시즘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