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 세계사 시인선 77
정진규 지음 / 세계사 / 1997년 8월
평점 :
품절


이제 詩를 읽으면서 울게 되는 일은 잘 없다. 더이상 詩가 노래가 아닌 것처럼 눈물이 아니라 얼마나 충격적인가, 로 現代詩의 문학성을 따져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딱 한 번 詩集의 군데군데가 올록볼록 엠보싱 처리가 되도록 울어본 적이 있는데, 바로 그 詩集이 정진규의 <알詩>이다.

'눈물은 젖은 슬픔의 몸이 아니다 가장 슬플 때 사람의 몸은 가장 둥글게 열린다 알로 돌아간다 젖은 핵이다 가장 둥글다 눈물은… 새들이 울고 있다고 말한 우리 말은 아주 뛰어난 나의 母國語다 노래는 울음이다 최초의 말이다 둥근 알이다 처음 태어날 때 우리는 누구나 울었다 최초로'(알16)'

노래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詩 속에서 울음 또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 정진규는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있거라 둥글다를 이 최초를 들고 오늘 내가 너에게 간다'라고 감히 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인가.

무엇보다 그의 詩는 참 재미나다. 알詩연작에서 더욱 그러하다. 漢詩의 옛스러운, 멋스러운 맛을 은은히 품고 있으면서도 또한 그 누구보다 먼저, 부지런히, 첨단의 언어를 발걸음도 또박또박 걸어가고 있다.

플러그 공장을 차려 '그대들의 몸에 그걸 꽂기만 하면 좌르르르 빛의, 욕망의 코인들이 쏟아져나오는 슬롯머신! 햇빛기계! 플러그를 빼앗기고 모두 정전상태가 되어 있는 어둠들에게 폭력을 쏘는 폭력! 폭력의 대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라는 '플러그-알2'詩를 보자. 그의 말대로 얼마나 '뒷자리가 깨끗한' 표현인가, 훔쳐서 나 또한 남들에게 마구마구 쏘고 싶을 정도이다.

게다가 그의 詩는 무척 관능적이다. 그는 '옷 입고 오는 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젖어있는 알몸이기에 그는 따로 젖을 필요가 없다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옷-알26)'라고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우리의 몸이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얼음 밑에다 알몸을 가둔 알몸(얼음낚시-알3)'이었기 때문이다.

그 관능은 자연스러우며 환경친화적(?)인 에로티시즘이다. 詩의 효용적 기능이 바로 이 '관능의 에너지'로 그는 '우리가 흘리고 있는 사랑들 알게 모르게 흘리고 있는 헤픈 사랑들 알도 슬지 않은 채 떠나가버린 사랑들 그것들을 모두 저장할 수만 있다면 정말 슈퍼 에너지가 될 것이다(헤픈 사랑-알37)', 그리고 詩 속에 바로 그 관능의 에너지, 관능을 모은 슈퍼 에너지가 들어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詩는 힘이 세다.

이처럼 밝고 환한 정진규의 <알詩>를 읽을 때 마다 내 '몸의 어둠들이 또록또록 눈을 뜨(알22)'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다. 정말 기분 좋은 詩集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