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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책 표지에 실린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소녀들을 통해 그린 동유럽 현대사", "논픽션 소설"이라는 정보를 눈에 담은 채 책을 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저자가 경험한 1960년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 시절. 그리고 1990년대에 감격스럽게 해후한 세 명의 친구들. 그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체코의 프라하. 이곳에 세계 각국에서 다국적 공산주의자들이 모여들었고, 그 자녀들이 같은 학교에서 수학을 하게 된다. 일본에서 투철한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에 오게 된 마리. 그곳에서의 학창 시절은 지적으로 강한 자극이 되었고 토론과 체험을 몸에 배도록 한 측면도 있었지만, 사춘기 시절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곳에서도 여러가지 일들과 사연들이 펼쳐지게 된다.
그저 오래된 추억의 한장면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마리는 그 시절 소중했던 친구들을 잊지 않는다. 30여년이 흘러 어른이 된 소녀들. 연예인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의사가 된,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그리스 출신의 친구 리챠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린 시절 '농땡이'였고, 성적인 주제에만 골몰하여 매우 조숙했던 그녀. 그러나 그녀는 노동자와 결혼하여 동구권 출신의 환자들을 위해 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학창 시절에 배운 교육 내용을 가장 성공적으로 내면화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번에는 매우 대조적인 현재를 보여주는 두 친구. 공산주의자 중에서도 귀족적인 생활을 하던 특권적인 삶을 여전히 이어가는 로마니아 출신의 친구도 만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스니아의 대통령을 역임한 아버지를 두었으나 아버지와 자녀의 특권은 별개라 생각하고 전쟁의 공포 속에 다른 사람과 똑같이 노출되어 있는 보스니아 출신의 친구도 만날 수 있었다.
저자가 친구를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나에게도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점에서 연속적이고 또 어떤 점에서 단절되는 것일까. 전자는 루마니아 친구에서, 후자는 그리스 친구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 개인사에 미친 중요한 영향과 흔적들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프라하의 봄,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정권의 독재와 붕괴, 보스니아 내전... 이런 굵직한 사건들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파장을 남기게 되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현대사의 사건 속에서 크던 작던 내 삶의 방향과 진로를 변경한 (또는 변경될 수 밖에 없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부모를 따라 공산주의적 교육을 받고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의 이념을 가지게 된 소녀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사람'의 문제였던가. 공산주의에서 배척하는 유대인의 피를 가졌던 루마니아 친구, 역시 종교가 중시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이슬람교의 전통을 지닌 보스니아 친구. 공산주의의 기상이 팽배했을 때에도, 공산주의의 이념과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지금에도 개인의 삶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은 어느 시대나 사람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듯 하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가장 궁금한 것은 저자인 마리의 삶. 저자의약력을 보니 마리는 러시아 동시 통역사로 활동했고 꽤 많은 논픽션 작품을 펴냈다. 그리고 아쉽게도 최근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책의 곳곳에서 그녀의 투철한 이념성이 엿보인다. 일그러진 공산주의 가족의 유형이라 할 수 있는 루마니아 친구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냉철하고 직접적이다. 저자인 마리, 그녀의 삶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떠한 모습의 성인이 되었던 걸까.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본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혹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었을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떠오르는 몇몇 친구들의 모습.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나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마음 속으로는 경계하는 라이벌이었던 2명의 친구들. 대학 때 외국에서 짧은 시간을 만났지만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아있는 일본과 스페인의 친구들. 그녀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 '뛰어난 소녀소설'이라는 오쿠다 히데오의 평가가 가슴에 와닿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