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이여 안녕 창비세계문학 46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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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메라다. 셔터를 열어놓고, 생각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기록만 하는.˝

아무래도 이셔우드의 팬이 된 것 같다.

<베를린이여 안녕>은 나치가 집권하기 직전, 1930~1933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셔우드의 소설이다. 누구는 이 작품을 여섯편의 중단편 모음집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한 편의 장편 소설이라 여기기도 한다. 어쨌든 이셔우드는 이 작품을 장편 <노리스 씨 기차를 타다>와 합쳐 <없어진 사람들>이란 제목의 연작 소설로 발표하러 했었다.

소설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나‘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작가와 똑같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다. 이셔우드는 작가의 말에서 ˝내가 이 이야기의 ‘나‘에게 내 자신ㅇ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독자들이 이것을 순전히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명예훼손이 될 정도로 등장 인물들이 실제 인물의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편의상 만들어낸 복화술사의 인형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라고 강조했으나, 그 자신의 베를린 체류 경험이 소설의 큰 거름이 되었음은 명백해 보인다.

‘나(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나치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전후 베를린에서 영어 과외를 하며 살아가는 젊은 영국인 작가이다. ‘나‘가 교육 받은 엘리트 계급 출신이며 (하숙집 주인 슈뢰더 부인이나 노동 계급 출신 노바크 부인은 모두 ‘나‘같은 점잖은 신사가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 외국인이고 (특히 독일과 영국은 1차 세계 대전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 또 동성애자라는 점이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나 작중 인물들과의 관계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당시 베를린은 ‘게이 베를린‘이라 불렸을 만큼 성소수자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서술자로서의 그가 독특한 위치를 갖게 한다. 그의 이런 소수자성과 타자성 덕분에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베를린의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으며 작중 인물들-특히 여성 인물들-과 친밀하지만 성애적이지 않은 독특한 유대감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카메라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문장은 이셔우드 자신의 소수자성, 즉 퀴어스러움queerness 덕분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930년, 슈뢰더 부인의 아파트 하숙인들을 중심으로 패전 이후 경제 불황에 시달리는 베를린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낸 ‘베를린 일기‘ , 카바레에서 공연을 하고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배우 지망생 샐리와의 우정을 담은 ‘쌜리 볼스‘ , 영국 출신의 신경증적인 피터와 독일 노동계급 오토와의 일화를 쓴 ‘뤼겐 섬에서‘ ,노동계급의 가난한 다섯 식구 집에 잠시 하숙한 일을 담은 ‘노바크가 사람들‘ , 영어 교습으로 인연을 맺게 된 유대인 자본가 가족의 이야기를 묘사한 ‘란다우어가 사람들‘ , 마지막으로 나치 집권 이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가 가시화 될 무렵의 베를린을 담은 ‘베를린 일기 1933‘이 그것이다. 지하 카페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에서 부터 나치 신봉자 여가수, 가난한 노동계급 가정에서 부유한 유대인 자본가 가정까지, 작품 하나 하나 그 시절 베를린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러 인간 군상이 잘 담겨져 있다. 경제 공황, 불안정한 정치 상황,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 종말을 앞둔 것 같은 암울한 현실 인식 등, 1930년대 베를린에 대한 글이 2010년대의 한국에서도 상당히 시의성 있게 느껴진다.

재일 재밌고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배우 지망생 가수 샐리 보울스(Sally Bowles. 창비 표기 쌜리 볼스)의 이야기가 담긴 ‘쌜리 볼스‘였다. 샐리가 어찌나 짖궃고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읽는 내내 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리타분한 가족을 떠나 배우가 될 각오로 영국에서 독일로 떠나온 샐리는, 밤에 삼류 극장에서 노래를 하고 변변찮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생활비를 꾸려나가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는 이기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서투른 거짓말에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순진한 면이 있기도 하고, 짖궃으나 아이처럼 악의가 없는 사랑스런 속물이다. 워낙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샐리는 이셔우드가 창작한 인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쌜리 볼스를 읽으며 내가 궁금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와 샐리의 독특하고도 친밀한 우정에 관한 것이었는데, 모두 가상의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샐리 보울스의 실제 모델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의 산물이라기엔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나 사소한 에피소드가 많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이셔우드의 샐리 보울스와 커포티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속 홀리 골라이틀리와의 놀라운 유사성이다. 이 두 작품 모두 나레이터인 ‘나‘가 동성애자라는 암시가 있으며(이셔우드와 커포티 둘 다 실제 게이였다) 샐리와 홀리, 이 두 주인공들은 직업이나 말투까지 비슷하다. 이셔우드가 1939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쭉 그곳에서 살았고 유명한 오픈리 게이로 살았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커포티가 <베를린이여 안녕>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셔우드의 이 작품을 읽은 커포티가 홀리 골라이틀리를 창작하기 위한 상당부분의 영감을 받았으리라 확신했다.

찾아본 결과 실제 샐리 보울스의 모델은 존재했다. 진 로스Jean Ross라는 이집트 출신 영국인으로, 배우 일을 시켜주겠단 사기(-_-;샐리와 똑같다)를 당해 베를린에서 모델 일을 했었다. 로스는 이셔우드와 베를린에서 잠시 룸메이트였으며, 소설 속 샐리와 ‘나‘처럼 둘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 이 둘에 대한 옥스포드 인명사전의 설명이 웃겨서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Although Ross later claimed that she was not really like Sally Bowles, most of the more outlandish anecdotes Isherwood used in his portrait were based on fact. She insisted that she was a much better singer than Sally Bowles, but her family disagreed.˝
(출처 http://dangerousminds.net/comments/life_is_a_cabaret_christopher_isherwood_on_the_real_sally_bowles_berlin )

로스는 히틀러 집권 이후 다시는 독일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런던에서 생활하는동안 공산당에 가입해 죽을 때 까지 당원으로 남았다고 한다.

샐리 보울스와 홀리 골라이틀리와의 유사성에 대한 내 예상도 맞았다. 사실, 커포티는 1947년 뉴욕에서 이셔우드를 만난 뒤로 그보다 스무 살 연상이었던 이 영국 출신 작가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아마 그 무렵 커포티는 이셔우드의 작품을 읽고 홀리 골라이틀리라는 인물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을 것이다. Open Monthly Letters에서 지적한 홀리와 샐리의 유사점을 일부 가져오자면 이렇다.

<˝The kinship is obvious: both possess charisma, insouciance and breathtaking style. They are also women of glaringly dubious means. Sally has vague acting aspirations but spends more time fretting about the hot and cold attentions of go-getting men. Her naiveté is both charming and unnerving: “Work comes before everything,” Sally explains gravely, “But I don’t believe a woman can be a great actress who hasn’t had any love affairs….” Holly, on the other hand, is more hardnosed, reading books about baseball and horse-racing to carry conversations with wealthy Gotham gents: “I can’t get excited by a man until he’s forty-two,” she says, typically cavalier. “I know this idiot girl who keeps telling me I ought to go to a head-shrinker; she says I have a father complex. Which is so much merde. I simply trained myself to like older men, and it was the smartest thing I ever did.”

They each drop “darlings,” possessing idioms all their own. Holly speaks bastardized French. Sally’s German pronunciations are so unlikely that “You could tell she was speaking a foreign language from her expression alone.” They are strikingly beautiful and over-candid about their sex lives, Sally with mischievous provocation, Holly with jaded self-awareness. Their jaunty appeal leaps beyond the words that conjure them, as though they were flesh and blood, on the periphery of your acquaintance. How both arrived at their unconventional autonomy seems a matter of personality rather than biography. Both women are only 19 years old.˝>
(출처 http://www.openlettersmonthly.com/short-novels-breakfast-at-sally-bowles/ )

이런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쌜리 볼스‘와 <티파니서 아침을>은 매우 다른 소설이며, 어떤 부분에선 이셔우드의 성취를 뛰어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점이 커포티를 일류 도둑으로 만든다.

홀리와 샐리라는 매혹적인 두 여성 인물을 창조한 두 작가가 게이 남성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이성애자 남성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목적을 위해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당차고 세속적인 젊은 여성‘ 에 대해 그들은 기껏해야 인물을 포르노적으로 대상화 하거나, 피해자적 분노에 휩싸여 그에 대한 도덕적인 심판을 내리려 들 것이다. 여성 작가들은(이성애자이거나 성 소수자이거나)대상화나 도덕적 심판을 내릴 위험은 훨씬 덜하겠지만, 같은 성별을 공유하기 때문에 샐리와 홀리, 두 인물의 매력 중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모호함이나 비밀스러움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니까, 남성이자 동성애자인 ‘나‘와 샐리/홀리의 우정처럼 친밀하면서도 묘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를 묘사하기 힘들 것 같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제 나레이터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바뀐 만큼 샐리와 홀리는 직접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섹스 앤 더 시티>같은 드라마는 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샐리와 그의 부류Sally and Her Kind(이셔우드 자서전 크리스토퍼와 그의 부류 패러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미국 드라마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주인공의 ‘게이 bff‘의 원형을 여기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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