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극기"와 "십자가를 지다"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대림시기는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주 엇나가는 생각은 아니지요. 문제는, 극기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편하고 싶고, 조금 더 먹고 싶고, 조금 더 누워있고 싶고. 또 때로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그냥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저의 나약함에 대한 해답을, 게일 피츠패트릭 수녀님의 "은총의 계절"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찾은 해답을 나누어 봅니다.
자발적 극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극기를 실천해 왔습니다. 향유할 수 있는 것과 즐길 수도 있는 것들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한편 책임져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어떤 성소를 받게 되면 다른 것들을 본질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결혼생활과 공동체 생활은 극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가져다 줍니다.
반면에 자발적이지 않은 극기가 있습니다. 비자발적 극기는 우리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단순히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질병, 궁핍한 가정생활, 서서히 다가오는 노년, 실수 등과 같이 일상적인 방식으로 요구됩니다. 이러한 극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렵지만 분명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게 해줍니다.
사순시기 동안 자발적 극기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비자발적 극기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내가 항상 가장 좋은 것만 선택한다면 (예를 들어 빵을 반으로 잘라 가장 부드러운 안쪽 부분만 먹는다거나, 수박을 과즙이 가장 많은 조각을 먹고 끄트머리 부분을 다른 이들에게 남겨준다면), 하느님께서 저에게 더 심각하게 그리고 더 큰 대가를 치르며 내 자아를 부정하라고 요청하실 때 - 특이 이에 대한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을 때 - 나는 분명 옴짝달싹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 차원에서 극기를 할 수 없다면 영적 차원에서도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한 생각이나 행동뿐 아니라 거룩한 생각이나 계획까지도 포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사고 범위 너머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계획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것, 성스럽거나 꼭 필요한 것을 내버릴 수 없이 내면이 혼란스럽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모습입니다.
저의 불평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나 반성하며, 어른들의 말씀에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오랜 세월 하느님의 수도자로 살아 오신 게일 수녀님의 지혜를 나누어 받으며 저도 수녀님처럼 슬기로운 수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