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하는 일
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권진희 옮김 / 사람in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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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쪽의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는 데에 반나절이나 걸렸다. 그 이유는 독서하는 내내 저자의 말에 격렬하게 반발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ㄱ- 저자 엡스타인이 문화적 엘리트주의에 젖어있는, 고루하고 경직된 보수적인 백인 남성이라고 느껴졌다. 책을 완독하고 난 다음 위키피디아에서 엡스타인의 정보를 찾아봤는데, 그는 실제로 우리 할아버지랑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었고, 노골적인 호모포비아에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였다. 예컨데 엡스타인은 1970년대 발표한 어느 에세이에서 ‘동성애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I would wish homosexuality off the face of the earth’ 라고 써서 논란을 일으켰고, 비교적 최근인 2020년에는 질 바이든 여사를 ‘꼬맹이kiddo’ 라고 부르며 그녀의 박사학위를 조롱하는 기고문을 월스트리트저널에 발표했다. 그 결과는? 그가 1974년부터 2002년까지 강의했던 노스웨스턴 대학이 그의 여성혐오적인 시각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고, 대학 홈페이지에서 엡스타인의 페이지도 사라졌다고 한다. 엡스타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편집인으로 있던 잡지 <american scholar>에서 페미니즘 학자들을 핏불이나 레즈비언dykes on bikes이라며 경멸조로 호칭했고, 결국 1991년엔 조이스 캐롤 오츠가 엡스타인의 사임을 요구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출처 : https://en.m.wikipedia.org/wiki/Joseph_Epstein_(writer) )

이 부분이 재밌게 느껴지는 이유는, 엡스타인이 이 책에서 좋은 소설의 조건으로 ’정치적 편향성이 없을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소설을 비롯한 예술 분야의 창작자들에게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기만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은 하늘에서 갑자기 툭 떨어지는 게 아니고, 예술가들 역시 현실 세계와 유리되어 구름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모든 예술 작품은 특정한 시대적 조건 아래, 특정한 사건들의 영향을 받아, 특정한 의도를 갖고 창작된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창작물은 없으며, 예술가에게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기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적으로 편향적이다.

또한 그는 pc함에 대한 21세기 독자들의 요구가 창작자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Pc함에 집착하는 독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예컨데 백인 남성 작가가 흑인 여성 인물에 대해 쓰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말이다. 사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주류 집단에 속해있다는 점이 재밌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창작물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움직임은 ’모든 창작자는 자신이 속한 계급과 젠더와 인종의 경험만 다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소수자성을 가진 인물을 재현하고 묘사하는 데 있어서 창작자에게 더 많은 윤리와 책임감을 요구할 뿐이다. 이는 소설의 작품성을 해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요소이다.

흥미롭게도 (하지만 놀랍진 않게도) 그는 여기서 j.k. 롤링의 사례를 언급한다. “(…) 결국 그녀는 ‘성전환을 포용하지 않는 급진 페미니스트’, 트랜스젠더 여성을 진짜 여성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물론 롤링은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왜냐면, 롤링이 정말로 트랜스여성을 진짜 여성으로 간주하지 않는 차별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러 공적 매체를 통해 혐오 발언을 서슴치 않는 유명 작가인 그녀를 트랜스 혐오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를 억울하게 혐오자로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을 뿐…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거슬렸던 것은 저자 엡스타인의 소설 제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 책에서 엡스타인은 영화(엡스타인은 영화 관람은 소설 읽기에 비해 너무 수동적인 행위이며 영화는 본질적으로 피상적인 매체라고 주장한다)나 그래픽 노블 (엡스타인은 그래픽 노블이 소설만큼의 복잡성과 정교함을 결코 가질 수 없기에 ‘소설의 적’이라고까지 말한다;)은 물론, 문학의 다른 장르인 시나 희곡에 대해서도 너무 이해하기 어렵거나, 너무 작위적이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 엡스타인은 심지어 같은 소설 장르 안에서도 ’진지한 소설‘ (아마도 한국에서 순문학으로 분류되는 소설) 과 대중 소설의 경계를 나누며 자연스레 둘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데, 물론 나는 이 구시대적인 구분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아마 나는 이 책에서 엡스타인이 말하는 ‘진지한 소설’의 독자일 것이다. 엡스타인처럼, 나도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들과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경외심을 갖고 있다. 엡스타인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상당수 작가들의 작품을 이미 읽어보기도 했고, 그 작가들에 대한 엡스타인의 평에 동의하기도,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츠가 ‘두 번 읽을 작가는 아니다’라는 엡스타인의 말에는 (가슴 아프지만…) 동의하지만 존 업다이크나 필립 로스가 ‘섹스에 대한 지나친 묘사’ 로 현대 소설의 가치를 훼손시켰다는 주장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로스의 <미국의 목가> 나 <Indignation> 같은 소설들은 현대 미국 문학의 정수다. 앨렌 홀링허스트에 대한 엡스타인의 기묘하고 호모포빅한 언급은 그냥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그가 비교급으로 언급한 윌라 케더에 대한 찬사는 좀 아이러니한 구석이 있다. 윌라 케더가 평생 클로짓 레즈비언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 나는 소설 읽기를, 그 중에서도 ‘진지한’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다른 예술 장르들이 소설에 비해 가치 없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내면을 강박적일 정도로 파고들어간 앨리슨 벡델의 만화를 읽어 봤다면, 누구도 그래픽 노블이 충분히 복잡하거나 정교해질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으리라.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만큼 희곡이나 시와 같은 다른 문학 장르도 좋아하고, 영화나 연극과 같은 다른 서사 예술 매체도 즐긴다. 각각의 예술 장르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삶의 진실에 대해 증언한다. 인생은 짧고, 즐길 거리는 많다. 소설 읽기만 고집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최근에 트위터에서 읽은 재밌는 글이 있다.

“2013년 <사이언스>지에 순문학 소설을 20분만 읽어도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논문이 실림. 진짜냐 아니냐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효과가 약하지만 있기는 있는 걸로 잠정적 결론.

다른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순문학을 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서 성격과 상황을 복잡하게 이해하고, 삶을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경험하는 등 더 복잡한 세계관을 가짐.

같은 소설이라도 대중소설은 순문학에 비해 이러한 효과가 약함. 그 이유가 확실치는 않으나 일단 순문학이 어휘나 문장 구조 측면에서 더 복잡하고, 이야기가 전형적이지 않아서 독자가 작가의 의도나 등장인물의 감정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됨.

뇌영상 연구에서도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내용을 읽거나 실제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추측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같고,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이 뇌영역이 잘 활성화됨. 순문학 소설 읽기가 일종의 뇌 훈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줌.“

(출처 : https://x.com/aichupanda/status/1846047784904151539?s=46 / 문제시 삭제)

인간의 조건을 깊이있게 탐구하고, 세상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삶을 더욱 섬세하고 풍요롭게 음미하기 위해서 소설 읽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치있는 모든 독서가 응당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타인에게 조금 더 관대하고 수용적이며 연민어린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인 엡스타인 씨를 보면서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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