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철학이다. 플라톤은 망각을 이기려는 본성적 작용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동양인들은 하늘에 오르려면 49제를 지나 이 생을 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이생과 저생 사이에 망각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리움은 망각으로 감추어진 본질에 대한 천착이다. 



어제, 아내는 말한다. 

우리 카페제라에 가요.

거리가 어딘데!

그래요? 그래도 가고 싶어요. 



그리운 곳이다. 가보고 싶은 곳. 그곳에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충직하게 반응한 성실함에 이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본연의 삶.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을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부러움이고 자신도 그렇고 싶다는 일종의 연대감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우리는 그곳에 이끌렸다. 그것은 그리움이고, 그것은 심장이 알려준 잊힌 고향이었다.



대전 서구 길마루길 93 

272km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신 대구를 타고, 구미를 지나, 대전을 또 지났다. 어디쯤일까? 시내는 아니었다. 시골로, 또 시골로. 

이런 곳에 카페가? 사람들이 올까? 도착하기도 전에 걱정이 앞선다. 일종의 연민일까? 소신 있는 삶이라고 부러워하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것은 삶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깨뜨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체득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헌 교회당을 개조해 만든 시골의 작은 카페. 

낭만이란 단어보단 '회복' '치유' '힐링' '편안함'이란 단어들이 먼저 떠오른다. 아내는 카페를 찾아가는 동안 입술에서 '초록 초록' 되뇐다. 그렇다. 그곳은 초록이었다. 초록의 숲이 카페 주변에, 카페 안에 다소곳 앉아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반긴다. 손수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을 함께 했다. 



삶에 대해

소명에 대해

커피에 대해

우린 그렇게 세 시간을 보냈다. 

로스팅과 커피에 대한 집요한 열정을 들었다. 



커피는 철학이었고,

한 잔의 커피는 인생이었다. 



그리움은 여운이 남는다.

드립 하는 장면은 영원의 그림처럼 찰나의 문을 통해 그리움을 품어냈다.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이다. 삶이 그렇고, 열정이 그런 것이다. 아늑한 카페 풍경 속에서 향기를 담아 드립 한 한 잔의 커피가 마음을 데운다.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양산에 도착했다. 아직도 카페제라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 마음은 설렌다. 그리움은 언제나 망각을 이긴다. 삶을 사랑하고, 커피를 사랑한 한 영혼과의 대화는 아직도 달콤하다. 



또 가고 싶다.




아직 가보고 싶은 카페가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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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성 니콜라스 카바실라스

동방 정교회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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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이야기. 

낯선 곳에서의  세 여인의 이야기. 

두 번을 봤다. 심심한듯, 지루한듯, 잔잔하게 흐른다.

보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 진다. 

한 끼의 식사는 무엇을 의미할까? 때론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사랑을 만들고,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치환시킨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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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8-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몇년 전에 보고 참 좋았는데
다시 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해피클라라 2017-08-2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만 봤는데, 맞아요.. 심심한 듯 하지만 매력적이어서 기억에 남게 되는 영화였어요~
 

아들 때문에 검정고시 문제집을 알아 보는데... 종류가 의외로 많다. 아들은 결국 자퇴를 결정했고 다음 주에 자퇴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 두렵기도하고 설레기도 한다. 삶이란 늘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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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개월전 ㅈ으로부터 자서전을 대필 받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필이 아닌 저자의 이름을 가진 전기형식이었다. 처음에는 오케이하고 ㅈ의 삶의 흔적들을 찾았다. 그런데 찾으면 찾을 수록 실망이엇다. 그래서 결국 안한다고 통보했다. 한 번써주면 오백이 넘는 수입이 들어오지만 도무지 양심상 자신이 없었다. 


자서전의 기본 원칙은 자신이 쓰는 것이고, 나는 대필이 아닌 첨삭, 아니면 삶의 정황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분은 진실이 아닌 꾸며진 인생이었다. 자서전까지 꾸미려는 역겨움에 그만 두고 말았다. 아무리 무명의 작가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말도 안된다. 요즘 시대에 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많은 직업이 그럴 것이다. 


누구나 다 먹고 사는데, 왜 이리 힘든 사람, 아니 직접이 많아 진걸까? 그건 순전히 분배의 법칙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합이 1000이라면 공평하게 100씩 열이 가지면 되지만, 현대는 아니다. 한명이 800이고, 한명이 100이고, 나머지는 8명이 100을 나누니 13도 안된다. 뭔가 잘못되도 한 참 잘못된 것이다. 



자서전 책이나 챙겨두자. 잘 보이던 책들인데 오늘에야 눈에 들어온다. 타인의 전기를 쓰는 것과 자신에 관해, 자신을 쓰는 법은 확실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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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7-08-16 0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문작가시군요 잘 거절하신 듯 미국은 보통 대상자와 진짜작가 둘 다 표기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국은 대개의 경우 대필저자는 그림자라고 압니다 이런 구석구석까지 사회정의가 실현될 날을 그립니다

낭만인생 2017-08-16 20:23   좋아요 0 | URL
전문 각가 아닙니다. 그냥 이곳 저곳 잡글 쓰는 자칭 프리랜서입니다. 수입은 거의 없구요.