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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펀의 러브 레터
헨리 제임스 지음, 김진욱 옮김 / 생각하는백성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움베르트 에코는 '미망인을 경계하는 방법'이라는 글에서 작가들이 죽은 후 사적인 편지가 공개되는 불행한 사태를 막는 몇가지 재미난 방법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복잡한 문제인 연애편지는 필적을 못 알아보게끔 컴퓨터를 이용하고 연인의 이름을 실제의 이름과 달리 적도록 하며, 열렬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수신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구절을 삽입하면 상대방은 그 편지를 발표하려는 생각을 단념할 거라나요. 그런데 과연 그런 애교섞인 협박 정도로 그 모든 미공개 원고 출간이라는 사후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여기 그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찬미해마지 않는 시인의 러브레터를 손에 넣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집념의 사나이가 있으니까 말이죠. 본인도 그 수단과 방법이라는 게 치사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 이름조차 밝히지 않습니다. 끝끝내 그냥 '나'라고만 나오는데, 이 치사한 인간을 만들어낸 작가가 바로 제인 캠피온이 정말 아름답게 스크린에 펼쳐낸 영화 '여인의 초상'의 원작자 헨리 제임스입니다.
하여튼 그가 쓴 비교적 짧은 소설인 이 '애스펀의 러브레터 The Aspan Papers'는 18세기의 위대한 시인 제프리 애스펀(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입니다)이 젊은 시절 미스 볼드로에게 보낸 러브레터를 입수하기 위해 이제 죽을날이 얼마남지 않은 미스 볼드로(세상에 150살이라니!!!)의 노처녀 조카딸 미스 티터를 유혹하려고 까지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요. 편지를 내놓지 않으려는 자와 어떻게 해서든 그 편지를 빼앗으려는 자의 실랑이가 정말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바야흐로 소설속의 '나'는 미스 볼드로의 집에 가명이 박힌 명함까지 만드는 철저한 준비성(?)을 보이며 하숙을 하게 되는데, 미스 볼드로는 매일밤 잠자리에 들기전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도 절대 세상에는 내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정말 얄밉죠? 그리하여 자칭 애스펀 전당의 사제로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을 '나'는 그녀가 죽기직전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순간에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동정심없이 그 방에 들어가 편지를 훔치려고 하는데요. 아뿔사 결국 들키는 바람에 바보처럼 도망쳐 나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있나요? 애스펀의 러브레터인데. 결국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미스 볼드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스 디터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작전상 잘해주는 바람에 자신을 좋아하는거라고 착각하게 된 불쌍한 그녀는 그 편지들을 건네주는 대신 친척이 될 것을, 그러니까 결혼할 것을 은근슬쩍 제의합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니욧! 아무리 애스펀의 러브레터때문이라지만!
차마 그 러브레터 때문에 결혼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전술을 바꿔 결혼이 아니더라도 편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미스 디터를 찾아가는데.. 과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곤돌라와 카사노바의 도시 매력적인 베니스, 한때는 시인의 정부였지만 이제는 녹색 가리개를 쓰고 낡은 집에서 은둔하며 지내는 150살 먹은 괴팍한 노인, 그 노인을 돌보며 하루하루 아무 의미 없는 삶을 살고있는 노처녀 조카딸, 그리고 전기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감히 편지를 훔치려고까지 하는 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 소설은 정말 헨리 제임스 것 맞아?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짧으면서도 너무 재미있습니다. 읽으면서 얼마나 낄낄 웃어댔는지 몰라요.
그런데 과연 작가들은 자신들이 죽은 후에 그 편지들이 공개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쓸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그냥 쓰는걸까요. 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사후에 출간될 것을 약속하고 써내려 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그 일기들을 읽으니까 뭐랄까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