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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시간 속에 갇힌 여자
박서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이후 박서원 시인의 가슴아픈 두번째 고백이다. 그 고백은 '백년 동안의 가문'으로 나타나는 자신의 저주받은 가계사에 대한 숨김없는 고백으로 어머니와 두 남동생에게 정신적ㆍ육체적으로 학대받은 세월의 상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 또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온 희생자이면서 자신보다 더 약한 그녀에게 절망을 투사해 온 가해자였다.
시인은 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모르는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올 정도로 도덕관념이 희박했고 두 남동생은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기면증을 앓아 종종 정신을 잃고 쓰러져 모르는 사람의 등에 업혀 들어오는 누이를 부끄러워하기만 했다.
지점토를 가르치고 악세사리 디자인 회사에 다니며 모은 돈으로 집을 사고 어머니에게 찻집까지 차려주는 애정을 쏟아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시인으로 명성도 얻었지만 남동생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기면증 환자일 뿐이었다. 어머니에 의해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강제로 입원당하고 자신의 명의로 된 집과 가재도구…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쓴 다음에야 겨우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한 불행한 여성의 내면일기…
돈으로 가족을 산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도 그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 가족이 짊어지고 있는 고통과 불행의 무게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너무 크고 무거웠다. 결국 그녀는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이 책을 발표한 지금도 가족들에게 전화번호와 주소가 알려질까 두려워 출판사와 잡지사에까지비밀로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이기적인 자신의 가족을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애, 사랑을 역설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실 가까이에 있는 가족만큼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상처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시간이 필요한 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과 화해하고 그 달콤쌉싸름한 인생의 열매를 맛볼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 날이 멀지않기만을 다만 바랄 뿐이다.
사실 이런 류의 휴먼 스토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물가의 요람>을 쓰고 난 다음 왜 그렇게 일찍 자서전을 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서, 라고 대답한 유미리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 그녀 역시 이 책을 쓴 이유는 가족들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빨리 잊고 다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단단한 뿌리를 박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니 그 고통이 시로써 빨리 열매맺기를 바란다.
시를 쓰세요. 당신은 시인이니까.
고백이라는 이름에 어떻게 감히 별표를 매길 수 있을까. 고통 그 자체가 진실이고 모든 고백이 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