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둑이 다녀가셨다 ㅣ 세계사 시인선 103
정진규 지음 / 세계사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내 줌렌즈에 잡히는 정진규 시인>이라는 시에서 오탁번은 '멱감다가 심심해진 아이 정진규가 알몸으로 숨바꼭질을 한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정진규라는 아이가 제 몸으로 열심히 노는 시 역시 또랑또랑한 알몸을 하고 있어 그 알몸의 눈부신 <알詩>를 지나 이번에는 <도둑이 다녀가셨다>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 놓으니 내 마음에도 정진규라는 도둑이 또 한 번 다녀가셨다.
이번 耳順의 가을에 정진규 시의 이완과 긴장 사이를 다녀가신 분들은 누구누구일까, 풀밭 새싹들의 초록힘들, 민물과 바닷물 사이를 드나드는 풍천장어의 맛, 온몸 하얗게 꽃들을 뒤집어쓰고 있는 뜨락의 앵두나무 한 그루, 힘 센 벌레들의 사랑, 금거북이와 금열쇠를 가져간 도둑… 그의 '아내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했다'는 그 도둑… 그러나 알고보면 모든 것들이 그 도둑같이 불현듯 찾아와서 그림자만 남기고 떠나가지 않는가.
시가 그러하고 사랑이 그러하다. 그는 한 여자와 이별하면서 어머니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그게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이별)' 왜냐하면 몸은, 모든 깃든 것들의 알몸은 도무지 가만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내가 너에게, 시는 독자를 향해 담이라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그 틈을 지우려고 애쓴다.
그가 보내는 <戀書>를 읽어보면 '타지 않는 글자가 있다 재가 되기 직전 까만 종이 위로 마지막까지 몸을 떨며 하얗게 떠오르는 글자들'이 있다. 그 글자들은 사랑이다. 사랑의 몸이다. 타지 않는 글자로 남아 마지막까지 그 몸을 떨며 하얗게 떠오른다. 타오른다. '몸의 말'이다. 그것이 황홀이다.
정진규의 말대로 '몸'과 의논할 때, 사물들의 몸, 자연의 몸, 소리들의 몸은 딱딱하게 굳은 관념의 껍질을 깨고 일어나 나태한 우리의 뺨을 후려치며 '옷을 갈아입고' 시로 되살아난다. 우리는 그 순진무구한 몸들과 열심히 놀 줄 알아야 한다. 똑똑한 머리로는, 굳어버린 관념으로는 아무 것도 낯설게 하지 못한다. 길들여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 그 깨어나는 소리를 들어보자.
그 깨끗한 소리들의 사이로 지나가 보자
정갈해질 것이다
사이들과 놀자 아무것도 섞지 않은
온전한 알몸의 소리를 듣는
황홀과 놀자
이젠 잘 들을 수 있다
- 耳順 중에서
그러고 나면 우리도 벼락맞아 검게 그슬린 미국 요세미티 숲 천 년 나무들이 실은 천년을 기다리다 목이 마르고 속이 타 제 몸의 수소와 산소를 다 바닥내 숯이 되어버렸다는, 그리하여 부처님 眞身舍利 한 顆 씩을 모시고 사는 寂滅寶宮이 되었다(金剛經講解)는 정진규라는 아이의 뻔뻔스런 거짓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황홀들은 늘 도둑같이 왔다 담장을 넘어왔다(황홀-알13)' 이번 정진규 시집에 그 도둑이 다녀가셨다. 그렇다. 깨달음은 언제나 갑자기, 그렇게 도둑처럼 담을 넘어온다. 황홀하다. 내 몸 속 벼락이여. 나도 그 벼락 한 번 맞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