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인간" 시리즈로 유명한 송봉모 신부님이 "성경 인물"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내신 책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만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대단했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나이들어 얻은 귀여운 아들 이사악까지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었겠지요. 우리도 그의 믿음을 본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마 아브라함에 대한 모범답안 같은 해석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만난 하느님이 그런 요구를 해 오신다면, 저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밤새워 고민하는 모습,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사악을 데리고 이것저것 짐을 챙겨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 아들을 꽁꽁 묶어 내려치려고 하는 모습 등의 묘사는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제가 마치 곁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괴로와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깊은 신뢰는, 그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원하시는 것은 그를 통하여 더 큰 일을 이루시려는 목적이 있으심을 확신하게 해 주고, 긴 고뇌와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순종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저자 송봉모 신부님은, 아브라함의 고통스러운 확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한 예를 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부분을 조금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좀더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린 아들의 얼굴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가 났다. 급히 상처를 꿰메야 하는데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의사가 마취도 하지 않고 상처를 꿰메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지를 꽉 붙잡고 있어야 한다. 아들이 울부짖으며 간절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제발 자기를 놓아 달라고 애걸한다.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아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 어서 상처를 꿰메지 않으면 아들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아들을 단단히 붙들고 상처를 꿰메게 한 것은, 그렇게 해야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3일 동안의 여정 끝에 그러한 확신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선하신 하느님이 이사악을 원하신 것이기에,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아들에게 선이 될 것임을 확신했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바치려고 한 것이 아닐까? (p.107-108)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둘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의 명령에 시선을 둘 수도 있고, 그 명령을 내리신 하느님께 시선을 둘 수도 있다.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며 선택이다. 우리가 시련 중에 있을 때인 생의 혹독함만을 바라보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살기가 왜 이렇게 힘든가?'하며 탄식할 수도 있고, 그 혹독함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문제를 해결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우리 마음이 산란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기보다 문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이 요동을 쳐도 절망하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이 얼마나 심하게 요동을 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 그 너머에 계신 하느님을 보느냐 안 보느냐다."(p.109-110) 

 때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이 고통스럽게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상처뿐이지만, 하느님께 매달리며 고통에서 무엇인가 배운다면, 우리에게는 상처도 남지만 교훈도,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물로 쓸 양을 마련해 주신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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