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노래 - 김시습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2
김시습 지음, 정길수 편역 / 돌베개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섯살 때 세종 임금을 놀래킨 신동. 세조의 왕위 찬탈에 관직과 부귀 영화를 버리고 평생 떠돌아 다녔던 유랑인. 최초의 한문소설로 기록되는 '금오신화'라는 역작을 남긴 문학인.

 

  매월당 김시습에 대해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바는 그 정도.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는 금오신화는 제목만 들어보았지 읽어본 적은 없었고, 그의 글을 국어 시간에 접한 기억도 없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라는 피상적인 이해는 오히려 그의 치열한 삶에 누가 되는 것은 아닐런지.

 

  어릴 적 부름 받고 궁궐에 가니

  임금께서 비단 옷을 내려 주셨네.

  승지는 날 불러 무릎에 앉히고

  환관은 붓 휘둘러 글 쓰라 했네.

  영특한 아이라고 너도나도 말했고

  봉황이 나왔노라 서로 보려 했네.

  어찌 알았으리 모든 일 끝장나고

  이처럼 찌부러져 늙게 될 줄을. / '나의 일생' 중에서

 

 어렸을 적 과분할만큼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 준 그의 재주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니는 짐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평생을 매우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살았음을 여러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조선 최고라고들 했지.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어찌 내게 걸맞을까?

  네 몸은 지극히 작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저 개울창이리라. /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그는 관동 유람을 하면서 자연을 감상하고 노래하기도 하였지만, 피폐한 백성의 삶을 목격하고 이를 시로 남긴다. 조선 후기 정약용이 남긴 '애절양'이라는 시와 비견할만 한 애민시를 200여년이 족히 앞서는 그에게서도 발견한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팔월 늦벼 꽃이 한창 피었는데

  동북풍 불더니 여물지 못해 쭉정이만 남았소.

  도토리는 좀먹고 오이도 말라붙어

  연이은 기근에 살 길이 없소.

  내겐 기름진 땅 몇 마지기 있었건만

  힘센 자가 작년에 강탈해 갔소.

  튼튼한 머슴도 있어 밭가는 일 돕더니

  작년에 군역 지러 떠나야 했소. / '농부의 말' 중에서      

  

  시 외에도 그가 남긴 문장을 읽어 보면, 그가 처한 상황과 고민을 좀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무작정 물러나 은거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님을 역설하는 '군자의 처신'은 당시 그가 고민하고 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현의 진퇴는 오직 자신의 행동이 의리에 합당한지, 사기에 알맞은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그의 생각은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났던 것일까.

 

  금오신화의 다섯 편 이야기 중 세 편이 마지막에 실려있따. 앞의 두 편은 애정소설이면서도 상상속의 이야기인데다가 수준 높은 대화가 오가기에 솔직히 이해가 쉽지 않았고, 마지막 이야기인 '남염부주에 가다'는 비교적 이해가 어렵지 않은 하늘나라 염라국 이야기였다. 주공, 공자, 석가에 관한 인물 평, 귀신과 재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속 화자의 입을 빌린 김시습의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려로도 살았던 그는 불교에 관해서도 나름의 고민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모두 처음으로 접하는 김시습의 글이라 무난하게 읽어나가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번역이 매끄러워 공을 들인 흔적이 있고, 각주로 처리한 해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어디 쯤을 펴서 보더라도 오백년전 고뇌와 상심으로 가득한 심장과 번뜩이는 눈을 지니고 유랑하던 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