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자 글 ; 김담 그림. 131 p.
바오로딸 성인전 시리즈 다섯 번째 책으로 40여 점의 그림과 함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성인전의 이해를 돕도록 관련 인물과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려주는 10여개의 박스를 넣어 학습효과를 높였다.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고통을 주기보다 사랑과 평화와 용서를 심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를 몸소 실천하며 살다 간 맨발의 성인 프란치스코의 전기다. 프란치스코는 ‘태양의 찬가’와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기도 시로 유명한 시인, 가난한 이들의 이웃, 예수님을 섬기듯 한결같이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한 제2의 그리스도, 소박하고 겸손하게 복음 말씀을 실천한 평화와 용서의 성자였다.
프란치스코는 1182년 아시시에서 커다란 옷감 가게를 하던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어머니 피카 조반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이가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 어머니는 아이 이름을 조반니로 하길 바랐으나, 지성적이고 품위 있는 아이로 자라 옷감 장수가 되길 바란 아버지의 뜻대로 프란치스코라 불리게 되었다.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기사를 꿈꾸던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군대에 지원했으나 패배하는 바람에 1년 가까이 페루자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열병에 걸려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꿈결에 ‘주인을 섬기는 일이 옳으냐, 종을 섬기는 일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받고 돈과 명예와 출세는 모두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제대 앞에서 울면서 기도한 끝에 주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로마로 성지 순례를 떠나 거지들에게 옷을 벗어주고 성 베드로 성전에 가진 돈을 모두 봉헌한 후 아시시에서 신비한 나환자를 만난다.
가난을 체험한 그는 ‘가난 부인'을 신부로 맞아들여 평생 예수님을 섬기기로 약속하고 절벽 동굴에서 살면서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러 벌의 옷이나 신발과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실천한다. 1209년에는 포르치운쿨라 소성당 근처에 초라한 움막을 짓고 맨 끝자리에서 살아가는 ‘작은 형제회'를 시작한다.
프란치스코는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고 집도 없었다. 당나귀 집에서 산적도 있다. 자루처럼 단순하게 생긴 옷에 밧줄로 허리를 묶고, 구두도 없이 맨발로 다녔다. 먹는 것도 충분하지 않아 거지처럼 얻어먹고 살았으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해와 바람과 달을 형제자매로 대했다. 질병과 죽음까지도 누이로 여겼으며, 밤새도록 기도하느라 엉덩이가 아플 때는 “내 ‘엉덩이 형제'가 몹시 힘들 테니 그만 쉬어야겠군.” 하고 말했다.
새들한테도 설교했으며 매미와 늑대하고도 친구가 되었다. “내 자매인 새들아,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여라. 너희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여주신다. 색색의 깃털 옷과 고운 목소리와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주시지 않았니? 둥지를 틀 나무도 주님이 주신 선물이란다. 목마르면 마시라고 시냇물도 주셨고, 몸을 숨기기 좋게 바위틈도 마련해 놓으셨다. 내 자매인 새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생명을 주시고 돌봐 주시는 은혜를 잊지 말아라.”
말년에는 심한 눈병을 앓고 앞을 거의 보지 못했으나 하느님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태양의 찬가'를 지었다. 1224년 베르나 산에서 성흔을 받고 2년 동안 예수님과 같은 고통을 느꼈으며 온몸이 부어오르는 수종증으로 고생하다 1226년 마흔넷의 나이로 하늘나라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