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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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종의 장난이기는 하지. 자,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면, 내가 이 장롱 안에 어떤 소설을 한권 던져넣은 뒤 문을 닫고 톡톡 세 번 두들기면 당신은 그 소설 속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거요.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얘기같지만,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우디 알렌이 쓴 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 을 보면 '쿠겔마스 에피소드' 라는 재미 있는 단편이 나온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로맨스를 원하던 유태인 인문학 교수 쿠겔마스는 어느날 위대한 퍼스키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싸구려 중국식 장롱으로 들어가 책 속으로 빠지게 되는데, 그가 선택한 책은 바로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이다.

물론 그 모험을 즐기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짜가 어딨나,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한번에 20달러. 그러나 우리가 <제인 에어 납치사건>을 읽기 위해선 단돈 12.000원이면 충분하다. 그들처럼 책 속으로 다이빙해 책 속의 인물들을 만나는 직접경험은 할 수 없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신나는 간접경험은 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영화와 관련된 종사자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어디론가 공간 이동을 하는 얘기에 늘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우디 알렌은 <보봐리 부인> 속으로 들어가서 따분해 죽을 거 같은 엠마 보봐리와 화끈한 사랑을 나누고, 20여년 이상 영화산업에서 일해왔다는 재스퍼 포드는 <제인 에어>속으로 들어가 제인 에어를 납치해오는 신나는 모험을 저지른다! 물고기자리의 특성상 '슈퍼모델이 코 위에 난 여드름 때문에 흥분하는 것처럼, 흥분과 모험을 필요로 하는([불안정한 신비주의자 물고기자리] 에 나오는 타트아냐 크루제 '별을 미워하게 된 이유' 중에서)' 나는 당연히 이 책을 밤새 읽으며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짧게 줄거리를 늘어놓자면, 문학과 관련된 범죄만 다루는 특작망 서즈데이 넥스트란 여주인공이 아버지가 발명한 책벌레와 '산문의 문'을 이용해 <제인 에어> 속으로 들어가 제인 에어를 납치하는 하데스 일당과 맞써 사우는 SF+판타지+로맨스가 짬뽕된 소설이라고 할까. (장르문학은 아니지만 세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흥분해마지 않을 요소가 가득하다) 덧붙이자면 141개나 달린 주석이 말해주다시피 영미문학사를 따분하게 외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영문학자들을 좀 더 즐거운 방법으로 만나는 기쁨도 있지 않았을까.

간만에 작가와 번역자(그 역시 독특한 소설을 썼던 작가)가 잘 만났다는 느낌이 드는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을 추천해서 재미없다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 위대한 감동을 주는 건 아니지만 잠시나마 독서폐인들이 현실을 잊고 책 속으로 빠지는 공간 이동의 기쁨을 주는 이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추천한다. 요즘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모험이다! 아래 이 책이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의 표절같다는 리뷰도 있는데.. 다음번에는 그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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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펀의 러브 레터
헨리 제임스 지음, 김진욱 옮김 / 생각하는백성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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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움베르트 에코는 '미망인을 경계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 작가들이 죽은 후 사적인 편지가 공개되는 불행한 사태를 막는 몇가지 재미난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복잡한 문제인 연애편지는 필적을 못 알아보게끔 컴퓨터를 이용하고 연인의 이름을 실제의 이름과 달리 적도록 하며, 열렬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수신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구절을 삽입하면 상대방은 그 편지를 발표하려는 생각을 단념할 거라나요. 그런데 과연 그런 애교섞인 협박 정도로 그 모든 미공개 원고 출간이라는 사후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여기 그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찬미해마지 않는 시인의 러브레터를 손에 넣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집념의 사나이가 있으니까 말이죠. 본인도 그 수단과 방법이라는 게 치사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 이름조차 밝히지 않습니다. 끝끝내 그냥 '나'라고만 나오는데, 이 치사한 인간을 만들어낸 작가가 바로 제인 캠피온이 정말 아름답게 스크린에 펼쳐낸 영화 '여인의 초상'의 원작자 헨리 제임스입니다.

하여튼 그가 쓴 비교적 짧은 소설인 이 '애스펀의 러브레터 The Aspan Papers'는 18세기의 위대한 시인 제프리 애스펀(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입니다)이 젊은 시절 미스 볼드로에게 보낸 러브레터를 입수하기 위해 이제 죽을날이 얼마남지 않은 미스 볼드로(세상에 150살이라니!!!)의 노처녀 조카딸 미스 티터를 유혹하려고 까지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요. 편지를 내놓지 않으려는 자와 어떻게 해서든 그 편지를 빼앗으려는 자의 실랑이가 정말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바야흐로 소설속의 '나'는 미스 볼드로의 집에 가명이 박힌 명함까지 만드는 철저한 준비성(?)을 보이며 하숙을 하게 되는데, 미스 볼드로는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전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도 절대 세상에는 내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정말 얄밉죠? 그리하여 자칭 애스펀 전당의 사제로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을 '나'는 그녀가 죽기직전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순간에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동정심없이 그 방에 들어가 편지를 훔치려고 하는데요. 아뿔사 결국 들키는 바람에 바보처럼 도망쳐 나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있나요? 애스펀의 러브레터인데. 결국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미스 볼드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스 디터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작전상 잘해주는 바람에 자신을 좋아하는거라고 착각하게 된 불쌍한 그녀는 그 편지들을 건네주는 대신 친척이 될 것을, 그러니까 결혼할 것을 은근슬쩍 제의합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니욧! 아무리 애스펀의 러브레터때문이라지만!

차마 그 러브레터 때문에 결혼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전술을 바꿔 결혼이 아니더라도 편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미스 디터를 찾아가는데.. 과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곤돌라와 카사노바의 도시 매력적인 베니스, 한때는 시인의 정부였지만 이제는 녹색 가리개를 쓰고 낡은 집에서 은둔하며 지내는 150살 먹은 괴팍한 노인, 그 노인을 돌보며 하루하루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고있는 노처녀 조카딸, 그리고 전기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감히 편지를 훔치려고까지 하는 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 소설은 정말 헨리 제임스 것 맞아?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짧으면서도 너무 재미있습니다. 읽으면서 얼마나 낄낄 웃어댔는지 몰라요.

그런데 과연 작가들은 자신들이 죽은 후에 그 편지들이 공개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쓸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그냥 쓰는걸까요. 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사후에 출간될 것을 약속하고 써내려 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그 일기들을 읽으니까 뭐랄까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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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와의 결혼 - Q.MYSTERY 37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8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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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추리소설 베스트 10에서 언제나 1~2위를 다투는 서스펜스 걸작 <환상의 여인>은 그런 멋진 말로 시작해 단숨에 읽는 사람을 매혹시켜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코티 향수를 듬뿍 담은 샴페인을 흩뿌려놓은 듯한 공기'라는 표현 역시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소설의 작가 윌리엄 아이리쉬가 쓴 또다른 걸작이 바로 <죽은 자와의 결혼>이라는 이 책으로 원제는 I Married a Dead Man 이다.

콜필드의 여름밤은 정말 기분이 좋다. 헬리오트로프와 재스민, 그리고 인공덩굴과 클로버의 향기가 난다. <죽은 자와의 결혼>또한 이런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해 읽어 내려가는 우리들의 가슴을 또다시 설레이게 하며 그 아련한 분위기에 녹녹히 젖어들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헬렌 조지슨이라는 여자인만큼 쓸쓸한 느낌이나 애수. 비애. 그러한 독특한 분위기가 더 잘 살아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한편의 프랑스 영화를 본 것처럼 정말 슬.프.다.

언젠가 갑자기 그가 짐을 챙겨 나를 남겨두고 이 집에서 나가리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비록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그가 그 때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일 그가 집을 나가지 않으면 내가 집을 나가게 되겠지. 나의 마음과 그 마음을 바친 남편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지만 역시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이 말을 하는 여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해야 하는가. 현재 패트리스 해저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의 진짜 이름은 헬렌 조지슨으로 임신한 몸으로 남자에게 버림받아 5달러만을 든 채 열차에 타야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열차에서 임신한 패트리스 & 휴 해저드 부부를 만나 자리를 양보받게 되는 데 갑자기 열차사고가 발생하여 부부는 죽는다. 깨어나보니 사람들은 자신을 패트리스 해저드라는 여자로 잘못 알고있다.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해저드 부부 가족들(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빌) 품에서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헬렌은 차일피일 미루다 주저앉고 만다. 그러다 차츰 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이제 자신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녀를 버렸던 예전 남자 스티브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협박편지가 날아들면서 불행이 시작된다. 그는 진실을 묻어두는 대신 시부모님의 유산을 물려받은 패트리스(헬렌)와의 비밀결혼을 강제로 요구한다. 결국 패트리스는 스티브를 죽이러 가게 되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스티브는 죽어있고 그 자리에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빌 또한 와 있다.

누가 범인인가? 알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시체를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어머니가 그날 밤 숨을 거둔다. 그녀는 죽으면서 빌과 결혼하라고 말하고 아주 곤란한 일이 생겼을때만 열어보라며 편지 한통을 남긴다. 빌이 경찰에 끌려가게 되자 패트리스(헬렌)는 편지를 열어보는 데 거기에는 시어머니 자신이 스티브를 죽였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풀고 결혼하게 되는 데 어느날 결혼한 다음에 만일 원한다면 읽어보라는 어머니의 또다른 편지를 받게된다. 결국 어머니 역시 범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인가? 이제 그녀 아니면 그 둘 중 하나이다.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 뿐. 그들은 사랑했지만 결국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졌다.

어떤 게임인지 우리는 모른다. 단지 그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인지 방법도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게임에서 실수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졌다. 패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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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흥미진진하게 쓰시네요 추천하고 ^^퍼갈게요

히나 2004-10-1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 글은 길게 늘리느라 소설 속 문장들을 많이 무단발췌한 건데.. ^^;

마음의 평화 2004-11-2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상의 여인 재미나게 읽었는데..이 리뷰를 보니 이 책도 꼭 읽고 싶어지네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같은 세상
우디 앨런 지음, 김연 옮김 / 황금가지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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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이라는 이 책을 쓴 사람은 영화감독이자 배우이자 재즈 뮤지션이기도 한 만.능.엔.터.테.이.너 우디 알렌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순이사건으로 널리(?) 알려졌죠. 영화는 몇 편 개봉되지 않았지만 비디오는 제법 많이 출시되어 있는 특이한 케이스의 감독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골수 뉴요커로 이 책 또한 < New Yorker>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70년대에 써놓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읽어도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정말 재미있고 신나고 유쾌한 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문장 속에 번뜩이는 그 엽.기.발.랄.한 상상력은 우리의 머리를 레이더 접시처럼 빙빙~ 돌게 만들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디 알렌 특유의 주문인 '요잇'만 외우면 미치지 않고도 이 쓰레기 같은 세상 속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미치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우디 알렌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너무 수다스럽다 좌충우돌 정신없다 현학적이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표현은 이 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에 선사하기 딱 좋습니다. 잘난척 정신없이 툭툭 내뱉는 그의 황당한 말투에 조금씩 익숙해질 때 쯤이면 분명 낄낄낄 웃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사는 게 조금 지루한 사람. 학교 가기 싫은 사람(우디 알렌이 컨닝하다 뉴욕대학에서 쫒겨난 사실은 유명하죠). 죽기 싫은 사람.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사람. 공부하기 싫은 사람. '운명적으로 정상적인 삶의 행로에서 약간 빗나가버린 사람'. 그리고 우디 알렌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갖고 튀어서 한번 읽어보세요. 정말 신나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Modern Life is Rubbish
bl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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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시간 속에 갇힌 여자
박서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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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이후 박서원 시인의 가슴아픈 두번째 고백이다. 그 고백은 '백년 동안의 가문'으로 나타나는 자신의 저주받은 가계사에 대한 숨김없는 고백으로 어머니와 두 남동생에게 정신적ㆍ육체적으로 학대받은 세월의 상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 또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온 희생자이면서 자신보다 더 약한 그녀에게 절망을 투사해 온 가해자였다.

시인은 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모르는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올 정도로 도덕관념이 희박했고 두 남동생은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기면증을 앓아 종종 정신을 잃고 쓰러져 모르는 사람의 등에 업혀 들어오는 누이를 부끄러워하기만 했다.

지점토를 가르치고 악세사리 디자인 회사에 다니며 모은 돈으로 집을 사고 어머니에게 찻집까지 차려주는 애정을 쏟아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시인으로 명성도 얻었지만 남동생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기면증 환자일 뿐이었다. 어머니에 의해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강제로 입원당하고 자신의 명의로 된 집과 가재도구…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겨우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한 불행한 여성의 내면일기…

돈으로 가족을 산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도 그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 가족이 짊어지고 있는 고통과 불행의 무게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너무 크고 무거웠다. 결국 그녀는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이 책을 발표한 지금도 가족들에게 전화번호와 주소가 알려질까 두려워 출판사와 잡지사에까지비밀로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이기적인 자신의 가족을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애, 사랑을 역설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실 가까이에 있는 가족만큼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상처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시간이 필요한 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과 화해하고 그 달콤쌉싸름한 인생의 열매를 맛볼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 날이 멀지않기만을 다만 바랄 뿐이다.

사실 이런 류의 휴먼 스토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물가의 요람>을 쓰고 난 다음 왜 그렇게 일찍 자서전을 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서, 라고 대답한 유미리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 그녀 역시 이 책을 쓴 이유는 가족들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빨리 잊고 다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단단한 뿌리를 박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니 그 고통이 시로써 빨리 열매맺기를 바란다.

시를 쓰세요. 당신은 시인이니까.

고백이라는 이름에 어떻게 감히 별표를 매길 수 있을까. 고통 그 자체가 진실이고 모든 고백이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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