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완벽한 세계 세계사 시인선 80
박서원 지음 / 세계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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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원.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 백년의 시간 속에 갇힌 여자. 실비아 플라스를 닮은 여자. '죽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지요, 만사가 그렇듯. 난 그걸 특히 잘 해내요' 라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처럼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한 여자. 그 놀라운 자기 고백의 시. 그리고 그 무의식의 시세계.

박서원의 시「흰눈의 가시」에서 그녀는 '흰눈에 가시가 달린 줄 몰랐다'라고 말함으로써 영화 러브스토리의 아름다운 장면이나 떠올리는 독자의 굳은 의식을 흔들어놓는다. 아름다운 흰눈을 보면서 그 속에 가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불온한 의식은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시집의 첫 번째 시「꿈으로 내려가는 길」의 첫 부분에서 '아빠, 따뜻한 눈꽃으로 나를 할쿼져'라고 시인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흰눈에 가시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몰랐지만 시인의 내부에 숨은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 속에 가시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시인은 '신발을 신고 눈을 밟'지 않았고 '창문을 닫고 잠을 자'지 않았으며 '가시에 얼굴을 비벼'야 했고 '꿈꾸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그토록 시인은 고통스러웠고 '나는 꿈속에 갇혀 있어야 할 희한한 것들이 그 어두운 자루를 찢고 쏟아져내리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었다. 아, 그 사태를 막을 수만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흰눈'. '유리창에 무수히 희디흰 화살이 날아와 공작새처럼 퍼드득거'리는 그 아름다운 흰 눈.

두 번째 시집 <난간 위의 고양이>의 첫 번째 시「파티」에서 시인은 이미 '나는 그때 보았네 하나의 예감이었던 내 유년의 공작새가 깃털마다 파란 피를 적시며 푸드득 날아가는 것을' 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흰눈은 시인의 유년의 세계, 유년의 공작새, 시인의 '완벽한 세계' 였다.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버린, 알았어야 했을까 라고 후회를 하게 만드는 그 시절. 가시가 달린 흰눈의 그 완벽한 세계.

시인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은 그 완벽한 세계로 가는 길이「꿈으로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의 세계가 소름끼치도록 황홀한「어떤 황홀」연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오를 수는 없는가 좀 더 끔찍하게 찬란해질 수는 없는가' 라고 하는 그 비현실 속의 세계. 그 끔찍한 황홀한 세계에서 그녀는 길을 잃는다. 그리고 현실이 아닌 '열두 개의 섬이 사이렌을 울리는' 유년의 꿈 속으로 또박또박 걸어서 내려간다.

박서원의 시는 '당신들의 발목을 갈고리처럼 낚아채기를' 바란다는 서문의 말처럼 <이 완벽한 세계>로 우리를 낚아채 단숨에 쓰러뜨리고 그 세계 속에서 그녀처럼 길을 잃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낯설고 무서운 그 세계는 또한 그래서 너무나도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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